이렇게 살다가 아파트의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되니 숨이 막혔다. 푸른 나무와 꽃들이 자나 깨나 어른거려 아파트로 이사 온 걸 후회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베란다 공간을 활용해 보기로 했다. 화분 몇 개를 들여놓고 꽃을 길러 봤지만 성이 차지 않아 베란다를 초록빛으로 꽉 채울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조롱박을 기르게 되었다.
커다란 화분에 조롱박 모종을 사다 심고 열심히 물을 주었다. 뻗어가는 덩굴손이 잘 감고 올라갈 수 있도록 줄을 실하게 매주고 연한 덩굴손이 행여 줄을 잡지 못할까 봐 어미 심정으로 정을 쏟았다. 정성을 쏟은 만큼 보답을 했다. 여리디여린 덩굴손은 한번 잡고 감으면 절대로 놓지 않고 야무지게 위로위로 올라갔다. 베란다의 오른쪽에서 왼쪽까지 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올 즈음 하얀 박꽃이 피기 시작했다. 탄성이 나왔다. 어스름 저녁이면 하얀 꽃이 피었다가 이튿날 아침이면 시들었다. 박이 될 볼록한 열매를 달고 있는 암꽃과 달리 수꽃은 맹송맹송 꽃만 달고 있었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조롱박에게 인사를 하며 암꽃부터 살폈다. 수꽃에 비해 암꽃의 개수는 적었다. 더구나 여기는 벌도 나비도 없어 내가 대신 수꽃 꽃가루를 붓에 묻혀 암꽃에다 옮겨주기로 했다. 억지 자연의 섭리가 걱정이 되었다.
아파트 마당에서 올려다보면 초록색으로 덮인 11층 우리 집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멋졌다. 조롱박이 나날이 커가는 걸 보는 재미가 대단했다. 멸치내장을 묻어주고 달걀 껍질도 잘게 부숴 뿌려주었다. 덕분에 조롱박은 앙증맞은 모양을 갖추고 크기도 알맞게 자랐다. 그런데 다 여물기 전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싱싱하던 잎사귀에 군데군데 하얀 가루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급속도로 전체 잎사귀로 번졌다. 좁은 베란다에는 빨랫줄도 있고 간장독과 된장독도 있어서 약을 칠 수도 없었다. 조롱박이 여물 때까지 애가 탔지만 기도로 참고 견뎠다. 간절한 기도 덕분에 잎사귀는 다 말라버렸지만 조롱박이 제대로 여물었다. 작은 것, 큰 것, 자루가 길쭉하게 생긴 것, 볼록볼록하게 동그라미가 두 개 연속으로 눈사람처럼 생긴 것 등 모양도 크기도 각각인 조롱박이 열 개나 되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지붕에 박을 키워 추석에는 달짝지근한 박나물도 만들고, 여물면 타서 바가지를 만들던 기억을 더듬어 나도 그대로 따라했다. 드디어 박 타는 날을 잡았다. 가는 줄톱으로 가운데 금을 그어 그 금을 따라 박을 켰다. 제비가 물고 온 박씨처럼 내가 정성껏 키운 박씨가 이렇게 예쁜 조롱박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집에도 행운이 쏟아질 거라 믿으며 쓱싹쓱싹 즐거운 마음이 넘쳤다. 행여 실수할 새라 완벽한 대칭으로 반듯하게 자르기 위해 아기 다루듯 조심조심했다. 열개의 조롱박이 스무 개가 되었다.
끓는 물에 살짝 삶아 속을 파내고 얇은 겉껍질도 벗겨내서 마침내 진짜 조롱박 바가지가 완성되었다. 연한 연둣빛이 도는 햇 바가지는 정말 예뻤다. 착한 일도 별로 안한 내가 이런 선물을 받다니 흥부가 받은 금은보화보다 훨씬 좋았다. 그늘에서 잘 말린 바가지를 자랑스레 한 쌍씩 이웃에 나눠주고 나니 다섯 개만 남았다.
30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아줌마에서 할머니가 된 것처럼 그 연두색 바가지도 갈색으로 변했다. 갈색 조롱박을 보며 나의 연두색 세월이 갈색 세월로 익어간 것 같아 조롱박에게 한층 사랑스러움이 느껴진다. 예쁜 바가지를 들여다보며 옛 생각에 잠기는 이 시간도 행복하다.
2017.3.
첫댓글 저에게 옛날을 회상케하는 글입니다.
직접 수꽃의 꽃가루를 암꽃의 꽃에 옮기시고,
그정성이 보지않아도 다 가늠이 됩니다.
저도 지금 아파트 오기전에 베란다 전체에 하얀 자갈을 사서 깔고 흙을 덮고 해서 아주 울창한 화단을 만들었어요. 밖에서 보면 베란다에 큰 나무 부터 작은 꽃까지, 마치 꽃집을 보는듯 했거든요. 지금 아파트로 와서 베란다 트고 실내에 꽃과 나무를 들여 놓으니, 잘 안되고 벌레도 끼고 해서 주변에 다 나눠 줘버렸어요.
가끔 그속에서 지내던 그때가 그립기도 해요.
예쁜 그림입니다.
베란다 전체를 울창한 화단으로 꾸민 정성이 대단합니다.
요즘은 베란다를 터서 실내를 넓히는 것이 대세죠.
우리집도 그래요.
베란다는 작은방 하나에 조그맣게 내어달아서 빨래걸이가 천장에 달려있어요.
사철 피우는 꽃 화분이나 몇 개 들여놓을까 생각 중입니다.
블로그에서 복사해 옮기는 과정에서 줄 사이 간격이 고르지 못한데 수정이 안되네요.
첫부분이 촘촘해서 보기가 언짢아요.
네이버에는 줄 간격을 내맘대로 조정할 수가 있는데 다음엔 그런 기능이 없나 봐요.
선배님의 연두색 시절을 따라가보고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글도 예쁘고 그려진 풍경도 아주 예뻐요.
칭찬에 고무되어 습작이나마 쓸 용기가 더해집니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써보렵니다.
지난날의 23세에 결혼하여 새색씨 때 그 때는 아파트란 것은 구경도 못했고 마당이 있고
밭에는 채송화 봉숭아 사루비아 맨드래미

피우고 씨
받고 ...그 시절이 떠 오르네요 귀여운 조롱박 조롱 조롱 걸어 놓고 행복했어요 
장독대가 있고....담장에는 수세미가 주렁 주렁
그 시절이 그립지요.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았지만 인정이 오가고 마당에는 꽃을 기르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