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배냇병신의 봄날!
김자현
포천 축석으로 가는 길에 농장을 가진 친구가 문경서 두릅이 왔다고 초대한다. 그 귀한 두릅으로 동무들과 함께 그 부군들까지 초대해 봄의 맛을 선사할 만하니 인심도 후하고 배포도 넉넉하다. 단짝 친구와 내가 젤 늦었으려니 했는데 도착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바쁜 주인을 붙들고 손님 행세도 할 수 없어 쑥을 뜯겠다고 하자 여편네 닮은 널브러진 소쿠리 하나 내놓는다. 황토방 뒤편, 산으로 오르는 돌계단 사이에 쑥이 다복다복 모여 앉았다. 쑥을 뜯으며 내려다보자 농장 이곳저곳으로 철쭉도 무리 지어 나부죽 얘기 중이고 발간 손가락을 내민 단풍나무에 바람이 서성인다. 아침에 창을 열고 보니 하늘은 흐리고 뉴스에서도 비가 올 예정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웬걸! 멀었는데 유월처럼 두꺼운 햇살이 뜨끈거리며 잔등을 타고 논다.
조금 있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도착했다. 남자들은 놔두고 친구 한번 잘 둔 덕에 몇십 년만인지 도회의 여인들이 화사한 봄나물 언덕에 지질펀펀한 엉덩이를 들이밀고 나물을 뜯는다. 둔덕을 조금 오르자 돌나물과 정말 쑥밭이다. 쌓인 가랑잎, 갈비들을 헤치자 키 큰 나물들이 고개를 쑥쑥 내민다. 땅이 기름져서 그런지 이 정도 키가 되면 질긴 법인데 쑥은 칼을 대기가 무섭게 삭삭 베어진다. 청회색 펄! 쑥의 팔다리에 돋은 진주 모, 솜털에 앉은 쑥 빛깔이 나는 정말 좋다.
그 옛날 언니와 어머니와 걷고 또 걸어 봄나물을 뜯으러 뚝섬에 당도하면 나는 기운이 소진되어 견디기 힘들곤 했다. 학령도 되기 전 기껏해야 대여섯 살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무리한 주문이다. 더구나 어른들은 괜찮아도 십 리도 넘는 길을 걸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나 뚝 길 양쪽으로 돋아난 파릇파릇한 새싹들! 고개를 쳐들면 노란 하늘이 뱅뱅 돌았지만 어지러운 귀결에 종달새 유난히 지저귀던 곳! 비루먹은 망아지 같았던 나는 그 벌판에만 서면 금방 기운이 소생하곤 했다. 탁 트인 벌판의 양쪽에 둑길이 있고 그 아래, 푸른 바람결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융단 같은 미나리꽝에서는 비릿하고 싱그런 물비린내가 올라오고 입속으로 들어온 바람은 나를 풍선처럼 부풀려 벌판을 둥둥둥 떠다니곤 했다.
그런데 어린 계집아이의 감성을 살필 새가 없는 모녀는 막내에게 고개를 땅에 처박고 나물 뜯기를 오죽이나 바랐다. 아장거리고 걸을 때부터 말귀도 잘 알아듣거니와 아버지 손수건 양말 같은 것을 암팡지게 빨아대는 막내딸이어서 아마도 들판에 데려다 놓으면 제 몫을 단단히 할 줄 아셨던 모양이다. 나물 캐라고 성화를 대셨지만 하늘이 밀어 올리는 빛과 바람의 애드벌룬을 타지 않고 어떻게 한 끼 반찬을 위해 쪼그리고 앉을 수 있겠는가. 그 어린 계집애에게 오지게 바라는 것이 많기도 한 언니와 어머니다. 뚝섬에 가는 날이면 영락없이 발밑에 자욱하게 돋은 나물들이 아까워 그를 버리고 겅중거리는 나를 어머니는 무슨 배냇병신 취급하셨다. 손톱만 한 것이라도 모두 캐야 자리를 뜨는 언니와는 대조되어 나는 엄마의 눈에 정말 바보로 보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거의 열 살이나 차이가 나는 언니와 나를 비교할 대상인가! 언니와 어머니의 나무람은 거의 분노를 동반한 것이어서 파릇파릇한 대지와 마주하려고 노력했지만, 꼭 장님처럼 내겐 나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유성기에서 배웠던 노래, “한 푼 없는 신사가---”어쩌고 하는 <빈대떡 신사>나 아니면 오빠의 애창곡 <올드블랙 죠>, <스와니강>, <켄터키 옛집>을 드나들며 흥얼거렸다. 콧방울은 부풀어 오르고 바람을 잡으러 이 둑에서 저 둑으로 뛰어다녔던 단발머리 소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오는 것은 자기연민일까.
우리 말고도 소녀와 엄마들의 허연 잔등이 목화솜처럼 피어있던 푸른 언덕에 겅중거리고 뛰어다니던 것은 비쩍 말라 각다귀 같았던 계집애 하나뿐! 모두들 어려웠던 시절, 하늘은 살뜰도 하시지. 쑥, 미나리아재비, 냉이, 씀바귀, 비름, 질경이 등, 지천인 나물들을 뜯어 바구니를 채웠다. 그 뚝 길을 나는 호랑나비를 잡으러, 장다리꽃에 앉은 벌을 따라 뛰어다녔다. 오늘 친구네 농장에 와 쑥을 뜯으며 그 옛날 지점으로 돌아가 본다. 초록의 들판을 구르던 황금의 빛살들! 저녁이 오는지 아침이 오는지 모르던 철 없던 시간들. 계절이 실어 오는 바람에 혼절하여 나는 천국의 마당에 내던져졌던 것을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어머니가 보실 수 없었겠지. 그날들을 반추하는 사이 오늘 뜯은 쑥이 소쿠리에 한가득하다. 옛날 어머니 성화에 이제야 답하며 뒤 곁에서 내려와 그늘 밑 평상으로 다가선다.
그새 우리를 초대한 안주인은 솜씨도 좋지. 쑥버무리에 두릅 초무침과 두릅 전에 막걸리를 겸한 술상이 열무 겉절이까지 번듯하다. 부부 동반 모임이지만 이제 늙어가는 우정이 내외가 없다. 막걸리 사발을 들어 건배하고 안주를 볼이 터지게 우겨들 넣는다. 친구들을 건너다보면 가물거리는 봄 언덕에 어느새 친구들이 아니라 네 어머니 내 어머니가 둘러앉았다. 봄이라는 계절이 오면 언제나 배냇병신이 되었던 봄나물 언덕에 희끗- 어머니 치맛자락이 나부낀다. 그리운 뚝섬, 흔들리는 미나리꽝 아래 피어오르는 내 젊은 어머니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