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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위해 14년 흘린 땀
나비가 되기까지 쉽지 않았다. 먼저 몸을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리를 찢고, 허리를 꺾고, 물구나무를 서고, 그렇게 해서 부드러워진 몸으로 항아리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동료의 발에 들려 공중으로 떠다녔다.
그네를 타고, 외발 자전거를 타고나서야 줄을 탈 수 있었다. 차곡차곡 스무 가지의 기술을 익혔다. 연습을 하지 않는 시간은 잠잘 때와 밥 먹을 때 뿐이었다. 줄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다. 철줄에 감긴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니 발바닥의 살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졌다. 허벅지와 엉덩이, 무릎 할 것 없이 줄에 닿는 부위의 아픔도 무뎌졌다. 그래도 14년이 지나니 여유가 생겼단다. 하루 세 시간의 연습만으로도 충분히 공연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단다. 하지만 긴장을 절대 늦출 수 없다. 줄타기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기 때문이다.
줄에서 떨어져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은 문제가 아니란다. 오랫동안 공연을 할 수 없는 것이 더 큰 불행이란다.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줄 위에서 집중한다. 줄 탈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은 그녀 입에서 나올 리 만무하다. 그녀의 공연 시간은 5분. 5분 동안 아무 생각이 없어야 산다. 관객들의 박수소리, 환호소리가 들려서도 안되고, 자신을 비추는 조명도 의식해서는 안된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사는 것도 그래야 한다. ‘흥청망청, 비틀비틀 요지경 세상’에서 휩쓸리지 않으려면 온몸으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녀는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그녀가 사는 마을에 ‘대우서커스단’이 공연을 하러 왔다. 서커스단은 광대를 앞세워, 북을 울리고 노래를 부르며 길놀이를 신명나게 펼쳤다. 호기심 많은 소녀는 서커스 천막으로 당장 달려갔다.
외발자전거를 타는 곡예사가 멋졌다. 몸을 자유자재로 휘는 아크로바틱도 매력적이었다. 꼭 해보고 싶었다. 내친김에 대우서커스단에 입단했다.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관객이 줄기 시작하더니 결국 수지를 맞출 수 없었던 서커스단이 해체됐다.
10년 동안의 힘든 인생 1막이 그렇게 마무리됐다. 다행히 동춘서커스단이 있었다. 이봉조, 서영춘, 배삼룡, 장항선, 남철, 남성남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거쳐간 곳, 그녀에겐 꿈의 무대였다. 4년 전, 그녀는 그렇게 동춘서커스단에서 새로운 서커스 인생을 시작했다.
이것이 ‘진짜’ 서커스
동춘서커스예술단은 현재 전남 장성 용매골에서 공연중이다. 알록달록한 대형 천막 안에는 200여 개의 의자가 마련돼 있다. 드럼통으로 만든, 소위 ‘불깡’을 이용해 난방을 한다. 저녁 공연 때는 한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는다. 지직지직, 잡음이 조금 섞인 음향장비, 세련되지 않은 조명장치.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무대와 공연이 오히려 정겹다. 40여 명의 단원들은 아크로바틱에서부터 그네타기, 줄타기, 마술 등 50여가지의 기예를 선보인다. 이것을 전부 구경하는 데 꼬박 4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단원들은 매 공연마다, 1시간 30분의 분량에 맞춰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학생들이 단체로 구경오고, 인근 영광이나 함평 등지에서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끼리끼리 어울려 오기도 한다. 아이들은 신기해서 좋아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향수에 젖게 돼 즐겁다. 공연이 끝나면 과일이며, 빵이며 예쁘다고 챙겨준다. 이 맛에 줄을 탄다. 그래도 그녀는 서운하다. 서커스를 찾는 사람들이 수년 전부터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보통 관객 수가 스무 명을 넘지 않으면 공연이 취소된다. 그렇게 취소된 공연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얼마 전, 사정상 여섯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공연을 했다. 14년 만에 처음있는 일이다. 빈 자리 만큼이나 그녀의 마음이 허전했다. 관객이 많아도, 적어도 서커스는 계속 된다. 그녀도 집중한다. 하지만 서커스가,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창 젊고,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 7시. 가수 장윤정의 흥겨운 ‘짠짜라’ 음악과 함께 오늘의 마지막 공연이 시작된다. 드럼통 불깡에서 새어 나온 숯 연기가 자연스럽게 무대에 퍼지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마술쇼, 자전거쇼, 의자탑쌓기, 강아지 재롱, 그네타기 등이 차례로 진행된다. 마침내 그녀가 등장해 줄에 올라 다시 곡예를 펼친다. “집에 가서 빨랫줄 있으면 한 번 연습해 보시라”는 사회자의 구수한 입담이 흥을 돋운다. 그녀의 서커스는 진실하다. 관객을 속일 필요도 없고, 속일 이유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서커스. 진짜 서커스에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은 함께 친구가 되고, 함께 숨죽이고, 손에 땀을 쥐게 된다. 관객과 배우와 곡예사들이 같이 울고 웃게 된다. 어찌보면 서커스단은 현대판 사당패다. 사당패의 놀이판이 그러했듯, 보통사람들의 질박한 삶과 애환, 소박한 염원이 단원들의 몸동작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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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닌다. 서울은 물론, 울릉도, 제주도까지 서커스 천막이 안 쳐지는 곳이 없다. 아홉 살 때까지 완도가 세상 전부인 줄 알았는데, 돌아 다녀보니 우리나라도 참 넓더란다. 순박하다. 유랑 생활이 불편할 법도 한데, 넓은 세상을 알아가니 좋단다.
천막을 치면 짧게는 한두 주, 길게는 두세 달까지 머무른다. 이동 직후 천막이 새로 설 때까지의 약 일주일간이 그녀에겐 휴가다. 휴가라고 해서 거창하게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잠깐 짬을 내 친구를 만나고, 주변에 유명한 여행지를 돌아다니고, 몸이 굳지 않게 연습하는 것이 일과다. 스물세 살, 연애도 하고 외모를 가꾸는데 관심도 가질 꽃다운 나이. 하지만 그녀는 컴퓨터 게임이 가장 좋다고 말하는 아직은 풋풋한 소녀다. 만약 길가다 동춘서커스단을 만나게 되면, 그녀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진짜 사는 모습 한 번 구경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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