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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두렵고 답답할 때
참고말씀: 창27:33-36,41; 31:3,17,18; 창33:3,4,10; 잠18:16; 21:14; 눅18:7,8
읽을말씀: 창32:3-32; 잠16:7
주제말씀: 창32: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첫째, 누구에게나 두렵고 답답한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창32:6,7)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어떤 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까? 마음이 심히 두렵고 답답한 상황입니다. 어느 때에 찾아옵니까? 주로 인생의 전환 국면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7절)
야곱의 경우는 언제 이런 상황에 직면했습니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 어쩌다가 두렵고 답답한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까? 20년 전 야곱이 저지른 사건 때문입니다. 당시 그는 아비와 형을 속여 무엇을 탈취했습니까? 장자의 축복입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슬피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창27:33-35)
장자의 명분에 이어서 장자의 축복까지 가로챈 것입니다. “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창27:36)
그러다보니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되고 말았습니까? 나빠질 대로 나빠졌습니다. 급기야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까지 품었고,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창27:41) 야곱은 이런 형을 피해서 멀리 밧단 아람까지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고향을 등지고 살 수 없는 법. 야곱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서(창31:3) 고향으로 돌아기로 했으나, “야곱이 일어나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 새.”(창31:17,18) 형과의 해묵은 감정의 골을 생각하면 눈앞에 캄캄했습니다.
더군다나 형은 자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400명이나 되는 무리를 이끌고 나아온다 하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6절) 그의 마음은 심히 두렵고 답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창32:7 상)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슨 일로 심히 두렵고 답답해합니까? 무슨 일만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고 암담합니까?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 계속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둘째, 두렵고 답답할 때는 자구책을 찾게 됩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창32:7,8)
이런 상황에서 야곱은 맨 먼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스스로 자구책을 찾기에 급급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① 자신의 가족들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7절 하) 어째서입니까?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라도 피신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8절)
② 형에게 예물을 보내되 그것을 여러 떼로 나누고 각각 거리를 두게 했습니다. “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고.”(16절) 어째서입니까? 예물로 형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린 후에 만나기 위함입니다.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여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20절 하)
③ 자신은 맨 뒤에 남아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자 했습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22-24절)
이 같은 자구책들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까?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공한 것도 아닙니다. 어째서입니까? 우리는 인간적인 자구책을 통해 약간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그것이 지닌 한계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자구책들을 마련하곤 합니까? 야곱의 경우를 통해 세 가지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최소화의 법칙입니다. 즉 피해를 피할 수 없다면 그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합니다. 전부를 건질 수 없다면 절반이라도 건져야 할 것이 아닙니까?
둘째, 선물의 법칙입니다. 즉 선물을 보내서 상대방과 화해하거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합니다. 사실 선물을 안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적절한 선물이 유용하며 이를 통해 노를 쉬게 하거나 그의 길이 넓어질 수 있음 등을 증언합니다. “사람의 선물은 그의 길을 넓게 하며 또 존귀한 자 앞으로 그를 인도하느니라.”(잠18:16) /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21:14)
셋째, 관망의 법칙입니다. 즉 잠시 문제로부터 떨어져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판단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는 방법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잠시 떨어져서 문제를 들여다보면 문제가 더 잘 보일 수 있고, 때로는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우리도 두렵고 답답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자구책을 마련했으며, 이 상황을 피하거나 돌파하기 위해 어떤 방법들을 스스로 찾아 나서고 있습니까?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물론 이 같은 자구책들은 경우에 따라서 약간의 도움이 되기도 하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셋째,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창32:9)
이런 자구책들 말고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을 수 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야곱은 어떤 식으로 기도했으며, 이는 각각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주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전에 자신에게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면서 여기에 근거해서 기도했습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9절) /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2절)
즉 하나님께서 고향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후손들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많게 하리라고 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에서의 손에서 자신과 처자들을 지켜달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지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11절)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을 붙들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즉 두렵고 답답한 상황에서도 약속의 말씀에 붙잡고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둘째,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기도했습니다. 즉 그는 모든 힘을 쏟아서 실제 씨름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다가.”(24절) 여기서 ‘씨름하다’(히, 네에밬)의 어근인 ‘아바크’는 ‘껴안듯이 꽉 붙들고 늘어지다’란 뜻의 ‘하밬’ 혹은 ‘단단히 달라붙다’란 뜻의 ‘아밬’에서 유래된 말로써, 야곱의 기도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매어 달렸습니까? ‘어떤 사람’, 곧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야곱은 분명 어떤 한 사람과 씨름했다고 했는데,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브니엘’로 지음으로써, 그날 거기서 자신이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음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30절)
무엇을 필사적으로 구했습니까? 축복입니다. 즉 자신을 축복해주지 않으면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버틴 것입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절) 얼마나 필사적이었으면 무엇이 부러져도 개의치 않았습니까? 허벅지 관절입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5절)
축복의 징표로 어떤 이름을 부여받았습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어떤 뜻을 지녔습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입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8절)
그가 진짜로 하나님을 이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도무지 하나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허면 어찌 된 것입니까? 사랑의 하나님이 일부러 져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은 누구에게 져주십니까? 영적 이스라엘 백성, 곧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 모든 사람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18:7,8)
넷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리면 사람과의 관계도 풀립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
야곱이 받은 축복은 당장 어떤 결과로 이어졌습니까? 먼저는, 야곱 자신의 변화입니다. 즉 도망하고 피하기에 급급했던 야곱이 맨 앞으로 나가서 형을 맞았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창33:3 하) 무서워하던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창33:10 하)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복 중의 복은 자신이 먼저 변화되는 복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어떤 기도만 합니까? 타인, 곧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이 변화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내가 먼저 변화되지 않는데, 백날 다른 사람이 변화되기만을 구하면 뭐합니까? 이제라도 내가 먼저 변화 받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또한, 도무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즉 20년 만에 극적으로 형 에서와 화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창33:4) 어찌 된 영문입니까? 에서가 400명이나 거느리고 올 때에는 동생을 혼내주려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그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진 것입니까?
야곱이 받은 축복의 결과가 그들의 관계에까지도 미쳤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리 말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라도 화목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
이를 통해 또 무엇을 깨닫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리면 사람과의 관계도 풀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내가 먼저 변화를 받으면, 내 남편이나 아내도 변화되고, 내 자녀들도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 같은 복들이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https://www.youtube.com/live/JFLztVEBr9g?si=ULdUe-Uw9StFMI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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