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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7: 15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 고전 7: 17 나눠 주신 대로
고전 7: 15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
믿지 않는 이가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질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부부관계보다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1]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결혼 관계라 하더라도, 부부 중 한쪽이 믿지 않는 경우, 믿지 않는 이가 헤어지기를 원하면 헤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부부관계보다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되는 방편이므로 성도에게 절대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백 년의 지상 생활에 속한 부부관계보다 앞서야 한다.
2]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전반절에서 갈릴 것을 용인한 후에 화평(和平)할 것을 언급한다.
다시 말해서 성도와 불신 배우자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종교적인 이유로 불신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없으며, 불가피하게 극단적인 형편이 되었을 경우가 아니면 평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본 절을 근거로 하여 평화를 위해 이혼을 해도 무방하다고 한다(Barrett).
그러나 본 절에서는 이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수동적이어야 하며, 이에 따라 신앙을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즉 배우자가 신앙의 문제로 먼저 이혼할 것을 제안하고 떠나간 경우 신자는 그로 인해 구속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3] 바울은 말한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화평 중에 우리를 부르셨다.
성도가 진리 문제, 신앙 문제, 이단 문제 때문에 싸우고 분리해야 할 때가 있으나, 우리는 가능한 한 화평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이 헤어지기를 원할 때 먼저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별거는 부득이한 경우의 일이며 이혼은 최악의 조치일 뿐이다.
고전 7: 16 구원할는지 -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
믿음은 영생의 길이므로 성도에게 절대적 요소이며 부부관계보다 앞서야 한다. 믿는 성도가 믿지 않는 쪽을 구원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어느 날 내가 상대방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참고 지내겠다는 것은 결코 최선의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가능한 한 화평을 지키는 것이 좋다. 별거는 부득이한 일이며 이혼은 최악의 조치일 뿐이다.
1]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성도가 불신 배우자의 구원을 위하여 애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예 처음부터 불신자와 결혼하여 개종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즉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도 없이 불신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은 욕구 불만과 불필요한 긴장감만을 초래할 뿐이다(Morris).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오히려 본 절에 나타난 불신 배우자의 구원 가능성을 강조한다.
즉 그들은 14절의 의미를 보다 강조하며 평화와 인내를 통하여 계속된 결혼 생활이 불신자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Barrett, Lenski).
더 나아가 불신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을 기피하는 행위는 선교적 기회를 회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Barrett).
그러나 본 절의 주제가 이미 '불신자와 결혼한 자들에 대한 충고'라는 것과 불신자가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거든'이라는 조건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12절) 염두에 둘 때 이와 같은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으로 불신자와의 결혼을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4. 부르심대로 행하라. ( 7: 17-24 )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고전 7: 17 나눠 주신 대로 -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
이 구절은 결혼 생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영역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1]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능력과 소명은 그것이 종교적이든지 또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필요로 하는 사회적이든지 간에 서로의 화평을 도모하는 곳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스스로 만족하라는 자족의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삶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주권을 중시하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Morris, Barrett).
2]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믿지 않는 자가 정말 헤어지기를 원할 때, 믿는 자는 거기에 구애받을 것이 없다. 믿는 아내나 남편이 믿지 않는 쪽을 구원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내가 상대방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그때까지 참고 지내겠다는 것은 결코 최선의 생각이나 바른 생각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형편과 처지대로 그대로 행해야 한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찌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성경 말씀은 정말 어렵고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저는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늘 느끼고 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대강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면 아주 쉽게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직업 가운데에 하나가 바로 목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풀 수 있게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이 거의 없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생기면서 교회는 성경을 인용하여 푸는 것을 방해를 해 왔고 심지어는 이단이라고 공격했다. 아니 중세 시대에 와서는 성경을 바로 푸는 그 문제로 많은 사람이 종교 재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저 역시도 이 말씀을 풀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봐도 문자적으로 밖에는 풀 수 없기에 생각하고 또 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풀려고 시도를 하지만 감동할 수 없었다.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도 성경을 상고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그것이 성경과 맞는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목사들부터 상고하지 않고 그저 인생의 이성적 지식으로 성경을 풀고 있다.
모든 성경은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자기들이 그렇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천국에 가는 일인데도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풀고 있고 성경을 상고하지도 않는다.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저는 영생을 받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아니 모든 사람이 저를 이단이라고 정죄를 한다 해도 그 길을 가겠다. 그만큼 저에게는 영생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영생을 얻기를 사모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 특히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고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제사를 원치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으라고 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일을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다 이루시고 우리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성령으로 난 영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문제를 바로 정립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성경 말씀을 하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들이 교리로 정해 놓은 교회론을 만들어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그것이 교회라고 말한다. 성경은 전도서에서 그 교회에 대해서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힌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여인에게 그러니까 이 교회에 잡혀서 죽는 사람이 절대다수인 것을 성경은 바닷모래같이 많다고 말한다.
이 시대는 종교가 세운 교회만 있다. 그 교회에 들어가는 순간에 전도서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다수가 되어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도 그렇고 소수가 되어서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점을 말씀드린다. 사망보다 독한 여인이다 그 여인에게 다 잡혀 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 큰 음녀라고 말한다. 그 음녀에게 사로잡혀 모두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아니 자기들만 가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들이 열심히 너무 강해서 주님의 말씀과 같이 산과 바다를 두루 다니며 교인 하나를 만나면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고 있다.
저는 교회를 부정하지 않고 한 번도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적이 없다. 다만 제가 교회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에 있는 말씀을 따르고 있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하갈과 같은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우리의 어머니는 사라인데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말한다. 지금과 같이 형태를 갖추고 있는 교회는 하갈과 같이 종이 되어버린 땅에 있는 교회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교회를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모여서 주의 만찬을 나누는 것을 교회라고 말한다. 그것은 장소나 건물을 그리고 육체의 사람을 보고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린도전서 7장이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교회를 주님의 아내라고만 말씀하고 있지만 고린도전서 7장에서는 교회와 그리고 그 교회를 치리하는 장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 일곱 교회와 일곱별이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의 관계로 일곱 촛대요 일곱별이다. 이 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말씀을 하고 있다. 분명히 교회에는 장로들이 있고 그 장로가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 둘의 관계를 사도 바울이 혼인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다.
우리 인생의 혼인 문제입니까? 그것이 우리가 영생을 얻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입니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다. 아무 문제가 되지도 않는 그런 것을 성경에 기록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린도전서에서 혼인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육체가 혼인하든 하지 않든 그런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금 심하게 말씀을 드려서 우리가 혼인하지 않고 세상적으로 방탕하게 살아도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영의 일을 모르고 육체에 빠져 있어 꼭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다.
당시 초대교회다. 고린도후서 9장 23절의 말씀과 같이 디도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를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라고 말하고 당시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의 목사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로부터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치리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들이 교회를 다스리고 있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과 같은 종교가 되어 있는 시대가 아니라 이제 막 복음이 전해지고 있던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사도 바울과 같이 그저 감동을 받는 데로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다. 주님은 제자들을 아무 고을로 보내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실제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다. 교회가 없이 그러니까 어느 특정한 사람들이 그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라 그저 발길이 가는 대로 복음을 전하던 사람들로 과부다.
누가 과부입니까? 교회를 과부라고 말한다. 주님은 이제 육체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셨다. 이제 땅에서 교회의 남편은 없다. 그래서 성도들의 모임이 있는데 그들을 과부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 모임에 남편이 없다. 그래서 과부라고 말한다. 그저 누군가 복음을 전하면 듣고 있을 뿐이다. 지금과 같이 거대한 종교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초대교회라는 것을 생각하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
이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고 있듯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이 모여서 주의 만찬을 나누기 시작을 하면 그곳에 장로를 세우고 다시 다른 지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도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나와 같이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였다.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초대 교회다. 그 당시 교회의 사정을 알고 이 말씀을 상고해야 한다. 당시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갔다. 그러면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복음을 사모를 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성령의 감동을 받음으로 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일곱별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신학이라는 곳이 있어서 그곳에서 라이선스를 따고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러면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세우고 싶어한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학교를 나와서 안수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가 될 수 있는 말씀이다. 이것이 정욕이다. 나쁜 것만 정욕이라고 생각을 하지 말라.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자 하는 모든 일도 정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시 교회가 세워지고 있던 때다 이 시대와 같은 교회가 아니라 성도들이 있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다스리는 장로가 있었다는 말씀이다.
오직 복음만 전하러 다니고 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누구는 성도들이 모여서 주의 만찬을 나누는 곳을 맡아서 치리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정욕이라고 말씀하면서 자기와 같이 절제하면서 복음을 전하러 다닐 수 없으면 혼인하라고 말한다. 실제 혼인이 아니다. 장로가 되어서 교회에서 주의 만찬을 나누는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나와 같이 이방에 더 많은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지만, 그러나 절제할 수 없거든 정욕에 불타는 것보다는 교회에서 장로로 다스리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당시 초대교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사도 바울은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절제를 할 수 없거든 정욕에 불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그 당시에 당연히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었고 사도 바울은 혼인하지 않은 자들에게 나와 같이 전도 하면서 사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이 혼인하는 문제보다 교회의 구원 문제를 말한다.
디모데전서 3: 1-4절을 보면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말한다.
성도들의 모임과 장로가 있다. 이 둘의 관계를 사도 바울이 혼인의 관계로 말씀한다. 물론 교회는 주님의 아내다. 이 세상에서는 다스리는 자가 있고 그 다스리는 자와 교회와의 관계도 남편과 아내로 말하며 그것을 디모데전서에서는 감독과 그리고 한 아내라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의 혼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와 그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에 대해서 말한다. 당시 초대교회에는 이런 장로들도 있었고 또 복음을 듣고 모여 있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도 있었다. 이 둘의 관계를 사도 바울이 8절부터 말한다.
혼인한 자들에게 명하고 있다. 여자는 남편에게 갈리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 이야기를 하면서 이혼 문제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이혼한다고 해서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나? 주님과 만나서 예배를 한 사마리아 여인을 보면 우리 인생의 문제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곱별과 같은 복음을 전하는 장로와 갈리지 말라고 말한다. 왜 갈리지 말라고 말하는가 하면 여기서 혼인하지 않은 자들은 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의 문제라면 이것은 주의 명이라고 말한다. 이혼하고 재혼하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이 말씀을 보고 사람의 혼인 문제로 이야기 한다.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만일 있을지도 모를 뜻밖의 경우를 말한다. 있다는 말씀입니까? 없다는 말씀입니까?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한다. 왜 없는가 하면 장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고 있기에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장로를 내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당시 율법주의가 들어왔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복음을 듣고 모두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한다.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인간적으로 싫다고 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싫다고 해서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어느 곳에서는 성도들이 많이 모여서 주의 만찬을 나누고 자기가 있는 곳은 작은 숫자의 사람이 모일 수 있다. 혼인의 문제라면 이혼을 한 남편은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아니 그는 교회에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혼인의 문제가 아니라 장로와 교회와의 문제라는 것을 말한다. 인간사가 아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한 중요한 일이 있는데 왜 그런 말씀을 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영생에 대한 문제를 교회와 장로와의 관계로 말한다.
주의 명령은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어 있기에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저 역시도 이 말씀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서 교회와의 관계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와 장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깨닫고 사도 바울이 말씀한 주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남편이 없고 아내가 없으며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없다. 이 시대는 오직 종교만 있다. 그래서 더 안타깝기만 하다. 초대교회와 같이 복음이 전해지고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고 종교는 점점 더 거대해지고 있고 세상에서 자기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권리를 다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새 번역은 “그 밖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요, 주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어떤 교우에게 믿지 않는 아내가 있는데, 그 여자가 남편과 같이 살기를 원하면, 그 여자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일곱별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교회에서 주의 만찬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지만 사도 바울은 나와 같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들이 남은 사람들이다. 앞에서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과 남은 사람들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혼인하지 않은 사람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이 남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다. 교회에 나와서 주의 만찬을 나누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다.
복음이 전해졌다. 남편만 들은 사람도 있고 아내만 들은 사람도 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일을 말한다. 그러니까 한 가정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누구는 남편만 복음을 들었고 누구는 아내만 복음을 들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말한다. 사도 바울이 주의 명령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구원과 관계가 없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사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다 보니까 남편만 복음을 듣기도 했고 아내만 복음을 듣기도 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교회 안에 있는 실제 남자를 말한다. 그 형제에게 아내가 있는데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나는 복음을 듣고 믿는데 내 아내는 복음을 안 듣고 안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실제 여자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성도를 의미한다. 교회 안에 있는 일로 지금도 그럴 수 있지만 초대교회 안에는 더 많이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막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던 때라 실제 이러한 일이 많았다.
그런데 그가 복음을 듣고 믿었다. 그런데 남편이 복음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나와 믿음이 다르다고 해서 이혼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믿음의 문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내 아내는 내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이 나와 살기를 원하고 있다면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믿음의 문제로 해서 내 가정을 깨뜨리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종교의 문제가 가정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이것으로 인하여 이혼을 하는 일이 너무도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복음이 있다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서 내 아내나 내 남편이 문제를 삼을 일이 없다고 저는 믿고 있다. 내가 다른 무엇인가를 한다면 모르겠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고 있다. 다만 주의 만찬을 나누는 시간 외에는 사실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이 말씀을 하면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혹시라도 그 아내가 남편이 믿지 않더라도 그들이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버리지 말라고 말한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새 번역은 “믿지 않는 남편은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해지고, 믿지 않는 아내는 그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졌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자녀도 깨끗하지 못할 것인데, 이제 그들은 거룩합니다.”
믿지 않은 남편이나 믿지 않는 아내가 그들이 합께 살기를 원하고 있다. 함께 살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은 그래도 자기 아내가 자기 남편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남편과 아내를 인간적으로도 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보고도 절한다는 말이 있다.
남편을 너무 사랑하거나 아내가 너무도 이쁩니다. 그러면 그가 믿는 복음에 대해서 당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전혀 가정적으로 이 복음이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아내가 남편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순전히 교회 안에 있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는 말씀이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대해서 사실 납득할 만한 명분이 없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 안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때 늘 마음이 아프다. 사실 우리는 너무도 지극히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그럴 일은 거의 없으나 그러나 혹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혼인을 한 상태에서 복음을 들었다. 아내가 복음을 들었고 남편이 복음을 들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당신과 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면 그때는 갈라서도 된다고 말한다. 믿지 않는 자다. 그러니까 복음을 듣지 않은 남편이나 아내다. 그가 당신이나 복음을 듣고 천국에 가라고 하면서 갈라서자고 한다면 갈라서라고 말한다. 그런 세상의 일로 마음을 쓰지 말고 그런 것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하는 성도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한다.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다고 말한다. 믿지 않은 아내나 믿지 않는 남편이 갈라서자고 해도 할 수 있다면 너희가 그것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들을 가능한 설득 해서 화평하게 지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하다. 세상사에 대해서 성도는 어느 것이라도 다 자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복음의 문제로 믿지 않는 남편이 그리고 믿지 않는 아내가 갈라서자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성도가 아니냐고 하면서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마음대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다. 설령 그들이 우리의 믿음 문제로 갈라서자고 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그들을 설득을 해서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라고 말한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사도 바울은 오직 구원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구원에 대해서만 말한다. 비록 세상사로서는 구속을 받을 일이 없고 자유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미 혼인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말한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느냐고 말한다. 네가 세상사로 하면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복음을 전하기 가장 좋은 사람이 누구인가? 부부사이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아내를 사랑한다면 남편을 사랑한다면 서로 인간적으로 그런 관계라면 복음을 전하기 가장 좋은 상대라고 믿고 싶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우리는 성도다. 이 일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정말 사도 바울의 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는 정말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린 사람이다. 그리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을 하기 위해서 세상을 살아간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새 번역은 “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누어주신 분수 그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처지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내가 모든 교회에서 명하는 지시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이 무엇인가? 바로 복음이다. 구원을 받으라고 말한다. 정말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일까지도 이 구원에 대해서 방해를 받지 않게 하려고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자유하다. 그리고 어떤 일에도 구속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영생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주님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생각하면서 한 영혼이라도 구원을 받도록 살아가야 한다.
교회에서 장로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고 있고,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 말한다. 오직 구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성도가 되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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