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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7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마태오 23,1-12
교만은 자꾸 무언가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요즘 스타 배우 유아인 씨의 불법 약물 뉴스가 많이 나옵니다. 어제오늘 일도 아닙니다.
미국엔 대표적으로 린즈리 로한이 있습니다. 그녀는 1986년 7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난 가수, 배우, 여성 사업가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연기와 노래에 대한 열정을 가졌으며, 3살 때부터 모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98년 12살 때, 뮤지컬 'The Lion King'에서 나라 공주 역할로 연기 데뷔를 하였습니다.
연기에서 최고의 스타가 된 그녀는 이제 노래 쪽으로 전향합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틴 팝 스타로 대성하였습니다.
이어 사업도 하였고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일까요? 그녀는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으로 수천 번의 사고를 냅니다.
2004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Speak'는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으며, 'Rumors'와 'Over' 등의 곡으로 히트 차트를 석권하였습니다.
이후 린즈리 로한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셀러브리티와 같은 비즈니스 활동도 하였습니다.
린즈리 로한은 만족을 모르고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범죄, 교통사고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로 인해 인생의 곤경을 겪게 되었습니다.
린즈리 로한은 약물 중독으로 여러 차례 입소하여 치료받았으며, 불법적인 행위와 법적인 문제도 많이 겪었습니다.
그녀는 무면허 운전, 교통사고, 도난, 폭행, 임신설 등으로 인해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결국 음악 활동에서마저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술기운인지, 약 기운인지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한 36명의 리스트를 작성했고 이것이 언론에 공개되자 난리가 났습니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 유부남들도 있었고 심지어 이름을 거론하면 안 되는 거물들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리스트를 즉시 부인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임신한 채 술과 담배를 하는 것은 기본이었습니다.
결국 30대에 파산의 길로 들어섭니다.
린즈리 로한은 자기 행동으로 인해 팬들과 대중들로부터 실망과 비판을 받았으며, 그녀의 인생은 인기의 정점에서부터 인간적인 실패로 끝났습니다.
교만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망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그 이후 모든 인간이 그랬습니다.
이 교만을 꺾어줄 그리스도께서 오기까지는
이 원죄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닮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며 그것으로 스승이라 불리고 선생이라 불리고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합니다.
사실 제가 미사 때마다 외우게 하는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입니다.”는 이들과 같지 않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켜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명예를 얻으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피이고 진리는 하느님의 모범입니다.
하느님의 피를 받은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라 믿으면서도 남들이 스승이라고 하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것이 분명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 내 안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으로’ 무언가 됩니다. 그래서 남들이 나를 치켜세워주면 가만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교만한 이들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지 못합니다.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는 칭찬받기 좋아합니다.
하지만 겸손한 이들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남들이 칭찬할 때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나를 낮추려 하지 말고 나를 무언가 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에 내가 반응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무언가 되려고 하기에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반면 겸손한 이들은 하느님의 살과 피가 아니면 내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칭찬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누군가가 “어머, 하늘을 날고 계시네요.
정말 대단해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인간을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 칭찬에 으쓱할 수 없습니다.
겸손하여지려면 하늘을 날아야 합니다.
그래야 칭찬에 으쓱하지 않습니다.
교만은 열등한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가 추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 교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겸손합니다.
내 힘으로 될 수 없는 수준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7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사야 1,10.16-20
마태오 23,1-12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위선은 가장 암(癌)적인 존재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못배운 백성들을 향해 7가지 행복을 선언하신 바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대 부유하고 가방끈이 길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7가지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전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날선 발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고 예리하며 강력합니다.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업자 입장에서 섬뜩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말씀 선포의 대상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지만 그 말씀들이 온통 저만을 위한 맞춤형 가르침 같기도 합니다.
공격의 이유는 그들의 위선적인 삶과 가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위선은 가장 암(癌)적인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가장 역겨워하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는 가르침과 삶 사이의 엄청난 괴리감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따로 삶 따로의 이중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삶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신 바가 있습니다.
1. 조용한 익명의 자선과는 반대되는 자랑하고 과시하는 자선.
2. 골방에서의 겸손한 기도가 아닌 길모퉁이에서의 가식적인 기도.
3. 산발(散髮)에다 침통한 얼굴로 하는 보여주기식 단식.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스꽝스러운 그들의 모습 한 가지를 더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오 복음 23장 5절)
‘성구갑’이란 성경 구절이 들어있는 작은 통입니다.
유다인들은 작은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녔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의미로
성구갑을 몸에 지니고 다녔겠지요.
그런데 정말 웃기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성구갑은 유난히 크고 화려했습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구갑!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 과시욕이 지나쳤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를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의 극치에 달했습니다.
“이것 한번 봐주세요! 이 멋진 성구갑을! 내가 얼마나 하느님 말씀을 애지중지하는지?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을 극진히 여기는지를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칭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상 그들은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에 반하며 사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철저한 이중성, 과시욕과 허영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공허한 의(義)를 가차없이 폭로하십니다.
그들의 공허한 의는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보여주신 참된 의와 극명하게 비교·대조되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신앙과 이중적인 삶, 그로 인한 철저한 몰락과 멸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강력한 경고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화요일>
(2023. 3. 7. 화)(마태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여기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자신들의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누가 전하든지 간에, 또 어떤 사람이 전하든지 간에, 성경 말씀은 성경 말씀이고, 하느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는 “그들처럼 살지 마라.”, 즉 위선자들의 삶을 본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다.” 라는 뜻입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을, 말만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엄격하고 철저하게 율법을 실천했던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실천만 따진다면 그들은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 가운데에서 첫 번째로 실천을 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실천을 잘했는데, 그러나 그 실천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실천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실천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가짜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이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22,37-40).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율법 실천에는 ‘하느님 사랑’도 없었고, ‘이웃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엄격하고 철저하게 하느님을 섬겼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냥 ‘위선’이었을 뿐입니다.
(스스로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라고 자처하면서 자기 만족감, 또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죄인 취급했고,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이 자기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사랑 없이 이웃을 대하는 그 태도는 바로 ‘교만’과 ‘이기심’입니다.
<‘위선’과 ‘교만’은 항상 짝을 이룹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늘 위선자이고, 위선자들은 늘 교만합니다.
가끔 겸손한 것처럼 보이는 위선자가 있는데, 그것은 칭찬받을 욕심으로 겉으로만 겸손한 척 하는 ‘거짓 겸손’입니다.>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다.” 라는 말은, 바리사이들이 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계명과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이고, 하느님 뜻도 ‘사랑’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사랑 없이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위선이 될 뿐입니다.
‘실천’을 강조하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왜” 실천해야 하는지, 그것부터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의 ‘사랑’은 세속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믿음’과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사랑(아가페)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믿음을 증명해야 하고, 믿음으로 우리의 사랑을 완성해야 합니다.>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랑을 ‘선’과 ‘사랑으로만’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악을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유욕과 집착을 사랑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랑은 선과 사랑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왜 실천해야 하는가?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는 방법은, 또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방법은, 사랑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4-7).”
여기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인데, 뜻으로는 “자기들은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같다.”입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실천이 아니라면, 아무리 많이 하고, 열심히 해도,
한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라는 말씀은,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위선자다.”가 아니라, “입은 옷과 실제 삶이 다른 위선자다.”, 즉 “옷을 그렇게 입었어도 실제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위선자다.” 라는 뜻입니다.
입은 옷이 문제가 아니라 삶이 문제입니다.
<예의 없게 아무렇게나 입는 것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이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교만과 허영심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좋아한다는 말에는 자기들이 먼저 요구한다는 뜻도 들어 있는데,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주님이신 하느님께도 요구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위선자들은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은 기도를 합니다.
(교만과 허영심으로 바치는 것이니,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빈말’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안 들어 주신다고 불평만 합니다. 감사할 줄은 전혀 모르는 채로.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