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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주일 설교
본문 마 6:9
제목 하늘
성경은 기록의 패러다임 전환 시점이 있었다. 그 시점은 포로기를 기점으로 한다. 포로기 이전의 신학과 이후의 신학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포로기 이전과 이후의 신학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예수의 말씀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예수와 바리새인의 논쟁에서 "바알세불 논쟁"이 있어야 했는지, "광야에서는 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셔야 했는지, 왜 주기도문의 처음 시작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해야 했는지 그리고 신약 성경 곳곳의 본문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포로기 이전과 이후의 신학의 차이점과 변화의 원인에 대해 알아야만 할 것이다.
포로기 이전과 이후의 신학은 다음 두 가지의 관점이 완전히 바뀐다.
1. 사탄에 대한 인식
2.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인식
사탄에 대한 인식변화는 포로기 이전의 사무엘하의 본문과 포로기 이후의 역대상의 본문을 비교해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같은 사건 같은 인물이었지만 포로기 이전에는 여호와가 하셨던 일을 포로기 이후에는 사탄이 했다고 기록한다.
삼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역대상 21: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포로기 이전의 사탄은 보통명사로써 없는 자 였고 보통의 의미로 대적자란 뜻에 불과 했다. 원래 없는 자였고 존재도 없었다.
포로기 이후의 사탄은 고유명사로 자리를 잡으며 없지만 있는 존재가 되어있었고 그는 하나님의 대적자로써 존재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포로기 이전과 이후가 달랐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인식도 포로기 이전에는 하나님은 하늘보다 크신 분이셨고, 하늘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하늘, 태양, 달, 별등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포로기 이후에는 하나님을 하늘과 동일시하여 표현하기 시작했다.
히스기야의 기도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포로기 이전의 기록에서는 천하만국위의 하나님이셨는데 포로기 이후에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히스기야가 등장한다. 즉 하나님=하늘이란 도식이 성립 되어버린 것이었다.
포로기 이전의 하나님 인식- 창조주 하나님, 피조물이었던 하늘.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창조주
하늘은 피조물이었다.
왕하 19:15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포로기 이후의 하나님인식의 변화- 하늘=하나님
대하 32:20 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하늘을 향했다. 곧 하늘=하나님이란 신앙이 형성된 까닭이다.
한국인의 하늘신앙 안에 흡수된 하느님과 솔로몬의 하늘 사상
한국인에게 기독교가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늘=하나님이 될 수 있었던 거였다. 옛날 전도하시던 분들이 많이 쓰던 예화중에 중도 물에 빠질 때 "아이고 하느님" 하면서 빠지더라. 결국 부처보다 더 큰 신이 하느님아니냐? 는 식의 전도였다.
한국인들은 하늘= 하느님=하나님
요즘 유행어중에
느님을 붙인 단어가 유행한다.
대표적인 단어는
"아내느님"
이다. 말할 것도 없이 하늘+아내의 합성어다.
이런 단어가 한국인의 뿌리에 깊이 박혀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퍼질 수 있었지만 샤머니즘적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하늘=가장 높고 위대하고, 지고지순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신중의 신 이라는 개념이 한국인에게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하나님이란 이름의 기독교신앙인에게는 큰 축복이되었지만 샤머니즘화의 족쇄가 되어버렸다.
언제든 하늘보다 더 위대하고, 강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무어든 소원성취해주는 신이 등장하게된다면, 그들이 선택한 신, 하늘신을 버리고, 하늘에서 오직 하나로써만 존재하는 위대한 신을 버리고, 갈아탈 수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하늘을 어떤 개념으로 사용했는지 보자.
하늘이 하나님이었는지
단지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던 상징의 자리였는지 말이다.
하늘 자체를 하나님으로 믿었던 하늘님 사상과
하늘을 가장 위대한 신들의 각축장으로 보고 그 중에 오직 한분 하나님이란 사상이 성경에 있었는지 말이다.
솔로몬의 기도다.
왕상 8:30 주께서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왕상 8:32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왕상 8: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왕상 8:36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왕상 8: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왕상 8:43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왕상 8:45 주는...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왕상 8:4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그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께서 계신 곳 하늘이라는 개념이지 하늘이 주님이시라는 말씀이 아님을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늘 개념 마저도 마가복음은 찢어버린다.
막1: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주님의 세례시에 이미 변질된 하늘을 믿고 있었던 그들의 하늘은 본래의 하나님에 의해 찢겨져 버린다. 여기서 갈라졌다는 말은 헬라어의 스키조라는 단어로 찢기다라는 뜻이다. 진짜의 하나님을 설명하기위해 사용되었던 장소개념으로써의 하늘을 하늘님, 하느님, 하나님이라는 용어에 담아 기독교를 미신화 시켰던 그 하늘님, 하느님, 하나님들은 주님이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예수의 아버지에 의해 찢겨져 나갔다.
이제 우리 안에 잠재하고 있는 하늘로써의 하늘님, 하늘의 개념으로써의 하느님, 그 하늘에서도 오직 한분의 강한 하나님이란 개념을 찢고 그 강하고 높고 위대하신 분에게 드리고 섬기고 바쳐야만 구원받고 축복 받는다는 종교적 심성으로 구하는 기도를하기 보다는 진짜의 아버지 그 인격의 존재를 찾는 일에 우선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혹은 하느님이라 할 때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그 하늘은 단지 그분의 임재하는 곳일 뿐 그 자체가 하나님이 아님을 명심하고 하느님 혹은 하나님을 사용해야할 것이다. 하
종교학에서는 탈신화라는 용어가있다. 신화로 입혀진 옷을 벗겨내고 원래의 의미를 밝혀내자는 의미다.
인류는 가장 높고 큰 하늘을 하나님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오 하늘이시여! 라는 말은
오 하나님이시여라는 말과 동일시하는 사람이 많다.
신화에 물든 사람들이다.
솔로몬은 국제결혼을 통해 국가의 부와 안전을 한 차원 높여 놓았다.
부작용이 있었다.
각종 종교를 가지고 들어온 왕비들 때문이다.
유대교와는 달리 중동 지역의 당시 종교는 신화와 신학을 구분해내지 못했다.
신화와 신학을 구분하지 못했던 왕비들은 거의 미신 수준으로 유대교인으로 강제 편입 유대교와 자신의 종교를 섬기고 있었다.
솔로몬은 왕비들이 가져온 미신 수준의 종교로부터 유대교의 타락을 막기 위해 탈신화를 시도했다.
그중 가장 먼저 바로 잡으려는 개념이 하나님의 존재였다.
하나님은 높고, 크고, 위대하고, 강한, 당시 신화적 미신적 수준에서 섬기던 주변국 수준의 종교의 신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개인과 국가 공동체 모두의 인격 안에 내재하시면서 그들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시고, 중심에서 부터 전존재의 변화로 말미암아 개인과 공동체와 국가와 민족이 가짜의 신, 그들을 얽어 매어 노예로 전락 시켜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까지 만들어버리는 종교의 신에서 벗어나 진짜, 진실을 알고 참됨의 가치를 체험하며 살게 만드는 신이셨다.
솔로몬은 성경에서의 엘로힘을 가르쳐주기 위해 아내들이 절대적으로 강한 신이라 섬기고 있었던 하늘신이란 개념보다 더 큰 하나님을 말해주기 위해 그들이 신화처럼 믿고 있었던 "하늘=신"이라는 개념을 벗겨내기 위해 성전 봉헌 때 하늘 너머, 하늘보다 더 높은 어떤 존재를 말함으로 아내들이 믿던 하늘신의 신화를 탈신화함으로 유대교의 하나님 설명하려했다.
오늘날 신화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독교인들에게 솔로몬처럼
탈신화를 시도하고자하는 목사와 신학자는 있었던가?
솔로몬의 시도조차 하지도 못하고 신화가 무언지도 모른 채 자신도
민족 신화라는 함정에 빠져 기도할 때마다 설교할 때마다 하늘이시여의 개념으로 하나님이여라고 설교하시는 분들이여
당신들이 솔로몬을 비판하실 자격이 있다 생각하시는 건 아닌지
반성해보시길 기대해본다.
우리 말에 하느님이라는 말과 그 하느님은 한분이시다라는 의미의 하나님이란 말은 기독교 포교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엘로힘이나 여호와라는 말을 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란 말 안에 다 포함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종교가 구체적으로 사람들 마음에 새겨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에 와 닿는 적절한 종교적 언어가 있어야 가능함을 말해주는 예가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란 말이다.
종교용어 하나가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이스라엘은 약소국이었다. 무역을 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들은 대를 이어 장사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유대인의 상술은 세계적이었고, 과거 조상들의 셈법으로 지금은 세상의 부를 움켜쥔 민족이 되었다. 그들의 주요 언어는 장사언어였지 종교언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브라함부터 전승된 타민족과 다른 종교적 개념이 존재하고 있었다.
유대인이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신뢰를 쌓아야 했고, 네트웤을 잘 만들어야 했다. 장사의 기본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존중이 있을 때 큰 사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솔로몬에게 막대한 금과 물질을 제공했던 히람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주변국의 종교는 다신교이거나 유일신이라해도 이스라엘과는 다른 개념의 종교가 대부분이었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앙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거나 제해석해야만 했다. 그중에서 수메르의 하늘신이었던 "안"신을 적극적으로 수용을 해버렸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형상도 없으시고, 특정 공간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메르의 "안"신은 모든 신들 위의 신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신앙인들은 크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하늘이 상징하는 바를 수용해버렸다. 가장 크고 크신 하나님이란 개념으로 적극 수용한 수메르인들의 하늘신 개념을 창세기에 적극 수용 활용했다.
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런데 창세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늘은 수메르인들이 생각하는 무한하고 전지전능한 하늘신 안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그 하늘은 우주로 무한히 뻗어나가지 못하고 마는 한계를 가진 궁창이었다. 하지만 그 궁창에는 당시 중동 사람들의 각종 신인 해, 달, 별신들을 두었다. 그리고 그 하늘의 해, 달, 별신들을 통해 빛을 발하며 땅을 비추게 하는 일을 명령하셨다. 한마디로 하늘신도 해신도 달신도 별신도 모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개념으로 적극 하늘과 해,달,별을 적극 수용해버린 셈이다.
그래서 당시에 창세기 1장의 하늘과 해, 달, 별을 읽었던 이스라엘의 신앙인들은 주변국의 하늘과 해,달,별의 숭배 사상과는 완전히 판이한 해석을 가진 채 읽게 되었다. 아래는 이러한 개념으로 강의한 아틀란타복음학교 강의 내용이다.
주기도문의 첫 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엔호우라노스
주기도문의 첫 시작은 하늘과 아버지를 분리함으로 시작했다. 하늘은 장소 였고, 그 장소 안에 계신 아버지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혁명이었다. 예수 탄생 4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느헤미야도 하늘과 하나님을 동일시했고, "1마카베16,3에서는 하늘이 너희를 도와주시기를 빈다" , 고 말함으로써 아예 하늘을 하나님으로 인식했다.
혁명이 일어난 것이었다.
예수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전했던 메세지는 이랬다.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 해야만 했다.
하늘을 선택할 것이냐 아버지를 선택할 것이냐? 그 아버지는 예수의 아버지이자 자신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선택해야만 했다. . - 아버지가 예수의 아버지이자 자신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그동안 종교적 심성으로 섬기고, 드리고, 바치는 신앙생활에서 그저 아버지와 자녀와의 인격적 관계로의 전환이어야 함을 선택해야만 했었다.
이상으로 주기도문의 첫 구절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혁명적 메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사백년동안의 종교적 믿음을 넘어 인격적 신앙의 문을 열으신 분이셨다.
과연 지금 우리는 예수 당시의 사람들과 얼마나 다르게 주기도문의 첫구절을 마음으로 느끼며 체험하며 고백하고 있는가? |
출처 네이버...그예사랑..정성필목사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