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몸, 다시 서다 / 심선경
물방울들이 뜻을 모아 굵직한 물줄기로 부피 자람을 한다. 마음에 품은 그리운 대상과 좀 더 가까워지려고 안간힘을 다해 솟구쳐 오른다. 하지만 이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일정한 높이에 도달하면 분수대는 우리의 몸을 두 줄기로 갈라놓기 일쑤였다. 물방울들은 쉴 새 없이 솟아올랐다. 부서져 내리기를 반복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똑같았다. 분수대가 쏘아 올린 우리들의 몸높이는 별에도 하늘 끝에도 닿지 못한다는 걸 때달았을 때 처절한 배신감과 함께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맥없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내 모습 뒤로 내가 바라던 세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런 색깔도 형체도 남기지 못한 채, 끝없이 솟구침만 반복하다 공중에서 분열되고 마는 내게 무슨 희망이 남아 있단 말인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열정도, 반드시 이룰 수 있으리라 굳혔던 의지도 더 이상 그 높이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맨 처음에 품은 야무진 꿈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절망과 고독감이 밤의 긴 그림자처럼 꼬리를 늘일 때 나는 스스로 한계점에 다다랐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렇게 무기력한 존재였음을 진작 알았더라면, 날이면 날마다 그리 무모한 솟구침을 반복하지 않았을 텐데. 끝없이 좌절하고 배신당하며 불안한 밤을 밀어내곤 했다. 분노와 좌절의 단계를 건너뛰면 그 뒤엔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다가선다.
땅속 깊이 숨어들었다. 낮은 곳에 사는 또 다른 물방울과 잠시 몸을 섞었다. 그들은 내게 친절한 말을 건넸지만 어떤 말로도 생채기 난 가슴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강렬한 힘이 나를 끌어당겼고, 어쩌다 보니 땅 위로 다시 나오게 되었다. 이곳저곳을 떠돌다 수백 번의 변신을 거듭한 끝에 개울물에 합류하여 큰 강을 향해 흐르게 되었다. 내 몸이 한순간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기압의 영향으로 수증기로 변하여 순식간에 하늘로 올랐고 곧 구름에 가 닿게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얼음알갱이가 된 나는 구름에서 빠져나왔고 눈이 되어 흩날리다가 산꼭대기에 외로이 선 굵은 소나무 가지 위에 떨어졌다. 처음엔 가벼운 깃털처럼 날아 앉은 눈송이들이 점차 엄청난 무게를 지닌 뭉치 눈이 되어 키 큰 소나무의 가지들을 잔인하게 뚝뚝 부러뜨렸다. 부드러운 것이 결코 약한 것이 아님을 보고 나서 내 가슴에 남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를 다시 피워 올릴 생각을 갖게 되었다.
솔가지에 얹혔다 잠시 머물다간 햇살에 언 몸을 녹인 나는 또다시 물이 되었고 땅에 떨어져 흙 속에 스며들었다. 끝없는 유랑이 시작되었다. 나와 뜻을 같이하기를 원했던 물방울들이 속속 모여들었고 골짝마다 나누어져 흐르던 물들을 규합했다. 그 옛날 독립투사들이 동지들을 모아 비밀결사조직을 만들었듯이.
열 골, 스무 골의 물방울들이 하나가 되었고 나는 드디어 단단한 물의 몸이 되었다. 물방울이 물줄기가 되고 드디어는 물기둥이 되어 절벽 끝에 선다. 나태함과 안이함에 길들여져 있었던 한낱 물방울이 아닌 거대한 물기둥으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현실에 안주하여 양심을 외면하고 불의와 맞서 싸우기는커녕 늘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던 나. 분수대에서 일정한 높이로 솟아오른 뒤 공중 분해되어 죽었던 내가 또 다른 생명을 얻어 환생한 것이다. 내 심장은 하루에 천리 길을 달린다는 여포의 적토마처럼 쉴 새 없이 쿵쾅쿵쾅 뛴다.
잠시 뒤에 내 몸은 저 아득한 높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부서지고 박살이 날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이제 자멸(自滅)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날개를 단 새처럼 내 몸은 가볍다.
비로소 내 형체를 찾았고 내 안에서 들리는 참된 소리를 듣는다. 억만 년 동안 잠자고 있던 고매한 정신세계가 나의 매섭고 단호한 추락으로 이제 곧 깨어날 것이다.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내 몸은 소쿠라지고 넌출지고 방울진다. 물기둥이 벼랑 아래로 낙하하는 동안 절벽엔 거짓말같이 아름다운 무지개가 찬연히 선다.
언젠가 트럭에 실려 가다 길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통유리의 몸을 보았다. 잠시였지만 길바닥에 쏟아져 내린 유리의 그 찬란한 산화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유리는 애초에 깨어지라고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유리가 깨어지지 않는다면 유리 만드는 공장이 존재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깨어지고 다시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며 유리는 새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내 몸도 벼랑 아래로 추락하자마자 유리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종말을 고할지도 모를 일이다. 분수대의 물방울이었을 땐 하늘에 닿을 수 없었지만 폭포가 된 나는 땅끝에 닿아 부활한다. 죽고 또 죽어 거대한 물줄기로 절벽을 행해 곧게 선다. 벼랑 끝에 서서 세상을 향한 집착과 아집을 모두 내려놓는다. 섬뜩한 속도를 타고 맹목적으로 낙하한다. 이 순간만큼은 어떠한 고통이나 억압의 채찍질도 나의 질주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아니,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져야 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어쩌면 단말마의 비명을 듣고 새파랗게 질린 산줄기가, 잠자고 있던 산짐승 몇 마리를 엉겁결에 내어 놓을 수도 있겠다. 솔바람 소리, 풍경소리, 육자배기 가락이 생의 시간 한 가운데로 고요히 잦아든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고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며 곧은 소리가 또 다른 곧은 소리를 낳는다. 날개를 달고 추락하는 물기둥 뒤로 벼랑이 다시 서고 청룡언월도를 쥔 내 손이 여지없이 큰 산을 두 조각낸다.[출처] 물의 몸, 다시 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