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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6: 5-7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바르고 풍부한 이해가 없이는 인간이해 또한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간 자만이 자기 이해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거룩성 앞에서라야 인간부패가 어느 정도인가? 가 드러나며 스스로 죽어 마땅한 존재인 것을 알게 됩니다.
1. 본문 5절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입니다.
1) 모세는 전에 암시했던 제목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은 전혀 가혹하시지도 않으시며, 또한 세상의 악한 사람들에게서 서둘러서 형벌을 강제하시는 분도 아니시라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을 인간의 방법에 따라서 인간의 애정을 하나님께 귀속시키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을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성급하게 설득되어서 조그만 원인 때문에 세상을 멸망시키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보시니’ 라는 말로 기나긴 세대 속에서 계속된 인내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잘 관찰해 보시고 또한 오랫동안 심사숙고하신 후에 마지막으로 도저히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까지는 인간들을 멸망시키시겠다는 선고를 내리시지 않으셨던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 다음에 계속되는 것 역시 강조적인데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을 보시고”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분은 아직 확대되지 않은 자들의 죄들은 용서해 주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세상의 한쪽에서는 불신이 관영해 있다면 다른 지역들에서는 아마 이 형벌에서 해방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허물이 최고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인지라 전 세계가 죄악으로 완전히 팽배해 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이란 세상의 어느 구석에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에 근거하여 생각해 보면 이제야말로 형벌이 내려질 시기이며 정말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이 죄악이 무르익은 때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너무나도 엄청난 악으로 세상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는 온통 그 죄악으로 덮여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처음에 죄악의 오염으로 잠겨있을 때까지는 그것이 물의 홍수로 삼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2)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라는 말씀에서 모세는 허물 있는 외적인 행위에 내려지는 홍수의 원인을 더듬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지금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서 인간은 습성적으로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악한 삶의 습관으로 인하여 비뚤어져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죄악이 너무도 깊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다시 회개할 희망마저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확실히 더 이상 강조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주어 말하기를 그 타락은 너무도 철저하였으므로 온건한 치료방법으로는 절대로 치유할 수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직 사람들에게 건전한 정신이 남아 있는데도 자신들을 죄악에 던져 빠뜨리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세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그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자들의 마음은 죄악으로 아주 철저하게 감염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체가 다른 것은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오직 정죄 받은 것만을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채용하고 있는 언어가 아주 강조적인 어법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부패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분한 표현인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만족하지 않고 그 다음 말은 더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곧,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라고 말하고 나서 다시 부가하여 ‘뿐이다’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 죄악에 한 방울의 선이라도 함께 섞여져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항상” 이라는 말을 어떤 사람들은 해석하기를 갓난아기로 태어나서부터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 그가 인간들의 타락성은 그들이 출생할 때부터 아주 심각한 상태였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정확한 해석은 이것입니다. 즉 세상은 그 당시에 그 자체의 죄악으로 대단히 강퍅해 있었으며 어떤 보수를 한다거나 또는 잘못을 뉘우치는 그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에서는 아주 거리가 멀었으며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어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악화 일로에 있었던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며칠 간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철저한 무지라는 것이요, 몇 일간 얄팍한 타락이 아니라 뿌리깊은 철저한 타락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습적인 권리로 어린이들이 자기들의 부모들로부터 받아서 그들의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있는 그런 타락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모세가 여기서 그 당시에 지배적으로 흥행하고 있었던 죄악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교리를 적절하게 그리고 끈기 있게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전 인류에게까지 연장시키는 사람들은 말씀을 성급하게 곡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말하기를 “저희가 주를 배역하나이다. 그리고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으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시5:9,10, 14:3) 라고 할 때에 그는 정말로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죄악에 대하여 통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도(롬3:12) 이런 부패 상태를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몇 사람에 관한 불평이 아니고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의 영을 결여하고 그 자체에만 의존하고 남아 있을 때에 그 상태에 대하여 묘사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몹시 남용하는 자들의 고집은 바로 그 말로 정죄를 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의 은혜를 박탈하게 된 그때 인간의 참된 성품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적합한 해석입니다.
2. 본문 6절은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입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는 이 성경 구절의 표현은 결코 하나님께 적합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그대로를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그분께서는 어떤 면에서는 그분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탄은 하나님 안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은 간단한 생각에서 쉽사리 나타납니다.
그분이 기대하지 못했거나 예측하지 못한 일은 전혀 일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에서 볼 때 그분은 해 놓으신 일에 대하여 절대로 한탄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와 똑같은 추리와 설명이 다음에 따라 오는 내용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은 슬픔으로 근심하셨다고 하는 말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슬퍼하시거나 서러워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완전상태에 머물러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변함 없이 한결같으신 분이십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증오하시며 싫어하시는가를 알려줄 수가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수준으로 비하(卑下)시키시는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한탄과 근심이라는 말이 과연 무엇에 적용되는가가 분명해질 때에는 구태여 우리가 험난하고 어려운 문제에 말려서 발버둥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이 너무도 엄청나게 부패했다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그분의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려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그 두 가지 말이 적용되고 있는 목적입니다. 마치 그분이 “이것은 내가 만들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 아니다. 이 타락하고 불결해진 피조물을 내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과 유사한 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근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지독한 죄악으로 너무도 마음이 상하여 마치 그들 인간들이 치명적인 근심거리로 부상을 입힌 것과 같다는 그런 표현입니다. 이 땅 위에서 완전히 망가진 자녀들 둔 부모의 심정과 같은 정도를 표현한 것 뿐 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정직한 성품과 죄에서 유래된 부패한 성품과의 사이에 도저히 표현하지 못한 대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 우리가 하나님의 노여움을 자극시키기를 원하지 않고 그분이 근심하시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면 죄를 싫어하고 죄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것을 배우십시다. 더욱이 이와같은 천부의 성품에서 나오는 선하심과 부드러움은 우리 안에서 죄에 대한 사랑을 털끝만큼도 제압하지 않으십니다. 보다 효과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찌르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애정으로 그분 자신을 옷 입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인간의 성품에 특이한 것을 하나님 자신에게 이전시켜서 하나님을 묘사해 주고 있는 비유 언어 방식입니다.
3. 본문 7절은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입니다.
모세는 다시 하나님을 직접 화자(話者)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신중한 고려 없이 이 세상을 멸망시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잘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한 방식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우리가 이 점에 대하여 부지런히 충고를 받게 하고 불신자들이 불평하는 기회들을 완전히 잘라 내버리기 위하여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역시 그 불경건한 불만으로 뛰쳐 들어가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가라사대 말씀하시다’ 라는 말은 ‘칙령을 내리셨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 결정하시지 않고는 소리로 발표를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인간들의 방법처럼 마치 최근에 발견된 어떤 것에 관하여 하나의 유기적인 판단을 설정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는 새로운 조언이 필요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유약성을 참작하여 말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홍수에 대하여 절대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하나님의 보복은 공정하시다는 사실만이 우리들에게 상기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형벌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서 짐승들과 육축과 날짐승과 그리고 모든 생물까지 형벌을 내리고 계십니다. 그런면에서 그분은 온건한 한계를 넘어서 너무 지나친 형벌을 내리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인간들의 죄가 그분에게 증오거리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분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은 동물까지 그렇게 하신 것은 도대체 무슨 목적인가라는 질문이 대두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위하여 창조되었고 인간이 이용할 수 있도록 생존해 있는 동물들이 인간의 멸망에 똑같이 참여해야 되는 것은 그다지 이상스런 일이 아닙니다. 당나귀나 소들이나 기타 어느 동물이든지 간에 전혀 그들 자체가 죄악을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할 때에 함께 그 인간들에게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똑같이 멸망에 처해야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 곧 유기적인 의미에서 이 지구는 마치 부자집과 같은 것입니다.
거기 지구에는 모든 종류의 양식들이 풍부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공급되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이 범죄함으로 그 땅까지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풍부하게 넘치는 모든 것을 부패하게 만들어 지독하게 더럽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인간에게 내리신 형벌에 대한 기념비를 그들의 거처인 지구 바로 거기에 놓으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판사가 가장 사악하고 흉악한 죄인을 형벌 하려는 즈음에 그 죄인의 너무도 엄청난 악명 때문에 그 흉악한 자의 집을 완전히 없애버리라고 명령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한결같이 우리에게 죄에 대한 무서움을 고취시켜 주시려고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심지어는 짐승들에게까지 내려졌다는 사실을 볼 때에 우리가 쉽사리 죄의 잔인성이 얼마나 엄청나는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