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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문학산책] 2 단테의 신곡
인간사 속에 드러난 구원신비 그려
죽음 후 세계를 서사시로 표현
가톨릭 문학 최고봉으로 정평
구원의 여인상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으로 집필
세계문학사에서 단테(Dante)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호메로스와 베르질리우스의 화려한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시정신을 후세에 전달함으로써 자타가 공인하는 시성으로 평가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세계는 가톨릭 정신에 철저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쩌면 가톨릭 정신을 문학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웅변해 준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므로 가톨릭 문학을 이야기할 때, 맨 먼저 그를 떠올려 봄이 마땅하게 판단되는 것이다.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는 중세와 근대의 갈림길에서 전유럽의 문화가 새로운 기운을 찾아 몸부림을 치고 있을 당시 인간 내면세계의 적나라한 양상과 신의 섭리를 대비시킴으로써 가톨릭 문학의 지평을 확립했다. 그를 일컬어 시성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 「신곡」의 숭고한 예술적 가치는 물론이려니와 그가 추구했던 우주주의적 사상이 시공을 초월하여 광활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독서계에도 단테는 많이 알려져 있다.
단테의 인생 여정(1265-1321)은 불우하기 그지없었다. 귀족계층에 속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7가지 자유학예를 중심으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상류사회에서 친교활동을 전개하며 후에는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지도자가 되었으나, 당파싸움의 희생물로서 마침내는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으로부터 영원히 축출 당했고 인근 도시들을 방황하다가 라벤나에서 비극적인 삶을 마쳐야 했다.
떠돌이 유랑생활은 베아트리체와의 만남과 더불어 그의 문학세계를 형성하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다. 자기 성찰의 기회로 전자를 이해할 수 있다면, 후자를 통하여 선의 의지와 하느님의 섭리, 그리고 구원을 향한 구도의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은 아주 중요하다. 아홉살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녀에 대한 사랑은 그러나 외길만 달릴 뿐 실현될 아무런 조짐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인은 짝사랑의 포로가 되어 소년시절 내내 연애시를 썼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또다시 9년이 지나서였다. 눈짓으로 건네준 인사를 받고 한없는 행복감에 젖어 시인은 영혼 속 깊은 곳에 그녀에 대한 사랑의 불길을 끌어안으며 나중에 「새로운 삶」이라는 작품에 들어갈 서정시를 썼다.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 주로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을 시와 산문으로 엮어놓은 이 작품은 「신곡」의 전편역할을 하고 있다.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베아트리체, 시인 단테는 그녀의 죽음을 오래오래 슬퍼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시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생의 모든 것을 장악하였다. 그녀가 실제적인 인물이냐 가공적인 인물이냐 하는 논란이 분분하다. 그 시대 시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풍조를 참조하고, 수도자처럼 깨끗한 삶을 추구하던 시인의 정신상태를 염두에 둘 때, 나는 베아트리체가 순수한 문학적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아무튼 단테는 그녀와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영원성의 세계인 천상에서 이루고 싶어하는 소망을 갖게 되고, 이 소망이 시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교적인 인생관을 심어 주었다. 다시 말해서 이승에서의 삶이란 영원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준비로 보기 때문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통해 그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구원을 소망한 것이다. 선의 집합체이자 신성의 상징, 천사로 나타나는 베아트리체를 시인이 ‘기적을 보여주러 천상에서 지상에 내려오고’ 또한 ‘아주 숭고하고 거룩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단테가 베아트리체에 대한 추억을 영원화하기 위하여 쓴 「신곡」은 죽음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일종의 환상여행기로서 서로서로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신화와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정신적·윤리적 진리를 규명함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중요성과 신의 섭리가 지닌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위대함을 증언하고자 했으므로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중후하고 진지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당시의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라틴어로서가 아니라 이탈리아어 즉 방언으로 집필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개개의 독립된 민족문학의 기틀을 확립하고 나아가서는 일반대중까지도 이해시키고 아울러 그들을 구원시키려는 의도가 이 시인에겐 확고했던 것이다.
우리네 인생길 반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어두운 숲 속에 처해 있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신곡」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요소로 우의성(allegoria)을 들어 마땅하다. 시인은 독자로 하여금 글자 이면에 서려 있는 일종의 속뜻을 파악하라고 당부한다. 모든 시어들과 인물들, 그리고 모든 에피소드와 사건들이 상징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상징성이 때로는 단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복합성을 지닌다. 앞에 인용한 글귀에서 ‘반고비’란 70세로 본 인생의 중간 35세를 의미하고 ‘올바른 길’은 선한 길 즉 천주님이 환영하는 참 신앙적인 생활을 상징하며, ‘어두운 숲’은 윤리적으로 타락한 사회를 뜻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움직이는 구조로 파악할 때 그 외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상징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베아트리체와 더불어 환상여행의 안내자로 나타나는 라틴시대의 위대한 시인 베르질리우스 역시 그가 불후의 명작 ‘애네이데’로 아름다운 문제를 개발하고 인류의 영혼을 구제할 구세주의 출현을 예언했다는 평범한 사실 이외 최고의 인간지성을 이 작품에선 상징하고 있다.
2
제1편에 해당되는 ‘지옥편’ Inferno는 34곡(canto)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른 두 편 ‘연옥편’과 ‘천국편’ 보다 일반 독자의 인기도가 높다. 그러나 이 모두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에 그들 사이에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단테 나이 서른다섯이 되던 1300년 부활주일 무렵 3일 동안 편력하는 지옥은 증오와 저주의 세계이다. 이곳에서 단테가 발견하는 영혼들은 살아있는 동안 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끝내 회개의 뉘우침을 하지 않았다. 시인은 악마의 세계를 베르질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편력하는데, 세 마리의 무서운 짐승들이 그의 길을 가로막는다. 부절제와 폭력과 악의로 대변되는 이 짐승들로부터 벗어나 ‘고통스런 나라, 영원한 고통 저주받은 사람들 속’으로 안내하는 지옥문을 통과한 다음 아홉 개의 원(cerchio) 가운데 하나인 1원 림보의 세계로 간다. 림보(Limbo)는 그리스도 이전의 성현들이라든가 천진무구한 어린아이들의 영혼이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해서 원죄의 허물을 벗어버리지 못했으나 그래도 덕망 있고 인류에 이바지한 바 있던 영혼들의 고을이라는 뜻이다. 그 뒤 부절제로 인해 지은 죄의 네 단계가 펼쳐진다.
부절제의 죄란 인간의 허약함, 방종, 탐욕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사악한 죄는 폭력과 사기에서 나오는데, 이러한 죄로 인한 벌을 받은 영혼들이 하층부 지옥에 있다. 디테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 하부지옥엔 천주님께 대항했다가 타락한 천사들이 있고,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는 배반의 죄를 지은 자들이 있다. 단테는 구석구석에 역사적인 인물들을 배정시킴으로써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두 번째 시편인 ‘연옥편’ 즉 Purgatorio는 정죄와 희망의 왕국이다. 어떻게 보면 「신곡」의 핵심부분이기도 한 ‘연옥’은 죄와 구원의 갈림길에 있는 셈이다. 연옥에 이르러 단테는 우선 정죄산을 편력하면서 회개와 정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천상의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정화천에서 내려온 성루시아의 도움을 받아 날아서 오르니, 그곳을 지키고 있던 천사가 단테의 이마에다 칼끝으로 P자(이탈리아어로 죄를 의미하는 peccato 머리글자)를 일곱 개 새겨준다. 이 P자들은 연옥의 일곱권에서 정죄해야 하는 주요 죄들로서 오만, 시기, 분노, 인색과 낭비, 탐욕, 애욕을 표상한다. 이것들을 완전히 정화하고 나면 드디어 영원한 행복의 동산으로 오를 수 있다. 지옥에서 벌 받고 있는 영혼들의 죄도 이와 비슷하다고 불 수 있으나 그들의 죄는 구원받을 수 없는 것들이고, 연옥의 죄들은 일단 구원을 받은 영혼들이 씻어내야 하는 것 들이다. 인간은 천주님의 의지에 복종하며 교회와 제국의 권력들을 조화시켜 자유의지를 행사할 때 정죄산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시인은 주장한다.
‘천국편’ 즉 Paradiso는 앞에서 밝힌 바와 마찬가지로 지옥과 정반대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천국은 빛과 춤과 노래와 완전한 환희 그리고 덕이 충만한 천주의 왕국이다. 여기 있는 영혼들의 본거지는 원래 정화천이지만 단테가 도착하자 그에게 축복의 여러 단계를 알려 주기 위하여 모두가 그들에게 합당한 지역으로 내려가 그를 맞아들인다. 우리는 천국의 하늘들에 있는 복자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받는 축복이 다르다고 믿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복자들의 의지가 곧 하느님의 의지이고 하느님의 질서를 순종하기 때문에 모두가 똑 같은 축복을 받고 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천상의 아홉 하늘들을 순례한다. 각 하늘들에는 28곡에 설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아홉 천사들이 좌정하고 있는 불완전한 영혼들, 활동적인 영혼들, 명상적인 영혼들로 나뉘어 모든 영혼들이 축복을 받고 있다.
‘천국편’의 핵심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즉 3신덕에 대한 해설이다. 여덟째 하늘인 항성천에 이르렀을 때 그리스도의 사도들로부터 단테는 3신덕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하는 답변에서 우리는 신학상의 신비를 터득할 수 있다. 단테는 지고의 하늘인 정화천에 이르러 모든 복자들이 하얀 장미꽃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닫고 ‘태양과 다른 모든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인 하느님을 관상함으로써 완전한 사랑과 평화를 발견한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섭리가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천국의 궁극적인 목적, 지고의 행복에 다다름으로써 「신곡」의 대미가 장식된다.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작품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천주의 참다운 가르침을 문학적인 수법으로 부드럽게 전해주는 가톨릭 문학의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엔 허황된 이야기로 밖에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작품이 다루는 세계가 환성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의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점은 다른 어느 문학작품보다도 두드러진다. 이 불후의 명작은 악을 이겨내기 위한 선의 투쟁에서 인간이 천주의 섭리와 조화를 이루는 능력, 나아가서는 인간 그 자체를 우주적으로 또 포괄성 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단순한 시라기보다는 역사와 전설 그리고 이상적인 비전과 실제적인 삶을 장관스럽게 조명한 서사시로서, ‘지옥편’은 조각, ‘연옥편’은 회화, ‘천국편’은 음악이며 이들 세편의 총체는 조화 넘치는 하나의 건축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형곤ㆍ도나도ㆍ서울 자양동본당ㆍ한국외국어대학 이탈리아문학교수ㆍ동대학교 서양학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