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김연주
뻐꾸기 소리, 참 오랜만이다. 도시의 굉음에 밀려났으리라고 추측했던 뻐꾸기 소리를 아파트 숲속에서 들으니 반갑다. 평온한듯하지만 농사일로 술렁술렁 바쁘던 들녘에 따뜻하고 희망찬 힘을 주던 그 예쁜 소리, 나도 모르게 소리를 따라 나온 발걸음이 가볍다. 옛날 모내기하던 농부의 머리 위를 오가며 위로를 건네던 새, 뻐꾸기도 유월이 한철이라는데 벌써 유월인가 보다. 몇 달 지나면 벼가 익어 보릿고개를 넘어 하얀 이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찬 힘을 주던 그 아름답고도 애절한 소리를 들으며 나는 모내기 대신 열심히 걷고 또 걷는다. 무릎 수술 후 다시 걸음마를 배우듯 걷기 연습을 하는 내 몸이 치유되는 것같이 반갑다.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정답고 경쾌하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뻐꾸기. 유년 시절, 들판을 누비던 아련한 그리움이 되살아난다. 전주천과 삼천천 여울물 두 줄기의 합수머리에 서서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다는 게 근래의 내가 받은 최고의 축복이지 싶다. 아파트 둘레를 사부작사부작 한 바퀴 걸으면서 건강을 다지는 시간, 자연스레 뻐꾸기 노랫소리에 맞춰 발걸음도 가볍게 오전 운동을 마칠 수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니 뻐꾸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뻐꾸기 소리의 여운과 함께 옛 뻐꾸기 노래가 대신 생각나며 마음이 설렌다. 잊고 있었던 뻐꾸기 소리를 반주 삼아 오늘 해야 할 양의 재활 운동을 달성했다는 뿌듯함에도 한결 행복한 마음이 든다.
수술 후 회복이 늦은 나에게 자식들의 운동하라는 성화는 집도의의 충고와 더불어 귀가 따갑다. 날마다 일기를 쓰듯 돌아가며 확인을 하는 통에 가만있을 수가 없다. 아프니 하기 싫고 그러다 보니 자연 게을러져서 걷기 싫어하는 나를 남편조차 가세해서 다그치니 할 수 없이 하는 운동이지만 걷는 모양새와 속도도 좋아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조경이 제법 잘 된 아파트 정원에 터 잡고 사는 여러 새소리 또한 아름답게 들린다. 게다가 오늘은 뻐꾸기 소리도 만나니 좋은 경치 찾아 멀리만 가려고 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더 즐거워진다.
조용한 집안에 뻐꾹 시계도 없는데 뻐꾹 소리가 주변에 맴돈다. 밖에서 들었던 그 소리가 따라 들어 왔을까? 초등학교 2학년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뻐꾹 왈츠’가 떠오른다. ¾박자 춤곡으로 요나 손의 피아노곡이다. 가사가 입에서 맴돌았지만, 목소리도 예전 같지 않은 터라 허밍인지 뭔지 모르게 마음만 그때 풋풋했던 시절로 앞서간다.
♪뻐꾹 뻐꾹 뻐꾸기의 노래가
뻐꾹 뻐꾹 은은하게 들린다
뻐꾹 뻐꾹 아름다운 노래가
뻐꾹 뻐꾹 가냘프게 들리네♪
아이들과 음악 감상한 지도 십수 년이 넘었는데 기억이 새롭게 살아난다. ‘뻐꾸기 노래’ 가 또 있다. 그 옛날 불렀던 동요(윤석중)가 스멀스멀 되살아난다. 자동 재생되듯 나오는 노래에 ‘아, 가사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구나’ 하는 뿌듯함까지 일으켜 세운다. 생각으로는 잊은 것 같은데 입에선 기억하고 있었는지 술술 잘 나온다. 어려서 익힌 지식은 어른이 되며 지혜로 영글어지는데 요즈음 얻는 지식은 금세 잊어버리는 자괴감만 남지 않는가. 그 언제 적 풋풋함이 가득했을 때 기억이 이렇게 되살아나다니 마음이 흐뭇하다. 좀 더 많이 외워둘 걸 하는 생각에 쓴 웃음이 인다.
♪뻐꾹 뻐꾹 봄이 가네
뻐꾸기 소리 잘 가란 인사
복사꽃이 떨어지네
뻐꾹 뻐꾹 여름 오네.
뻐꾸기 소리 첫여름 인사
잎이 새로 돋아나네♪
며칠이 지났다. 저녁 하늘에 개밥바라기별이 뜰 무렵이다. 오전에 못 한 운동을 채우기 위해 아파트 둘레 길을 막 나서려는데 뻐꾸기 소리가 또 들린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에게 잊지 말아 달라는 말이라도 전하듯 앞산 너머에서 제법 크게 들려온다.
뻐꾹^ 뻐꾹^ 뻐꾸꾹^ 뻐뻐꾹∼ 쉬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소리는 왠지 애잔하다. 이 저녁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필시 무슨 사연이 숨어있는 것 같다. 쉼 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리고 측은한 생각이 든다. 집에 들어와서도 계속 뻐꾸기 소리가 맴돌고 마음마저 스산하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했던 뻐꾸기 ‘탁란’ 비밀이 떠오른다.
원래 뻐꾸기는 집을 짓지 않고 남이 애써 지어놓은 둥지에 알을 낳고 주위에서 지켜본단다. 주로 뱁새(붉은 머리 오목눈이) 나 직박구리 등 11종이나 되는 새들에게 기생하며 살아가는 타고난 본능을 어찌 버릴 수 있으랴. 알고 나면 참 뻔뻔스러운 새다. 그런데 이리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다니, 아무렴 그렇게라도 해야지. 목소리로 제 새끼를 잃고 남의 새끼를 제 새끼인 줄 알고 정성을 기울이는 위탁조에게 위로를 보내는 것이렷다. 누구는 이 말에 천만의 말씀이라고 일축할 테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종족 번식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뻐꾸기에게 동정표를 던진다.
실은 평화로운 뱁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놓고 주위를 맴돌며 자신이 어미임을 알리기 위해 구슬프게 울어대며 멀리서 새끼를 지키며 너는 뱁새가 아니고 뻐꾸기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란다. 집주인 뱁새는 까닭 모를 위탁모(유모)가 되어 제 새끼인 줄 알고 친자식처럼 정성을 다하여 키운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새끼는 또 어떤 짓을 하는가. 잘 부화시켜준 위탁조의 은혜를 갚기는커녕 둥지 안 위탁모의 알을 밖으로 밀쳐내고 혼자서 위탁모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독차지하며 튼실하게 살아간단다. 탁란 과정을 보면 미워지는 새 중의 하나이나, 제 새끼인지 남의 새끼인지도 모르고 키우는 유모 격인 새들의 우매함도 한몫을 하는 게 아닌가. 펭귄은 모여 살며 그 많은 새끼 중에 제 새끼들을 잘도 찾아 먹이를 뱉어 먹이며 남의 새끼가 모르고 품에 들면 여지없이 쪼아 쫓아내기도 한다는데 이 위탁조는 자애롭기가 하늘보다 높다 할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뻐꾸기는 영악하고 가증스러운 얌체족에 가깝다. 목소리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겉은 번지르르하고 속은 검은 사람 같다. 우리 주위에도 야비한 언설과 번듯한 모습으로 선량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새 중 기생충 같은 존재임이 틀림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뻐꾸기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은 뻐꾸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목청껏 울어대던 뻐꾸기가 궁금하다. 얌체 짓은 다 하면서 왜 그리 슬피 울었을까. 새끼를 불러내는 신호였을까? 지금쯤은 새끼를 데리고 어디로 떠나고 있을까? 아니면 보호 중일까? 하는 짓은 얄미워도 목소리라도 아름다워지자는 자구책은 또 어찌 깨달았을까. 탁란에 성공하고 새끼와 상봉한 어미의 마음을 생각하면 미운 마음이 좀 가셔진다.
뻐꾸기는 연어처럼 귀소본능으로 거슬러 귀향하는 철새 중의 하나라니 대대로 이어 내려온 DNA가 이끄는 본능이 유난히 강한 새인가 보다. 어디인지 모를 고향이 부르는 촉을 따라 무사히 귀소하기를 바란다. 그렇게라도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그러한 종種들에게 얌체족이지만 찬사를 보낸다. 그래서 우리가 아름답고 쓸쓸한 뻐꾸기 소리도 들을 수 있지 않은가. 자연의 섭리란 참 오묘하다. 만물을 창조한 신의 원대한 뜻이 숨어있겠지, 신이 만들어놓은 자연의 뜻에 순종하는 그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조류의 생리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소슬한 바람이 일렁이며 천지 만물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것 같다.
지금은 뻐꾸기 대신 매미의 소리가 저녁 하늘에 당당하게 퍼진다. 많은 세월을 어두운 땅속에서 인고하다가 자기의 힘으로 종족 번식을 꾀하는 중에도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정직한 곤충이라는 생각이다.
수많은 생명이 꿈틀대는 이 지구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모든 생명에게 공평하게 내주는 포용력에 경외심을 느낀다, 이어지는 생명줄의 인연도 때가 있고 섭리가 있음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새삼 깨닫는다.
오고 가는 시절 인연 속에 어느새 얄미움은 잊고 내 귓가를 맴도는 뻐꾸기 소리가 맑고 그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