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달맞이
정월대보름날 저녁달이 동쪽에서 솟아 오를때면, 사람들은 달맞이를 위하여 뒷동산에 올라간다. 한 겨울이라 춥기는 하지만 횃불에 불을 붙여 가지고 될 수 있는대로 먼저 달을 보기 위해서 산길을 따라 뒷동산에 오르는 것이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고, 대보름 달이 솟을 때에 횃불을 땅에 꽂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제 각기 기원을 한다. 농부들은 풍년들기를 빌고, 유생은 과거에 급제할 것을 빌고, 총각은 장가들기를, 처녀는 시집가기를 소원한다. 그러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대보름달은 될 수 있는대로 다른 사람보다 먼저 보는 것이 길한 것이라 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달을 맨 먼저 보기 위하여 산에 올라간다. 대보름 달을 보고, 1년 농사를 미리 점치기도 하는데 달빛이 희면 강우량이 많고 붉으면 한발의 우려가 있으며, 달빛이 진하면 풍년이 들고 달빛이 흐리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또 달이 남으로 치우치면 해변에 풍년이 들 징조이고 달이 북쪽으로 치우치면 산촌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는 이 세시풍속을 오늘날 전승보존하여 매년 이 고장의 화평과 안녕을 기원하는 달집태우기 행사가 청도천 둔치에서 재현되는데, 휘영청 보름달밤을 수놓는 힘찬 불기둥은 청도인의 기상이요, 풍년농사와 청소년의 꿈과 희망을 키우는 쥐불놀이, 불꽃놀이가 이어지며 모닥불에 콩을 볶아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정을 나눈다.
달집의 규모는 높이 20m, 폭 15m 솔가지 55트럭분, 볏집 200단, 새끼 30타래, 나무기둥 60개가 필요하며 전국최대규모의 웅장한 달집이 매년 만들어져 달집태우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송액영복과 풍년을 기원하는 민속연날리기 대회, 제기차기, 투호, 널뛰기, 윷놀이, 세시음식 나누어먹기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달집의 규모는 높이 20m, 폭 15m 솔가지 55트럭분, 볏집 200단, 새끼 30타래, 나무기둥 60개가 필요하며 전국 최대 규모(달집태우기는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민속놀이이므로 세계 최대의 달집 ???!!!...)의 웅장한 달집이 만들어져 달집태우기를 하고 있다.
청도도주줄다리기
18세기(1759)부터 도주줄이라하여 화양읍성 북문밖 강지땅의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시작하였다. 19세기(1838)에는 영남줄이라 하여 밀양, 창녕 등지에서도 많은 주민들이 참가하여 전국적인 규모를 자랑했으며 20세기(1914)에는 일제시대가 되자 읍내줄로 그세가 약해졌다. 이후 1948년부터 공비의 출몰과 6.25사변으로 많은 아쉬움을 남긴채 중단되고 말았다. 1983년 화양줄이라 명칭을 변경하여 줄다리기를 부활하였으며 1985년에는 정월대보름날에 36마름에 70여자가 되는 큰줄을 1만여명의 군중이 참가하는 행사로 이어졌다. 그 이후 줄다리기의 규모가 너무 커고 많은 인원이 소요되어 행사를 할수 없었지만 도주문화제를 하면서 소규모 시연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여왔다. 민선자치시대를 맞아 군민의 화합과 우리 고유민속놀이를 계승하기 위하여 제10회 청도도주문화제('97)가 열렸는데 그때 특히 줄다리기 행사는 청도도주줄다리기라 명명하고, 산동과 산서지방으로 나누어 2만5천명의 군민이 참여해 세계 최대규모의 줄다리기 행사를 가졌다. 이때 줄의 규모는 총 10만단의 짚단으로 1천2백여명이 꼬박 5일동안 동원되어 제작되었으며 기본줄의 직경은 1m를 넘고 길이는 170m나 되었다.
도주 유래 : 우리고장이 도주라 불리운 것은 산자수명하여 산수의 정령(精靈)이 인걸을 낳고, 사통오달로 교통이 편리할뿐 아니라 주민의 생활이 평화경이고 인문절의의 예락의 고장으로 고려 충혜왕때 김선장(김지대의 자)이 조적의 난을 평정하고 벼슬이 감찰이사 대호군을 역임하고 공신각에 오른 선생의 공훈으로 청도군의 격을 승격해서 1010년부터 1017년까지 7년간 주치(州治)가 도주라 불리었다.(청도군청 자료)
도주줄다리기의 줄을 집안에 보관하면 무병장수한다 함
도주줄다리기의 줄을 소에게 여물로 주면 만사가 형통한다함
줄타기
도주줄다리기 후에 실시하는 상여놀이
달집 태우기
정월대보름 저녁에 달이 떠서 망월을 할 무렵이면 마을 뒷동산이나 마을 옆 또는 마을앞의 들판 등에서 달집태우기를 한다. 마을 청소년들이 산에 가서 잎이 붙은 푸른 소나무를 베어다 세우고 그 주위에 가가호호에서 모아온 짚단을 세우고 새끼로 붙들어 매면 마치 노적처럼 된다. 이렇게 마을공동으로나 마을을 동서 또는 남북으로 나누어 각기 한개씩의 달집을 세우기도 한다. 이 달집에 달이 떠서 막 보일락말락 할때에 불을 붙인다. 화기는 형천하여 환하게 멀리까지 비친다. 이때 마을사람들은 농악을 울리며 달집둘레를 돌며 즐겁게 춤을 추고 환성을 지르며 한바탕 즐겁게 논다.
이 달집이 훨훨 잘 타야만 마을이 태평하고 풍년이 든다고 하며, 만일에 달집에 화기만 나고 도중에 불이 꺼지거나 잘 타지 않으면 마을에 액운이 들고 농사도 흉년이 든다고 믿고 있었다. 달집이 거진 타고 화력이 약해지면 마을 어린이들이 다리미에 콩을 볶아먹기도 하고, 아들을 두지 못한 아낙네들은 타다 남은 달집 기둥을 다리사이에 넣고 타고 가기도 하고, 타다 남은 숯을 가져다 지붕에 얹어두면 아들을 낳는다고도 하였다.
첫댓글 행사가 대단하군요. 좋은 자료 잘 보고 갑니다
청도 도주는 내가 태어나서 뛰 놀던 고항땅입니다. 고향의 유래 다시 읽어니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