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빌어 주신다.
그리고 의심하고 있던 토마스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 주시어 믿게 하신다(복음).
제자들은 두려움 가운데 예수를 만났다.
토마스는 의심 가운데 예수를 만났다.
두려움과 의심은 같은 게 아니다.
두려움은 문을 걸고 세상과의 단절을 가져오지만
의심은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온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는 부활한 예수를 확인하려는 의지를 불태운다.
다른 제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예수를 보고
수동적 기쁨에 머물렀지만 토마스는 달랐다.
토마스를 두고 불신의 아이콘으로 이해하는 건 부당하다.
그의 입을 통해 ‘믿는다’라는 말이 처음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토마스를 통해 믿음의 여정을 다시 되짚을 만하다.
믿음은 순도 100퍼센트의 완전함을 지향하는 게 아니다.
의심하더라도 나아갈 예수와 하느님에 대한
인내와 의지를 꺾지 않는 꾸준함이 믿음이다.
주어진 것에 기뻐하거나 기대치 않은 선물에 감격하는 건 누구에게나 쉽다.
믿음은 거저 얻어지는 사실 확인 차원에서 이해되지 않는다.
‘도대체 저게 뭘까?’라는 의심과 탐구를 거쳐
스스로의 자세를 고쳐먹는 게 믿음이라는 것이다.
성모님이 그러하셨다.
천사의 인사말을 곰곰이 생각한 뒤, 성모님은 메시아 예수를 받아들였다.
곰곰이 생각하다, 라는 그리스말은 ‘디아로기조마이’인데,
내적 투쟁이나 갈등을 겪는 고민을 가리킨다.
토마스 역시 부활한 예수를 받아들이기 위한 내적 투쟁을 시작했고,
그 끝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 역시 토마스의 길을 걷고 있다.
믿기 어려운 부활을 여전히 믿으려 애쓴다.
애쓰면서 서로 축하하고, 애쓰면서 부활을 살자고 서로 다독인다.
믿음은 원래 그런 거다. 의심으로 비틀거리고 주저앉더라도
믿음은 그 자체로 순수하고 정갈하며 완전하다.
어느 드라마에 유명한 대사란다.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냅니다.”
우리 신앙인들, 부활한 예수를 믿고 기뻐하는 것,
그 어려운 걸 우리가 해내고 있다. 대견하지 않는가, 우리?
제2차 세계 대전 중, 어느 유태인이 학살당하기 전
지하 감옥 벽에 이런 글을 써 놓았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을 믿습니다.
주위에 사랑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지만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비록 침묵 속에 계실지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믿음은 비록 지금 구름이 가려 보이지 않지만,
구름 너머에 태양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비록 들리지 않지만 침묵하며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 마음을 모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주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거기에는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습니다.
그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는 고백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믿음은 죽음의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8)
주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토마스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외쳤던 그 한마디는
세상에 나온 우리가
처음으로 주님을 영접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터져 나왔던
한 마디였고
우리가
인생의 힘든 고비를 건너가다가
어느 순간 문득,
눈물처럼 주르르 흘러내리는
한마디 였네.
- 김혜선 아녜스 -
첫댓글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그 누가 토마스의 의구심을 비난 할 수가 있는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세상사가 아니련가
그러나
주님께서는토마스를 너그럽게 대하시며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늘 사랑에 숙연 할 수밖에 ..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알렐루야!!
주일 강론글을
하루 먼저 읽을 수 있도록 수고 해 주신
세잎 클러브 님께 머리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축복이 있기를..
감사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