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마니산(摩尼山)
인천시 강화군에 있는 마니산은 마리산(摩利山)이라고도 하는데 옛 지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예부터 참성단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던 신성한 곳으로 보아 산 중의 으뜸이라 하여 순 우리말인 ‘머리산’으로 불렸다가 일제 강점기 때 한자로 지명을 바꾸면서 마리(摩利)라는 이상한 이름을 얻었다고 하며 그 후 다시 마니(摩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르겠다. 지금도 시월 상달에 천제를 올리고 전국체전 때는 성화를 채화한다.
강화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릴 만큼 유물과 유적이 곳곳에 산재되어있는 역사의 고장인데 곳곳의 고인돌 群을 비롯한 수많은 선사 유적과 더불어 신라 때 창건된 전등사(傳燈寺), 몽고의 침입으로 임금이 피난 와서 기거하던 고려궁지(宮趾)와 마니산록(摩尼山麓)에 있던 별궁터인 이궁(離宮)터, 그 밖에도 철종 생가, 강화읍성, 정족산 사고(鼎足山 史庫-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 대장경 법화경을 판각하였던 정수사(淨水寺), 또 수많은 돈대(墩臺)를 비롯한 개화기 서양과 맞서 싸우던 유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강화의 지형을 살펴보면 지금은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를 건너놓아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몽고병란 때에는 김포와 경계를 이루는 좁고 기다란 해협(염하鹽河)이 가로막고 있어 수전에 약한 몽고군이 결국 함락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 마니산이 있는 화도면(華道面)은 고가도(高駕島)라는 강화도와 이웃한 독립된 섬이었는데 좁고 긴 바다에 선두포(船頭浦)와 가릉포(嘉陵浦)를 가로막고 흙을 메꾸어 지금은 드넓은 논이 되었고 강화도와 연결되었다. 예전에 이 좁고 긴 수로를 통하여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었고 그 양안(兩岸)으로는 수많은 주막과 저자거리가 번창하였다고 하며, 근처의 현 덕포리(德浦)는 예전 이 부근이 떡전(떡포)거리로 유명하였는데 그 이름이 남아 현 이름(德浦)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참성단은 단군께서 몸소 쌓으시고 천제를 올리셨으며, 또 전등산 둘레의 정족산에 쌓은 산성은 단군의 세 아드님인 부소(夫蘇), 부우(夫虞), 부여(夫餘)가 쌓았다고 하여 삼랑성(三郞城)이라 하는데 지금의 정족산성(鼎足山城)이다.
옛 사람들은 강화를 특별히 신성한 곳으로 여겼던 듯하다. 강화도에 있는 아홉 개의 산을 태양계 아홉 행성으로 보면 그 중 마니산은 지구에 해당하며,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보면 마니산이 그 배꼽에 해당한다는 등.....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 개수축(改修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명종(明宗)은 직접 참성단에 올라 제를 모셨다하며 제문을 율곡이 지었는데 지금까지 그 제문이 남아있다.
당시로 보면 마니산 참성단까지 오는 길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우선 한양에서 김포까지 수레나 가마로 와서 염하(鹽河: 특히 풍랑과 소용돌이가 심하다)를 건넌 다음 말을 타고 마니산 건넛마을인 도장리까지 온 다음 다시 나룻배를 타고 마니산이 있는 이곳 고가도(高駕島)로 건너와 가파른 돌계단을 1시간 30분 남짓 걸어 올라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힘들고 먼 거리를 임금이 몸소 와서 천제를 드린 것을 보면 그만큼 신성한 곳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근래, 기계를 이용하여 지기(地氣)를 측정해 비교하였더니 마니산 조금 아래쪽 언덕이 전국에서 가장 기가 세게 나오는 곳이라고 하여 ‘전국 제일의 생기처(生氣處)’로 명명하고 표지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