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8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7-28
비굴과 겸손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가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수난이 곧 섬김의 방법임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자신을 낮추어 누군가를 섬기는 것을 ‘겸손’이라고 합니다. 더 겸손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냥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더 높은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는 누가 더 겸손한지 내기하듯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는 겸손과 비굴함의 차이를 잘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겸손은 높은 사람이 낮아지는 것이고 비굴함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주님이며 스승이신 당신이 그들을 씻어주었기 때문에 그들도 그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겸손해지려면 먼저 주님이며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수력발전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낮게 흐르는 물은 아무 에너지도 없습니다. 그러나 높이 있는 물은 위치에너지를 가집니다.
그것이 낮아질 때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줍니다.
바다의 물은 어떤 나무에도 도움이 안 되지만 위에서 내리는 비는 나무에 생명을 줍니다.
이처럼 높이 있다가 낮아질 때 누군가에게 자존감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의 전 재산은 오래된 자동차 한 대였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 가난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역의 제과점에서 물건을 배달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청년 시절엔 과도한 관료주의와 잘못된 정치에 대해 저항하는 삶을 삽니다.
총을 여섯 차례 맞았고 무려 13년이란 세월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후 2009년 정당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는 법에 따라 재임을 스스로 거부하고 대통령직을 내려놓을 때까지 국민들의 많은 성원을 받아 퇴임할 때가 더 높은 지지율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한번은 우루과이 남서부에 거주하는 헤랄드 아스코타라는 사람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려 화제가 된 내용인데, 그는 도로위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직장에 출근하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며, 지갑까지 잃어버려 택시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대의 차들이 그냥 지나쳤지만 잠시 뒤 낡은 자동차 한 대가 와서 정차했습니다.
운전자는 그에게 대통령궁까지만 태워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일단 탑승이 중요했던 아스코타는 기쁜 마음으로 차에 올랐는데 어딘지 낯익은 사람이 운전하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운전자와 동승자는 다름아닌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영부인이었고 운전자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이에 놀란 그는 사진을 찍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며 자신의 SNS에 올렸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호세 무히카가 대통령궁이 아닌 자기 사저인 농가에서 생활하며 운전기사 없이 출근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궁은 국민의 재산이라며 날시가 추워져 지내기 힘들어진 노숙자를 위해 비어있는 대통령궁을 내어주기도 했고 재임기간의 급여 90%를 빈민 주택기금으로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재임 기간 중 경제성장률을 상승시켰고 극빈계층을 위해 교육제도를 정비하여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먼저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먼저 성체를 영하고 우리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누군가의 발을 씻어줄 때 그 사람도 자신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이 믿음 없이 하는 겸손은 그저 상대에게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한 비굴함에 불과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느님임을 믿읍시다.
그리고 상대도 그렇게 대해줍시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던 겸손함이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8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마태오 20,17-28
제자들의 극단적 미성숙, 세속적 야심 앞에서 슬퍼하시는 예수님!
저는 개인적으로 복음서를 읽고 묵상할 때 꾸며낸 이야기라든지 공상 소설이 아니라 참이라는 것을
종종 깨닫습니다.
냉정하고 정확한 복음 사가들은 제자단의 모습을 묘사할 때마다 아주 가차없습니다.
수제자건 애제자건 핵심 제자단이건 상관없습니다.
나름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인데 그들의 모습을 절대로 미화시킨다거나 영웅시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무런 가감 없이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의 약점과 흠결, 미성숙과 흑역사를 감추지 않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마태오 복음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속적인 야욕으로 가득했던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어머니까지 합세해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낯뜨겁게도 노골적인 인사청탁을 합니다.
인사청탁하면서 절대 그냥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품질 좋은 포도주 한 병, 그리고 고급 안주도 들고 왔을 것입니다.
백주대낮에 부끄러움도 없는지, 이렇게 예수님께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그 광경을 목격한 다른 열 제자가 불같이 화를 내며 불쾌해했습니다.
그중에 어떤 제자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좋은 엄마 계셔서 좋겠다. 우리 어머니는 대체 뭐하는 건가?’
예수님 입장에서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극단적 미성숙, 세속적 야심 앞에 혀를 내둘렀을 것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제자들의 모습에 엄청난 실망감과 자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다시 크게 심호흡을 하십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을 또다시 용서하시고, 크게 인내하시며, 가르치고 또 가르치십니다.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20장 26~27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수요일>
(2023. 3. 8. 수)(마태 20,17-28)
<낮춤과 섬김>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8).”
하느님 나라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일이 없는 나라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리는 일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압박과 억압을 받는 일도 없고, 권력에 대한 두려움도 불안감도 불쾌감도,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일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남들보다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낮은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런 일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즉 남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욕망과 남들에게 세도를 부리고 싶은 욕망을 버려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 라는 말씀과 “첫째가 되려는 이”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을 뜻합니다.
여기서 ‘너희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그냥 단순하게 ‘너희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 라는 말씀과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너희가 바란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과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쪽 세상에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쪽 세상에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저쪽 세상에,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방법이고, 그 나라에서 살기 위한 준비이며 훈련이고,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권력욕, 명예욕, 지배욕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라는 말씀은, 당신은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오셨고, 어떻게 하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직접 모범을 보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고 시키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모범을 보이신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기만 하면 됩니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그 일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들 대신에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고,
낮춤과 섬김의 최고 단계를 보여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신 낮춤과 섬김은 겉으로만 낮추고 섬기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는 일입니다(요한 15,13).
만일에 사랑 없이 겉으로만 낮추고 섬긴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마음속으로는 하기 싫으면서도 그래야 한다니까 겉으로만 낮추고, 겉으로만 섬기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낮춤과 섬김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니까 그 일은 곧 기쁨입니다.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 20,18-19).”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낮춤’과 ‘섬김’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5-9).”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을 낮추셨지만 부활하신 다음에는 원래의 높은 자리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은 예수님처럼 부활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예수님의 모범을 본받아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가신 그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입니다.
낮춤과 섬김 자체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목적지로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생략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설명해도,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과,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일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 분께서 그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시고, 마치 힘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일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내가 저 사람 쪽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그냥 손을 뻗어서 저 사람을 내가 있는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이 질문의 답은 “사랑하니까.”입니다.
<우리가 가서 살게 될 하느님 나라는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