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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입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자주 우울해집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청소년, 청년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스마트 폰이나 게임을 위한 모니터 화면 속으로 들어가보면, 삐까번쩍, 휘황찬란합니다. 뭐든 내가 다 할 수 있는 분위기, 내가 모든 것을 좌자우지합니다.
그러나 화면을 끄자마자 너무나 다른 암담한 현실이 내 앞에 펼쳐집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젊은이들만 그런가요? 연세 드신 분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사고인지 모르지만, 경제나 무역, 교육 등등 다른 지표는 상위를 달리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대는 좌절과 환멸의 시대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명감이 큰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즉 희망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절망이 깊어갈수록 더 추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목숨 걸고 올라가야 할 에베레스트산 정상일까요? 아니면 지구 반대편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최남단에 위치한 희망봉에서일까요? 그리고 그 희망은 언제 찾아야 할까요? 세월이 흐르고 흐른 먼 훗날 백 년 뒤, 천년 뒤에? 우리의 젊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호호백발이 다 되어 죽음을 앞두고서?
절대 아니겠지요. 희망은 멀리서, 어느 다른 하늘 아래서 찾을 일이 절대 아닙니다. 가까운 곳에서,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내 가족들 안에서, 내 직장 안에서, 내가 소속된 공동체 안에서 찾을 일입니다. 그 희망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만나다 보면 참으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그야말로 고통 덩어리입니다.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실감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빈자들의 사제 아베 피에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입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 때 마다 힘차게 살아갈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사람, 비록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다 할지라도 아직까지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세상임을 알려주는 사람, 존재 자체로 선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사람이 희망입니다. 비록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다보니 갖은 상처를 주고받지만, 매일 티격태격 매순간 좌충우돌하는 피붙이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 안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인간들의 마지막 희망, 최후의 보루로 남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당신 친히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그들의 고통과 절망, 시름과 한숨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예언을 당신 생애 전체를 통해서 실현시키셨습니다.
오늘 희망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 다시 선물로 베푸시는 희망의 이 하루,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존재 자체로 그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게 할 선물이 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헌신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식년
미카 2,1-5
마태오 12,14-21
옳은 말만 하는데 재수 없는 사람
제가 말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용기를 드리려 해도, “당신이 나처럼 죽음 직전에 있나요?”,
“당신이 나처럼 가난하나요?”, “당신이 나처럼 자녀를 잃어 보셨나요?”라고 말할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때조차 “그래도 용기를 내셔야죠!”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분들에게 재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은 ‘끌어 올리는 말’이 있고 ‘밀어 올리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끌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밀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듀크 신학대학교에서 만난 앤지와 퍼시라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말하다가 퍼시가 앤지에게 대학교 때부터 좋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앤지가 퍼시에게 “그러면 당신의 이웃은 누구야?”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후 몇 주간 퍼시에게서 앤지의 질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앤지와 퍼시는 아파트를 떠나 리치몬드 처치 힐 중심가에 있는 오래된 도심지로 이사했습니다.
처치 힐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쇠퇴한 소위 할렘가였고 흑인들만 거주했으며 많은 이들이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그야말로 비참한 곳이었습니다.
퍼시와 앤지는 먼저 어린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퍼시는 농구공을 들고 아이들에게 농구를 시작했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이름을 외웠습니다.
조금씩 처치 힐 사람들은 그를 친구로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백인들처럼 그들을 범죄자로 보지 않고 이웃으로 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네 아이들은 퍼시의 뒤를 따라왔고,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비디오 게임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15명이나 퍼시의 귀가를 기다리며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은 퍼시와 앤지가 자신들의 숙제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것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믿고 집을 개방하여 아이들이 원할 땐 언제든지 그 집에 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에게 파티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지역 주민들은 퍼시와 앤지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백인 커플이 자신들의 동네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는 퍼시를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복경찰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퍼시와 앤지는 굽히지 않고 자원봉사자까지 구해 더 많은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002년 CHAT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CHAT은 상주직원 45명과 자원봉사자 수백 명, 운영예산 25억 원의 기관으로 성장했고 지난 13년 동안 아이들 공부방을 시작으로 처치 힐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참조: ‘유쾌함의 기술’, 앤서니 T. 디베네뎃, 유튜브 ‘책한민국’]
앤지와 퍼시는 소위 사회적 ‘루저’(Looser)가 되어버린 동네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던 백인사회에 속해있으며 그들에게 설교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들도 우리 백인들의 도시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재수 없어!”
퍼시와 앤지 커플은 말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용기를 줄 수도, 재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높은 위치에서 마치 밧줄을 내려주며 잡고 올라오라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밑에서 하는 말은 힘과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부류의 말씀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그들의 박해에 대해 “감히 하늘의 왕에게 이런 대접을?” 하며 분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숨고 숨어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박해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분명 올바름을 선포하셨지만, 그 말씀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말이 아닌, 사람들을 떠받쳐 올려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저는 말을 많이 하므로 재수 없는 잔소리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분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패치 아담스’(1998)는 의대의 엄격한 규율을 깨고 환자들의 눈높이를 맞춰 그들에게 웃음을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결국 자신의 이상에 꼭 맞는 병원을 설립한 헌터 아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지 않고 웃음을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여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나의 말이 잔소리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려면 내 목소리가 그들의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에 힘은 그 내용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위치가 결정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사담당사제
복음: 마태 12,14-21: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 준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이 어떻게 자신을 없앨까 모의하는 것을 아시고 조용히 다른 곳으로 물러가신 장면은, 단순히 두려움이 아닌, 인류 구원과 사랑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행동임을 가르친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이사 42,3)고 하셨다. 이는 그분이 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파멸시키지 않고, 언제나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연약함을 꺾지 않으시고, 우리 마음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참으시며 인내하신다.”(Enarrationes in Psalmos 33,2 요약)라고 말하였다.
교리서는 “그리스도의 사명은 단순히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을 회개로 이끄는 사랑의 사명”(545, 1846항 참조)이라고 밝힌다. 우리 자신도, 주님께서 참으시듯이 서로에게 관대하고 인내하며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이어서 이사야 예언서를 말씀하신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참조) 이는 예수님의 구원 업적이 완성되는 때,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시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임한다.”(Summa Theologiae, III 요약)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정의와 사랑이 어떻게 동시에 이루어지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구체적 교훈을 준다. 공동체 안에서, 혹은 직장과 가정에서, 약하고 부족한 이들을 그대로 존중하며 기다려 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예수님처럼 즉각적 심판보다 회개와 변화의 기회를 주는 사랑이 필요하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18절)라는 선언은 예수님의 완벽한 아버지 뜻 수행을 보여 준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일상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고통받고 상처받는 사람들을 돕는 일, 불의와 불평등을 바로잡는 일, 약자를 보호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와 인내의 종, 하느님께 사랑받는 종으로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며, 약하고 연약한 이들을 존중하고,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랑과 정의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고 마음에 드시는 사람으로 불릴 수 있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지금 타고 다니는 승용차 전에 15년 넘게 운전했던 차가 있었습니다. 워낙 튼튼했고 아무런 사고 없이 잘 타고 다녔는데, 어느 날 운전 중에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백미러로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글쎄 제 차에서 검은 무엇인가가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계기판 오일 게이지에 빨간색 위험 경고등이 표시되었습니다.
20년 넘게 운전하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차를 갓길에 세우고 차의 뒤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보닛을 열어 보았습니다. 또 차 아래도 살폈습니다. 그 이상한 현상의 원인을 발견했을까요?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20년 넘게 운전했지만,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차에 익숙할 뿐, 차를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성당에 매일 미사 나오고, 매일 기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고 주님을 제대로 알까요? 각종 봉사활동으로 교회 내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고 주님을 모두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주님께 익숙할 뿐, 주님에 대해 모두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시던 분들도 어렵고 힘든 일을 겪으면서 주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의 판단으로 예수님을 단죄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어기는 것을 예수님께서 용인하셨다고 고발하고, 스스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며 율법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또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그 사랑은 전혀 보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태 12,14)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마태 12,15 참조). 비겁한 도망일까요? 아닙니다.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기에,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묵묵히 이어가시려는 신중하고 주도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를 ‘고난받는 종’에 관한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의 성취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도들과 백성에게 메시아의 역할이 무자비한 힘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는 봉사를 통해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특히 그분의 사랑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삶에 갈등으로 오해받을 때, 똑같이 맞서 싸우거나 분노를 터뜨리지 않게 됩니다. 대신 예수님처럼 조용히 물러서서 하느님의 뜻을 묻는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에 집중한다면 그 지혜로 이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것은 성숙할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서두르는 것은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다(칼 융)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7.18.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마태 12,16)
알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고요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고,
욕심을 내려놓으면
자비가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일은
사랑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보여 주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얼마나 진실하게
살아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참된 자유는 남들의 평가에서
벗어날 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보다
십자가를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사랑도 익어 가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내면이 중요합니다.
선행도, 봉사도, 기도도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이어야 합니다.
건강한 자아는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데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뿌리내린 마음은
시련 속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우리를 앞세우지 않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삶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김경진 베드로 신부님 –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돌잔치 때 앞에 놓인 여러 물건들 중에서
아기가 돌잡이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돌잔치 때 하는 돌잡이는
아기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이 되서도 돌잔치는 계속됩니다.
인간은 항상 어떤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인생은 사다리 게임이 아닙니다.
인생은 늘 내가 결단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보다 나의 선택입니다.
신은 결코 주사위를 던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지금의 선택을 한 ‘나’를 선택하십니다.
오늘 어른 경진이는 뭘 손에 집을까?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마태12,16)
'빌드 업(build up)!'
오늘 복음(마태12,14-21)은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다고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해도해도 너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시면서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왜, 그래셨을까?
왜,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을 피해 물러가셨을까?
왜, 사람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여정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세상 구원을 위한 땀의 찬가인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여정은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 죽음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이유입니다.
'빌드 업(build up)'
이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미리 계획된 대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아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 빌드 업의 종착점'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성탄)와 땀(공생활)은 이곳까지 가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예수님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신 것이나, 당신께서 일으키신 많은 기적들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신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나의 빌드 업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고, 그 외의 것은 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빌드 업이지 아닐까요?
고통도 기쁨도 모두가 다. ㅎㅎ
오늘이 영원한 생명에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복된 빌드 업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분명한 목적을 바라보며 오늘도 최선을 다합시다!
Let it be(그냥 두어라)
Let it be(그대로 두어라)
(~ 시편119,176)
복음말씀
제1독서
<그들은 탐이 나면 밭과 집을 차지해 버린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2,1-5
1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2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
4 그날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너희는 서럽게 애가를 읊으리라.
‘우리는 완전히 망했네. 그분께서 내 백성의 몫을 바꾸어 버리셨네.
어떻게 우리 밭을 빼앗으시어 변절자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5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제비를 뽑고 줄을 드리워 줄 이가
주님의 회중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