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
저는 2주 전부터 몸이 별로 좋지가 않았습니다. 몸에 두드러기가 나지를 않나, 온 몸이 쑤시기도 하고, 종기도 나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힘들더군요. 몸이 힘들다고 하던 일을 하지 않고 쉴 수도 없었으니까요. 더군다나 이렇게 힘들 때는 이상하게도 일이 더 많아지더군요. 다른 성당과 학교에서의 강의가 있었고, 오랫동안 준비한 성모의 밤 행사도 있었고……. 그리고 지금 계속해서 해오던 일도 쉴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며칠 전, 문득 예전에 읽었던 바이오리듬이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혹시 라는 생각을 가지고서 저의 바이오리듬을 살펴보았지요. 그런데 글쎄 제가 아프기 시작한 5월 24일과 25일이 ‘위험기’가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날부터 ‘저조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부터 괜찮아지는 지를 보았습니다. 바로 어제부터 지성리듬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조기’로 바뀌는 것입니다.
딱 맞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정말로 어제는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과연 바이오리듬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요?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내 마음이 이를 보고는 ‘이제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즉, 내 마음이 이제 몸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마음 때문에 실제로 몸도 기분도 좋아진 것이라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만 있다면 그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으며, 그래서 늘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물론, 결국 자기 자신까지도 부정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즉, 다윗 왕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바로 자신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에 군중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성경에는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심에 행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 때문에, 예수님이 주님이 될 수 없다고…….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구원자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깨닫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마음,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과거 이스라엘의 군중들처럼 주님과 함께 큰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 먼저 하기.
빠다킹신부
메시아
-박영봉 신부-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기름부음 받은 이’ 즉 ‘메시아’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이시요, 예언자이시며, 왕으로서 메시아십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탄생이 약속된 메시아의 탄생이라고 목자들에게 알려주었으며,
요셉에게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하고 명하심으로써,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 요셉의 아내에게서 태어나시게
됩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메시아 축성은, 지상 생활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주심으로써’
(사도 10,38)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요한 1,31)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업적과 말씀으로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심이 드러납니다. 또한 말씀과 더불어,
“기적과 이적과 표징”(사도 2,22)도 행하심으로써,
예고된 메시아시라는 것을 증명해보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돌아가셨고,
부활하신 메시아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김희경 수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증거의 삶인지 고민해 본다. 자유의지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며 나의 책임이 동반된다. 수도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참 답답하고 힘들었다. 삼대서원을 깨버리고 싶은 유혹도 종종 받는다.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혹을 나의 신앙과 수도 삶이 더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다짐한다. 또한 마음이 답답하고 힘든 것은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에 비중을 더 두고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욕심이 더 우세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전보다는 조금씩 짧아지는 것을 보면서 힘듦이 곧 고통이 아니라 은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유롭게 내 의지를 발동하고 사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선택한 삶, 수도자로서 자신을 갈고 닦아 나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이웃에게 빛과 소금으로서 작은 기여를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내적 단련과 믿음의 성화 과정 안에서 때론 유혹을 겪으며 평화롭지 못한 시기를 수없이 반복하지만 그때마다 성령의 이끄심에 내 전존재를 내어 놓을 때 그 유혹을 굴복시키고 있는 자신을 대면하게 된다. 결국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고백을 한다.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계속하여 참된 나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우리에게 오시고 파스카 신비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은혜에 어찌 찬미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 고통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흘리신 성혈을 흠숭하고 사랑하는 이웃에게 다가가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선포하는 데 힘쓰는 그런 삶을 산다면 그것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리라. 모든 고통과 유혹을 굴복시킬 때까지 예수님 함께하여 주소서! 아멘.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것에 어느쪽에 비중을 더두고 살아가는지
-김동환 신부 -
조금어려울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오늘 복음에서 보면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는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번째 질문으로는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자신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하셨을까요?
실제로 다윗왕은 장차 자기 후손으로 나타나실 분을 "나의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왕의 자손이라면 어찌하여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으며 자신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시라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문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이 담고 있는 의미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똑바로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사시는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하느님의 구원자,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망하던 '다윗의 후손'이라는 호칭속에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그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에 정복을 당하여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라는 호칭의 의미를 똑바로 알려주고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과연 다윗의 후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지상왕국의 건설자 정복자로서의 그리스도 개념을 고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가져다주며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도록 이런 질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혹시 이렇게 생각해보신적은 없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내 생활안에서 나의 현세적인 평안함과 내가 바라는 일들의 성공을 위해서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신적은 없으십니까?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옛날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똑똑히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자신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분의 사랑을 가져다주며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내 자신은 내 생활에서 현세적인 것과 영적인것에 어느쪽에 비중을 더두고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이봉하수사-
수도생활을 하고부터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여행을 할 때 저도 모르게 이 구절을 흥얼거리며 노래로 부르기도
하고 평소 복음 묵상을 할 때 시작기도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수도생활의 나이가 더해지면서 자칫 틀에 갇히고 무디어 갈 수 있는
여러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못된 성질과 마음이 이 구절을 통해 저절로
부드러워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쁜 세상살이 안에서 틈나는 대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에
맛 들여간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성경을 읽기보다는 일반 서적 읽기를 더 좋아하고, 영혼에 기쁨이 되는
모임보다는 육신의 만족을 위한 모임이나 강의 등을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 주님을 따르고 영성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단 한 구절의 시편이나
복음 말씀에 맛 들여갈 수 있도록 스승이신 예수님께 가르침을 청하는
예수 성심 성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양승국신부-
<가장 절실한 언어, 희망>
미사 다녀오다 운전 중에 우연히 들은 소식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의 저자이신 신영복 교수님이 정년퇴임을 앞두고 오늘 마지막 강연을 하신답니다.
암울했던 지난 세월, 단지 ‘확고한 신념’, ‘맑은 정신’,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고 외칠 수 있는 ‘의로움’을 지녔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세월을 차디찬 감방에서 보내셨던 분입니다. 1988년 가석방된 후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신 교수님께서 이제 후학들과 함께 했던 17년간의 세월을 마무리 짓는 고별강연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궁금증에 확인해보니 한 말씀 한 말씀이 어찌 그리 가슴에 사무치는 말씀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인지요?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사람은 머리만 있어서는 안 되고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가져야 합니다.”
“비판적인 담론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고 인간적 애정이 담겨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담론과 사상이 될 수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언어가 바로 ‘희망’입니다. 인내가 현재의 상황을 무작정 견디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망은 견디기는 견디되 곤경의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날 강의의 주제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었답니다. 석과란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지막으로 남은 과실이라는 뜻이지요. 결국 석과불식을 풀이하면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씨 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겨울의 입구에서 앙상한 가지로 서 있는 나무는 비극의 표상이며 절망의 상징이지만 그 앙상한 가지 끝에 달려있는 빨간 감 한 개는 글자 그대로 ‘희망’입니다.”
제게 가장 큰 감동과 긴 여운을 남긴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한 기자가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교수님께서는 20년간이나 감옥생활을 거치셨는데도 사회에 대한 분노를 품고 계시지 않은 듯합니다.”
교수님은 온화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제가 출소하니 서대문 구치소도 없어졌고, 그 무시무시하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도 박정희 대통령도 돌아가셨더군요. 제가 처음 취조를 받던 남산 수도경비사령부도 한옥마을로 바뀌고, 남한산성 육군 교도소도 잔디가 푸른 체육구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바뀐 상황에서 증오를 갖는 것은 증오의 대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봤습니다. 역사의 격동기에는 일정한 숫자의 사람들이 감옥을 채우는 법이고 저는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고. 우리 사회가 겪어나가야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에 제가 해당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스로 내 속의 사회, 시대의 모습을 좀 더 많이, 넓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환원해 갖지 않도록 노력하지요.”
감옥에서 보낸 20년의 세월이 당신에게는 의미로 충만했던 대학 학창시절이었다고 고백하는 교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정말 큰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이 암시하는 바같이 유다인들은 다윗가문에서 출생한 메시아, 힘과 능력을 갖춘 정치인으로서의 메시아, 결국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들을 해방시켜줄 해결사로서의 메시아, 그래서 이스라엘을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하는 정복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허무맹랑한 기대를 무너트리십니다. 그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에 반박하십니다. 당신은 철저하게도 비폭력주의자로 처신하십니다. 완벽한 평화주의자이십니다.
참된 메시아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이 세상을 초월하는 왕입니다. 다윗 왕을 훨씬 능가하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실 왕 중의 왕이십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그런 만왕의 왕, 온 누리의 주님께서 어찌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고,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지나갈 이 현세에 기반을 둔 왕이 아니라 영원한 도성,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기반을 둔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만왕의 왕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왕,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그런 왕이 절대 아니셨습니다. 거듭되는 폭력과 압제, 비인간화 앞에서도 끝까지 견뎌내며, 끝까지 용서하며, 박해자마저 사랑으로 감싸 안은 사랑의 왕이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신 분
- 이기양 신부-
ꡒ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ꡓ(마르10,47)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예리코라는 동네에 들렀을 때 앞 못 보는 거지 하나가 나자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애원하던 소리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여러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을 정도로 소경이 큰 소리로 ꡒ다윗의 자손ꡓ을 외치자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 소원을 물으시고 볼 수 없던 그의 눈을 치유해 주셨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ꡐ다윗의 자손ꡑ이 아니시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듯 합니다.
ꡒ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ꡐ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ꡑ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ꡓ(마르12,35-37)
우리는 예수님이 ꡐ다윗의 자손ꡑ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증명해 주는 대목을 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ꡒ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ꡓ(마태1,1)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족보나 ꡒ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ꡓ(루카1,27) 마리아에 의한 아기 예수 잉태와 탄생이 그 예이지요.
ꡒ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 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ꡓ(루카2,4)
또 구약의 여러 예언서에서도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ꡒ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ꡓ(예레23,5)
이렇게 예언서와 신약성경 등에서 분명하게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임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오늘 율법 학자들에게 ꡒ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ꡓ(마르12,37)고 하시며 다윗의 자손이 아닌 듯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만의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사시던 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하느님의 구원자, 메시아였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망하던 ꡐ다윗의 후손ꡑ이라는 호칭 속에는 이스라엘을 회복할 정치적, 민족적 정복자로서의 왕의 의미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에 정복을 당하여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 줄 지상 왕국의 건설자로서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라는 호칭의 의미를 똑바로 알려주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과연 다윗의 후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지상 왕국의 건설자, 정복자로서의 이스라엘만의 그리스도 개념을 고치시려고 하신 것이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며 다윗의 후손이십니다. 그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으로써 단지 다윗 나라의 영광과 가문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인물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리고 그 분 안에서 참 자유와 평화를 가져다주며 온 인류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온 인류의 구세주이시지 이스라엘만의 구세주가 아님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이런 질문을 던지신 것이지요.
예수님을 단지 나의 현세적인 평안함과 내가 바라는 일들의 성공을 위해서 나를 지켜 주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옛날 유다인들이 생각하던 것과 똑같은 생각이지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나만의 예수님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인류의 구세주이시지요. 편협한 나만의 기도와 축복만을 바란다면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기도가 바로 나를 위한 기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