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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묵상글 ( 연중 33주간 수요일. - 창세기적인 여인.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1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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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1.19 05:07
- 창세기적인 여인
오늘 우리가 읽은 마카베오서는 어제 위대한 노인에 이어
위대한 어머니의 신앙심에 관해 들려주는데
저는 이 어머니를 창세기적인 여인이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녀에게 일곱 아들은 하나도 그녀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섯 아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어도 막내아들만은 내 아들로
남겨두지 않고 막내마저 하느님께 바치며 이렇게 얘기한 것입니다.
창세기적 여인과 창세기적 믿음은 존재의 시작을 이렇게 믿고,
이렇게 소유 없이 가난하며 이렇게 종말론적 희망을 지닙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부모에게서 생겨났어도
하느님께서 부모를 빌려 나를 나게 하셨다고 믿는 것이요,
내가 자녀들을 생산한 것이 틀림없어도 나는 나의 몸을
그분 창조의 도구로 내어드린 것밖에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가난할 때
부모와 자식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모든 애착에서도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마카베오서의 창세기적 여인의 위대함은 종말관에서도 나타납니다.
오늘 마카베오서는 창세기적 여인의 입을 빌려
종말론적인 희망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창조하시는 분이 구원도 하시는 겁니다.
사랑 없이 불장난으로 애를 생산한 인간은 낳기만 하고 버리기도 하지만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의 하느님은 당신이 낳은 생명을 내버려 두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내 구원하실 거라고 우리 신앙은 창세기 여인처럼 믿습니다.
우리 미사 감사송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데
감사의 두 굵직한 이유가 바로 창조와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선으로 창조하시고
정의로 책벌하셨으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비로 구원하셨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동안 감사드릴 것이 많고도 많겠지만
나의 창조와 나의 구원에 대해 굵직히 감사드릴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창세기적인 믿음이 있어야만 이럴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창세기적인 여인에게서 도전도 받고 자극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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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하고 성실한 삶
“하느님의 나라는, 삶은 선물이자 과제다”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17,8)
“어떻게 살아야 하나?”
바로 복음의 미나의 비유가 답을 줍니다. 마태복음의 탈렐트의 비유와 흡사합니다. 비유를 통해 깨닫는 바, 하느님의 나라는, 삶은 선물이자 과제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죽어야 끝나는 삶입니다. 끝까지 하루하루 “한결같이” 살아감이 중요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말합니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살아가는데 급급해진다.. 그러니 삶이 사납게 닥쳐올수록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우리 믿는 이들이 생각할 바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믿음과 희망을 두고 늘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미나의 비유가 우리 삶에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한번뿐이 없는 소중한 한미나의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흡사 복음의 미나 비유에서 주님으로 상징되는 주인에게 한 미나씩 선물로 받은 사람들과 같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루하루 최선의 능력을 다해 착하고 성실히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예외없이 내 삶의 선물에 대해 헴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주인이신 주님과의 결산이 시작됩니다. 죽음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최종 결산해야 할 최후 심판의 날일 수 있습니다만, 아무도 그 마지막 시험 날짜를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미나로 열미나를 남긴 첫째 종은,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보답을 받고,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남긴 종 여기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습니다. 좌우간 나름대로 역량을 힘껏 발휘하여 소정의 업적을 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바 업적의 양이 아니라 각자 삶의 충실도입니다.
문제는 한 미나 그대로 가져온 사람입니다. 삶의 선물에 대한 과제 이행이 전무한 종으로, 그의 생각이 얼마나 오해로 왜곡되어 있는지 우리의 <하느님관>을 비춰보게 됩니다. 주인을 주님으로 바꿔 읽으면 더욱 실감나게 이해될 것입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좋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얼마나 소심하고 어처구니 없는 오해와 착각으로 점철된 자폐적 하느님관인지요! 정말 하느님을 신뢰하고 희망하면서 긍정적 낙관적 열린 사고로 모험적 투신의 삶을 살면서 최선을 다했다면 이런 과제 불이행이나 불행한 심판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무관한 관계와 더불어 과제 이행 역시 전무했으니 얼마나 무지한지, “이 악한 종아”와 더불어 주님의 혹독한 질책과 심판이 뒤따릅니다. 주님 탓이 아니라 순전히 무지와 태만으로 스스로 자초한 자업자득, 심판의 재앙임을 깨닫습니다.
“저자에게서 한 미나를 빼앗아 열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대로 영적 현실에도 적용되는 부자는 더욱 부자되고 빈자는 더욱 빈자가 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 나름대로 긍정적 낙관적 사고로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고 끊임없이, 한결같이, 끝까지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삶이 얼마나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는 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미나의 비유는 우리가 착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는지 또는 불충한 삶을 살았는지 거울처럼 비춰주면서 회개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일곱 아들의 순교와 이를 목격하고 마침내 순교한 어머니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이자 결론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와 희망을 둔 어머니와 일곱형제와 일관된 순교적 삶이었는 감동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역시 모전자전 그 어머니의 그 아들들이었는지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특별히 그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고결한 정신으로 가득 찬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순교적 삶을 그대로 보고 배운 일곱 아들들, 참으로 선사받은 선물인생을 순교적 삶의 과제 이행에 참으로 충실했던 감동적 사람들입니다. 역시 우리 삶의 부족과 나약함을 거울처럼 비춰주면서 우리를 회개에로 이끌어 줍니다.
복음의 주님 종들이 한 미나를 선물로 받앋듯이 우리 역시 날마다 똑같은 하루를 선물로 받습니다. 똑같은 하루의 선물이지만 하루가 끝났을 때 결과의 성과는 참 다양할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앞에서 회개와 더불어 하루하루 날마다 받은 하루의 미나를 헴바치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오리다.”(시편17,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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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벌거숭이로 알몸이 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초겨울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선물이요 은총임과 동시에, 그에 따른 과업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선물인 ‘미나’는 주인이 ‘벌이를 하라고 맡긴 것’(루카 19,13 참조)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인은 돌아오면 그 소명을 실현하였는지의 여부에 따라 심판을 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왕권을 받으러 먼 고장으로 떠난 어떤 귀족’은 예수님의 승천을, ‘다시 돌아옴’은 재림과 종말을 암시해줍니다.
이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 지지만, 사실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과 맺는 관계성’에 있습니다. 곧 주인에 대한 ‘믿음’과 ‘순명’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행실을 ‘순명’으로 채워나가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거나 혹은 자신의 안정과 보존에만 머물지 말고, 선으로 활용하고 충실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에 충실하고 있는지,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에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 19,13)
주님!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사랑이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 크신 힘에 감사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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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셋째 날은 은행 업무와 운전면허증 갱신 업무를 보았습니다. 은행 일은 금방 끝났지만, 면허증 갱신은 쉽지 않았습니다. 준비물이 여러 가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진 2매, 출국 항공권, 해외 체류 비자’가 필요했습니다. 항공권은 인쇄본으로 제출해야 했습니다. 또, 갱신과 적성검사를 위해서는 신체검사도 받아야 했습니다. 혼자 감당하기에 버거웠지만, 안내 직원이 친절하게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헤매고 있으니 직접 프린터를 이용해 항공권도 출력해 주었습니다. 그분의 친절함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한국의 행정 시스템은 참으로 빠르고 효율적이었습니다. 대기표를 뽑으면 예상 대기시간이 화면에 표시되고, 번호가 뜨자마자 창구에서 신속하게 처리해 줍니다. 신청 후 5분 만에 현장에서 새 운전 면허증을 바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앞면은 한글, 뒷면은 영어로 되어있었고, 유효기간은 2035년까지입니다. 앞으로 10년은 걱정이 없습니다. 그날 저를 도와준 안내 직원과 창구 직원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이들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실 것입니다.
저녁에는 전에 함께했던 본당의 형제님들과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전의 추억으로 돌아갔습니다. 전 신자가 함께 기차를 타고 성지순례를 갔던 일, 도보로 수리산과 절두산을 향해 순례하던 기억, 또 천수만으로 가족 캠프를 갔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태풍 곤파스로 성당 흙이 아파트 쪽으로 밀려 내려갔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큰일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서울시와 구청의 도움으로 산을 깎아내어 안전하게 정리했더니, 그 자리에 멋진 앞마당이 생겼습니다. 당시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구청 교우들을 위해 미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알게 된 직원들이 성당 마당 정비에 좋은 방안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땅에 지금은 십자가의 길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잡목으로 뒤덮였던 곳이 이제는 아름다운 정원이 되어, 성모의 밤 전례도 하고, 사순시기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도 드린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버려진 땅이 은총의 공간으로 바뀐 것은, 결국 믿음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주어진 일에 성실한 사람,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면허증 갱신 창구에서 묵묵히 일하던 직원,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본당을 위해 봉사하는 형제님들처럼 말입니다. 어제는 엘아자르의 순교 이야기, 오늘은 일곱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의 믿음과 헌신은 ‘부활 신앙’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을 때, 그때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라는 문을 열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쟁으로 정해지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절대평가의 나라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예수님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는 탁월한 재능을 세상을 위해 썼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한 믿음의 길을 알았다면 더욱 복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 다른 하나는 남을 돕기 위해 주신 것이다. 발이 둘인 것은 하나는 나를 위해 걷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게 다가가기 위해 있다. 눈이 둘인 것은 하나는 나를 바라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아름답게 보기 위해 있다. 귀가 둘인 것은 하나는 내 유익을 듣고, 다른 하나는 남의 어려움을 들어주기 위해 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나 자신을 위해 쓰되, 그 절반은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자신만을 위해 쓰는 재능은 하느님 나라의 열쇠가 되지 못합니다. 밤하늘이 별빛으로 아름답듯이, 우리의 선행과 봉사가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작지만 성실한 우리의 손길이, 누군가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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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 모두 안에서 작동하는 편향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1월 18일 화요일- 마흔네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우리의 편향을 인식하기!
우리가 인식하고 극복해야 할 구체적인 편향들은 무엇일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브라이언 맥라렌은 우리가 사물을 그 복잡성과 더 큰 명료함 속에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열여섯 가지 편향을 지적하였습니다: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편향은 높은 담처럼 그들을 둘러싸, 무지와 기만과 환상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아무리 논리와 이성으로 설득하려 하여도, 먼저 그 편향의 담을 허물지 않으면 결코 마음에 닿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극복해야 할 구체적인 편향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이들 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도 마주해야 할 과제입니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우리는 새로운 생각에 대해 판단할 때, 그것이 저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준, 곧 오래된 생각, 익숙한 정보, 신뢰하는 권위―에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가에 따라 평가합니다. 그 결과, 저희가 지닌 신앙의 틀(frames), 신앙 체계, 혹은 인식의 패러다임은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배제해 버리게 됩니다.
복잡성 편향(Complexity Bias): 우리의 지성은 복잡한 진리보다 단순한 거짓을 더 쉽게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 편향(Community Bias):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보지 못하거나, 보려 하지 않는 것은 우리도 거의 보지 못합니다.
상호성 편향(Complementarity Bias): 누군가 내 생각에 적대적이면 나도 그의 생각에 적대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내 생각에 호기심을 가지고 존중한다면, 나 역시 그에 상응하여 응답하게 됩니다.
역량 편향(Competency Bias): 우리는 다른 이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혹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무능한 사람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도 자신만큼 무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자기 자신의 무능을 과소평가하고, 최소한 평균적인 역량은 갖추었다고 여깁니다.
의식 편향(Consciousness Bias):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어떤 것들은 단순히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하며 발전한다면, 언젠가는 지금은 접근할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안일 혹은 자기만족의 편향(Comfort or Complacency Bias): 우리는 우리의 안락함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보수/진보 편향(Conservative/Liberal Bias): 우리는 정치적 정체성의 표현으로서, 한편으로는 공정함과 친절을 기르는 쪽으로 기울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순결, 충성, 자유, 권위를 엄격히 지키는 쪽으로 기울곤 합니다.
자신감 편향(Confidence Bias): 비록 그것이 거짓된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감에 이끌리곤 합니다. 그래서 주저하는 진리보다 대담한 거짓을 더 선호할 때가 있습니다.
재난 편향(Catastrophe Bias): 우리는 극적인 재난은 기억하지만, 점진적인 쇠퇴나 개선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접촉 편향(Contact Bias): 우리는 '타자'와 깊고 지속적인 개인적 접촉을 하지 않을 때, 저희의 편견과 잘못된 가정은 도전을 받지 못합니다.
재물 편향(Cash Bias): 우리의 생계 방식이 어떤 것을 보지 않도록 요구할 때, 그것을 보는 것이 어렵습니다.
음모 편향(Conspiracy Bias): 우리는 스트레스나 수치심 속에서, 저희를 위로하거나 면책해 주며, 혹은 우리를 악의적인 음모자들의 무고한 희생자로 묘사하는 이야기들에 쉽게 끌리곤 합니다.
지속성/기준선 편향(Constancy/Baseline Bias): 우리 뇌는 어린 시절부터 날마다 경험하는 것을 바탕으로 정상성의 기준선을 설정합니다. 저희의 뇌가 정상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판단한 것은 저희에게 곧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부에는 새로운 일상이 저희의 기준선이 되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상’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재난 편향의 반대 측면입니다.]
확실성/종결 편향(Certainty/Closure Bias): 우리의 뇌는 불확실성을 느낄 때 쉬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절한 불확실성을 살아내기보다, 근거 없는 확실성에 성급히 매달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저희는 잠재적으로 희망적인 불확실성보다, 비관적인 확실성을 더 선호할 때도 있습니다.
영리함 편향(Cleverness Bias): 뇌는 기만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경계합니다. 그러나 이 경계심이 습관적으로 지나치게 강해지면, 우리는 냉소적으로 변하여 모든 좋은 소식이나 격려의 메시지를 순진한 것으로 치부하며 거부하게 됩니다.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다 오히려 긍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성품성사를 통해 사제로 서품되었지만, 교회 지도부의 잘못된 관리와 성직자들에 대한 부족한 배려, 그리고 은폐된 여러 가지 남용 때문에 존경심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의 하느님과의 여정은 리처드 신부님의 저술과 매일의 관상 묵상을 통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것은 제가 낙심할 때 저를 일으켜 세워 주며, 내적·외적 갈등 속에서도 신앙을 나눌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Peter S.
References
Brian McLaren, Why Don’t They Get It? Overcoming Bias in Others (and Yourself), rev. ed. (Self-published, 2019, 2024), 11, 14–55, e-book.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ud Helisson, untitled (detail), 2021, photo, Brazil,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렌즈는 우리가 본래 지닌 편향을 상징합니다.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만을 선호하거나, 우리와 닮은 이들만을 바라보는 편향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합니다. 그러나 참된 깨달음은 다시 바라보고, 다르게 볼 수 있으려는 열린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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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미나/탈렌트’는 충실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거룩한 선물이다
구원자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갖가지 거룩한 선물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이 ‘미나’의 뜻이라고 확신합니다. ‘미나/탈렌트’를 받은 사람들과 그분의 나라를 송두리째 부정한 사람들의 차이는 실로 큽니다. 나라를 부정하는 자들은 왕권을 가진 분의 멍에를 벗어 던지는 반역자들이고, 탈렌트를 받은 이들은 그분을 섬겨 영광을 입습니다. 그리하여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직무를 받습니다. 그들은 직무를 수행하며 이윤을 법니다. 성실히 일했다는 칭찬을 듣고, 영원한 영예를 누릴 자격을 인정받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예수는 버림을 잘 알고 있었으며, 참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는 “자유로웠고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는 외적 가난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몸소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리고 이 가난은 마음의 가난, 세계를 보는 방식. 버림의 과정이 되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유로웠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야말로 참된 버림의 본보기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야말로 버릴 줄 알고 그대로 둘 줄 알았던 “순결한” 분이기 때문이다. 쉬르만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자유로웠고, 텅 비어 있었으며, 순결했다. 그는 아무런 집착도 없이 구원 사역을 이루었다. 예수야말로 근원적인 자유를 되찾은 자,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즉 버릴 줄 아는] 자의 이상이자 본바탕이다.
이 합일의 모범이자 목표인 예수는 우리가 말씀과 하나가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이렇게 뜻매김한다: 순결한 예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모든 상과 모든 행위에 대한 소유욕을 여의고, 그를 본받아 버리고 - 초탈하고 - ‘처녀”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이룬 모든 업적에 대한 권한을 버리고 우리를 구원했다 (507)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 3절: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가로의 발전
토마스주의적 ·스콜라학적인 가르침에 의하면, 성사둘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된 표지로서 사람들이 그것들을 신앙으로 받고 은총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효적으로” 은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중재한다. 신앙은 성사를 받는 데 필요하지만 은총을 중재하는 것은 성사적 표지이다. 루터는 이 표지를 비워 버리고. 은총의 중재가 신앙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신앙은 새로운 양상을 얻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을 지성과 강하게 결부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무엇보다도 먼저 계시 진리를 사실로 알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실로 알고 인정하는 것은 또한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이, 후기 스콜라학에서는 너무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루터는 그것을 탑의 체험에서 자신을 위하여 새로 발견하고 거기서 “마음으로 믿으면 의화된다”(로마 10,10)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신앙이 신뢰의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다시 그렇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는 단순히 모호해지고 후퇴되어 있던 그 어떤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것을 완전히 파악하였다. 그것을 절대시함으로써 그는 이 새로운 신뢰적인 신앙만을 구원 과정에서 통용시키고 있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인 죽음에 대한 신뢰적인 신앙에서 당신에게로 가까이 오는 자에게 당신의 은총적 의를 선물하고, 당신 아들의 공덕을 그에게 인정한다는 사실을 추론하고 있다.(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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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하늘나라의 은총과 사명’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만듭니다.
미나는 단순히 돈이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신앙, 은총, 시간, 그리고 이웃을 위한 봉사의 기회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출발선에서 각자에게 ‘한 미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단순히 보관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세상 속에서 활용하고 나누어 열매를 맺으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또한 복음은 하늘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으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에 완성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맡긴 것을 어떻게 살렸느냐?” 우리가 그 질문에 기쁘게 대답할 수 있으려면,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작은 선행 하나, 용서의 마음 하나, 사랑의 실천 하나가 미나를 불리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노력과 정성을 크게 보상하십니다. 열 미나를 남긴 종에게는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열심히 활용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더 큰 기쁨과 사명을 맡겨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은총을 묻어 두고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그마저도 잃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경고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미나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의 씨앗이며, 우리의 손길을 통해 크게 자라날 수 있는 보화입니다. 오늘 하루도 그 미나를 땅에 묻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사랑과 믿음으로 불려나가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빵’에게 배우는 우리 모습
어릴 적 처음 공갈빵을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얼굴만 한 커다란 빵
부풀 대로 부풀어있는 빵
그러나 그 안은 텅 비어 공기처럼 가벼운 빵
한입 베어 물면 빵 전체가 바스러지는 빵
공갈빵에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은 튼실해 보여도 속은 텅 비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갈빵과 반대 빵도 있습니다.
바로 참깨 빵입니다.
주먹 반개보다 작은 빵이지만 안은 쫀득함으로 가득한 빵.
빈 곳 한데도 없고 오히려 조금씩 떼어먹어야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빵
작지만 완전 튼실한 빵이 바로 참깨 빵입니다.
두 개의 빵 모두 그 맛이 다릅니다.
겉모습이 아닌 그 빵 모습 그대로가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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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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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SBS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에 치킨집 튀김기 청소의 달인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매일 퇴근 전에 튀김기를 깨끗이 닦습니다. 그냥 깨끗한 정도가 아니라, 튀김기에 눌어붙은 기름을 녹이기 위해 헤어드라이어까지 동원해서 말 그대로 빡빡 닦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끗이 닦은 튀김기를 SNS에 매일 올렸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치킨 집 매울이 3배나 올랐습니다.
치킨은 깨끗한 기름에 튀겼을 때 제일 맛있다는 것을 모두 압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 집을 찾았습니다. 깨끗한 튀김기, 깨끗한 기름에 튀긴 제일 맛있는 집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곳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성공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성호경 한 번 긋기가 그리 힘들지 않다는 것을 모두 압니다. 그러나 일상 삶에서는 이 성호경 한 번도 상당히 힘들게 생각합니다. 믿음도 이런 작은 곳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몇 초 걸리지 않는 성호경도 정성껏 긋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아가고 가까워지면서 특별한 사랑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면, 로마를 몰아내고 다윗의 왕조를 재건하는 정치적·지상적 왕국, 즉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시작될 것이라 흥분하며 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의 재산을 맡은 종들의 충실성에 대한 심판 이야기를 전해 주면서 그들의 기대를 수정하십니다.
종들에게 동일하게 ‘한 미나’씩, 이는 약 100데나리온으로 노동자의 100일 치 품삯에 해당하는 큰돈입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으로부터 복음, 은총, 믿음 그리고 사명이라는 동일한 선물을 받았음을 상징합니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 ‘벌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바로 제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받은 은총을 수동적으로 보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활용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첫째 종은 열 미나를 벌었습니다.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이에 맞춰 ‘더 큰 책임과 통치권’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의 보상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에 더 깊이 동참하는 것임을 보여 주십니다. 문제는 셋째 종의 수건에 싸서 보관만 한 모습입니다. 받은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변명, 핑계만 대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명백한 불충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 불충함은 받은 것조차 잃게 되면서, 임금이신 주님과 함께할 수 없게 됩니다. 기다림은 수동적 방치가 아니라, 능동적 실천의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은총(한 미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선물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습니까? 작은 곳에서도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아버지의 등 뒤에서 나는 세상을 배웠다(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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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은 여전히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구원 여정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저자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 이 이 길 속에 담겨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과 물리적으로 함께하지 못할 때를 대비하여,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위한 교회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주님은 외국으로 떠난 주권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그가 종들에게 맡긴 것을 성실히 관리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이지요. 이는 곧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교회가 사도적 직무와 선교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너무나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존하며, 맡겨진 복음 선포와 봉사를 성실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 말씀의 요점인데.... 이 말씀은 겉으로 들으면 불의해 보이고, 마치 세속적 자본주의의 원리를 정당화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의 요점은 단순한 경제적 거래가 아니라, 영적 실천과 은총의 법칙입니다.
세상의 사업은 재물과 소유, 그리고 돈을 다루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법칙은 내적 실재, 곧 마음과 영혼, 성령의 은총에 적용됩니다. 은총을 충실히 살아내는 이에게는 더 큰 은총과 신비가 주어지고, 은총을 묻어두는 이에게는 그마저도 잃게 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말씀은 불의한 경제 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경륜 속에서 은총과 신앙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드러내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작은 거북이가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다른 동물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자주 껍질 속에 숨어 버리는 것을 보고 한 현자가 거북이에게 말합니다. "작은 거북아, 너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창조하신 피조물이다. 그러니 결코 자신을 낮게 여기거나 슬퍼하지 말아라."
삶에서 성장과 진보를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을 내밀지 않으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요!
거북이가 목을 내밀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듯이, 우리도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가 없다면 결코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목을 내민다는 것은 곧 위험을 감수한다는 것, 다시 말해 신앙의 모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진보도, 성숙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 속에서, 어떤 이는 목을 내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은총을 활용하지 않고 묻어둔 종과 같았으며, 결국 성장하지 못하고 구원 경륜의 흐름에서 뒤처진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위험을 감수하여 방주를 지어 대홍수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위험을 감수하며 고향과 친족을 떠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위험을 감수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예레미야는 수많은 박해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예언자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의 직업을 버리고 위험을 감수하여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사람을 낚는 어부, 곧 사도로 살아갔습니다. … 그리고 성경에는 이처럼 위험을 감수하며 은총과 협력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낸 수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목을 내밀지 않는다면 결코 영적 성장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요....
예수님께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 하신 말씀에서의 기억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기억을 현재화하는 것(ἀνάμνησις)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아남네시스는 단순히 머리로 예전의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사건을 현실 속에서 실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저 도전을 던져 주시고 우리 홀로 그 버거운 길을 걷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말씀 마지막 부분에서 루카 복음 저자는 아주 의도적으로 이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지 우리더러 홀로 이 험난한 여정을 걸으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용기를 내어 당신을 따르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4-15).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용기를 내어야 하겠지요!
우리는 절대 홀로 이 길을 걷지 않습니다. 물리적으로는 홀로인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실제로는 주님께서 우리를 앞장서서 우리 손을 이끌어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이곳 센터에서는 김장을 담급니다. 어제는 불현듯 이 김장에 함께해주시는 은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주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일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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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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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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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어떤 귀족과 종들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떤 종들은 주인의 명에 따라
주인이 준 돈으로 벌이를 하였지만
어떤 종은 그 돈을 그대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대로 보관해 둔 종은
주인을 냉혹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하였다고
주인에게 말합니다.
어쩌면 이 종의 모습은
그 귀족이 왕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그 나라의 백성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비록 그 귀족의 종이지만
그가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더 나아가 왕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서
주인의 명을 지키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이 되지 못한다면
몰락해서 주인이 바뀔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의 명을 따르지 않은 것은
주인을 냉혹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주인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종의 삶은 주인과의 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 적용한다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궁리만 했습니다.
이 관계를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냉혹하신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 청하지만
그것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더욱 노력하게 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선행도 많이 하지만
그래도 생각만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분이라기보다는
냉혹하신 분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때로는 나 자신을 좋지 않게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느님과의 관계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차라리 그 관계를 끊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멀리하지도 못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기도가 부족해서
우리의 노력이 부족해서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청한 것을 받기까지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주실 것이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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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9,11ㄴ-28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미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면서, 종 열 사람에게 각각 한 미나씩 나눠주며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여기서 ‘미나’라는 화폐단위는 ‘1 탈렌트’의 60분의 1에 해당합니다. 1 탈렌트는 한 사람의 노동자가 6,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니 그 60분의 1이면 오늘날 우리 화폐 가치로 대략 천만원 정도 되는 금액이지요. 탈렌트만큼 크진 않지만, 결코 적지 않은 돈입니다.
그런데 탈렌트나 미나는 단순히 화폐 단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탈렌트가 하느님께서 각 사람마다 그 능력에 따라 다르게 주신 재능, 재물, 시간 등의 조건을 가리킨다면, 오늘 비유에 나오는 미나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시는 ‘말씀’의 씨앗을 가리키지요. 그리고 그분의 일꾼인 우리는 각자 받은 말씀의 씨앗을 얼마만큼의 정성과 노력으로 가꾸는가에 따라 그만큼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겁니다. 즉 ‘열 미나’만큼의 결실을 맺든, ‘다섯 미나’만큼의 결실을 맺든 그건 다 ‘자업자득’이니 다른 이를 시기 질투할 이유도, 하느님을 원망할 명분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 나오는 마지막 종은 그 미나를 가지고 ‘벌이’를 하라는 주인의 뜻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수건으로 감싸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감춰둡니다. 그리고는 냉혹한 주인이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거 가시기에” 두려워서 그랬다는 핑계를 대지요. 참으로 이상합니다. 분명 주인으로부터 ‘한 미나’를 받았음에도, 그는 왜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아무것도 못 받았다고, 주인이 아무 것도 안줬으면서 뺏어가려고만 한다고 말할까요? 아마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주인이 준 미나가 자신이 원하던 만큼이 아니거나, 아니면 ‘미나’의 본질과 가치 자체를 아예 모르거나.
그런 그의 모습은 신앙생활하는 우리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의 씨앗이라는 선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를 반드시 현실로 이루시는 그 말씀의 힘을 제대로 알려고도, 본격적으로 믿어보려고도 하지 않지요.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도 무엇 하나 이득 되는 게 없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이유로 해야 할 일도 많고 내놓아야 할 것도 많아 오히려 손해만 보는 것 같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세례받았다고 불평 불만을 잔뜩 늘어놓습니다.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과 보람을 얻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얻지 못한 탓을 하느님께 돌리는 모습이지요.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행복과 영광을 시기와 질투, 원망과 비난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에 죄다 빼앗기고,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질 뿐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의 씨앗을 순명과 실천으로 잘 가꾸어 그 풍성한 결실을 벌어들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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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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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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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로마노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제1독서 (2마카7,1.20-31)
"너희가 어떻게 내 배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준 것도 내가 아니다.(22)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29)
마카베오서 하권 7장은 어떤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를 전한다.
일곱 아들은 각기 임금 앞에 불려가 고문을 당하며 왜 자신이 고통을 달게 받는지 설명한다.
어머니는 두 시점에서 개입한다(2마카7,20-23; 26-29)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들들의 뒤를 이어 죽는다(2마카7,41).
어머니와 아들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유다인의 정체성을 명확히 구분해 주는 실천 사항들, 곧 할례, 안식일 준수 그리고 음식에 관한 법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죽는다.
순교자들이 엄청난 고통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보존한 동기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
둘째 아들은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시키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2마카7,9)라고 말한다.
셋째 아들은 자기 혀를 내밀고 손을 내뻗으며 "이 지체들은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까지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고 희망하오."(2마카7,11)라고 말한다.
넷째 아들은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한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2마카7,14)라고 지적한다.
끝으로 어머니는 일곱째 아들에게 조언하며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꼐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2마카7,29)하고 말한다.
마카베오 하권 7장 30-38절에서 일곱째 아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화해하시기 전에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이 고난을 받게 하신다고 말한다(2마카7,33).
그는 순교자들의 고난으로 "온 민족에게 정당하게 내렸던 전능하신 분의 분노가 끝나기를" 간청한다고 말한다(2마카7,38).
이 말은 마카베오 하권 제4부(2마카10,10-15,39)에서 길게 전개되는 속죄 제물의 사고를 도입하는 것이다.
마카베오 하권의 설화 구조에서 고난을 통해 배우는 가르침과 순교자들의 죽음이 갖는 속죄의 가치로 인해 하느님께서 유다 마카베오 때 이스라엘을 쇄신하시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정화하실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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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복음] ‘잘하였다, 착한 종아!’ 복음(루카19,10-28)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자케오 처럼 하느님의 사랑, 길을 잃은 죄인들이다. 11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덧붙여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예수님)이 왕권(생명, 구원의 권한)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하늘)으로 떠나게 되었다. = 하늘가는 길 잃은 죄인들을 구원(救援)할 수 있는 권한이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 열 사람이 각각 받은 ‘한 미나’는 하느님께서 열을 하나로 주신 것이다. 곧 선악의 여러 계명을 사랑 하나로, 한 계명으로 주신 것인데(갈라5,14) 그 사랑 하나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사랑으로 얻는 왕권, 권한이다. 그 이타(利他)의 사랑이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계약, 진리로 자신의 생명임을 깨달아 마음에 믿음으로 간직하고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굳게 지키는 일을 하라고 주신 것이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해야할 사랑의 계명, 새 계명이다. (성경에서 열(10)과 하나(1)는 같은 의미다) (요한17,2-3) 2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 많은 사람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생명, 빛, 구원이신데 말이다.(요한1,9-11)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깨달음)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하나가 열임을, 열이 하나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 상태가 구원, 진리의 길이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 ‘잘하였다, 착한 종아!’라는 칭찬이 없다. 하나로 다섯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를 다섯으로 가지면 모세 오경, 율법이다. 이 종은 그 율법, 그 다섯을 잘 다스려, 그 다섯으로 다른 차원의 다섯을 깨달아 열로 갖고, 그 열이 하나임을 깨닫는 일을 다시 해야 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뜻, 사랑을 십계명으로 다섯, 다섯, 두 돌판에 주셨다.(신명4,13) 그 옛 계명과 새 계명, 옛 계약과 새 계약을 뜻한다. 곧 옛 것이 죽음의 법임을 깨달아 생명의 법, 그리스도 안에 새것이 되어야 한다.(갈라3,24-25 2코린5,17)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聖經)을 고이 모셔 놓고는 세상에서 배운 도덕과 윤리의 삶으로 사람들에게서 들은 ‘상선벌악’의 하느님으로 그냥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면 두려움의 신앙을 살 수 밖에 없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 성경(聖經)을 모르니, 사랑 그 하나의 계명을 모르니, 곧 죄인들의 마음 밭에 씨로 오셔서 썩어지시고, 그 길을 잃은 죄인들에게 열매로 하늘의 생명을 주시러 오신 그리스도의 희생, 사랑을 모르니, 두려운 하느님이 된다. 그것이 진리를 벗어난 불의(不義), 죄(罪)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 말씀을 이자로 불려줄, 곧 말씀, 문자 안에 감추어진 실체, 내용인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랑’, 그 하나를 더 깨닫고 믿게 해 줄 성령(聖靈)께 의탁함이다. 성령께서 끄시는 말씀 나눔의 모임에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 나눔의 모임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구역, 반 모임, 또한 진리의 말씀이 아닌 자신들의 말을 나누는 친목(親睦)의 모임이 되어 버렸다. 올바른 모임, 단체를 찾고, 만들어야 한다.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각자가 받은 한 미나가 자신들의 생명, 구원 이었다. 그것을 ‘깨달으라.’ 주신 것이다. 깨닫지 못해 믿지 못하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빼앗김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희생(犧牲), 그 크신 사랑을 헛되게 하는 큰 죄악이 된다. ‘다섯 미나’를 갖은 이는 언급하지 않으신다. 건너야 할, 버려야 할, 율법(律法)이기 때문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 ‘한 미나’를 잃어버린, 곧 선악(善惡)의 말로 죄인(罪人)이 된 이들을 구(求)하시는 일을 하시러, 십자(十字)나무에 달리시러 길을 가심이다. 원수(怨讐)는 그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그 주님의 사랑을 새 계명(誡命), 새 계약(契約)으로, 진리(眞理)로 믿지도 의탁(依託)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한 미나’를 고이 묻어둔 사람이다. 깨닫고 믿기 위한 벌이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필리3,18-19)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 보호자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들의 마음에 충만하시어 믿음을 위한 깨닫는 일을 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제1독서 (2마카7,1.20-31) "너희가 어떻게 내 배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준 것도 내가 아니다.(22)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29) 마카베오서 하권 7장은 어떤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를 전한다. 일곱 아들은 각기 임금 앞에 불려가 고문을 당하며 왜 자신이 고통을 달게 받는지 설명한다. 어머니는 두 시점에서 개입한다(2마카7,20-23; 26-29)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들들의 뒤를 이어 죽는다(2마카7,41). 어머니와 아들들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유다인의 정체성을 명확히 구분해 주는 실천 사항들, 곧 할례, 안식일 준수 그리고 음식에 관한 법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죽는다. 순교자들이 엄청난 고통 한가운데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보존한 동기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 둘째 아들은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시키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2마카7,9)라고 말한다. 셋째 아들은 자기 혀를 내밀고 손을 내뻗으며 "이 지체들은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까지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고 희망하오."(2마카7,11)라고 말한다. 넷째 아들은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한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2마카7,14)라고 지적한다. 끝으로 어머니는 일곱째 아들에게 조언하며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꼐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2마카7,29)하고 말한다. 마카베오 하권 7장 30-38절에서 일곱째 아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화해하시기 전에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이 고난을 받게 하신다고 말한다(2마카7,33). 그는 순교자들의 고난으로 "온 민족에게 정당하게 내렸던 전능하신 분의 분노가 끝나기를" 간청한다고 말한다(2마카7,38). 이 말은 마카베오 하권 제4부(2마카10,10-15,39)에서 길게 전개되는 속죄 제물의 사고를 도입하는 것이다. 마카베오 하권의 설화 구조에서 고난을 통해 배우는 가르침과 순교자들의 죽음이 갖는 속죄의 가치로 인해 하느님께서 유다 마카베오 때 이스라엘을 쇄신하시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정화하실 수 있게 된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복음(루카19,10-28)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자케오 처럼 하느님의 사랑, 길을 잃은 죄인들이다. 11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덧붙여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예수님)이 왕권(생명, 구원의 권한)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하늘)으로 떠나게 되었다. = 하늘가는 길 잃은 죄인들을 구원(救援)할 수 있는 권한이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 열 사람이 각각 받은 ‘한 미나’는 하느님께서 열을 하나로 주신 것이다. 곧 선악의 여러 계명을 사랑 하나로, 한 계명으로 주신 것인데(갈라5,14) 그 사랑 하나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 그 사랑으로 얻는 왕권, 권한이다. 그 이타(利他)의 사랑이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 계약, 진리로 자신의 생명임을 깨달아 마음에 믿음으로 간직하고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굳게 지키는 일을 하라고 주신 것이다. 곧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해야할 사랑의 계명, 새 계명이다. (성경에서 열(10)과 하나(1)는 같은 의미다) (요한17,2-3) 2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 많은 사람이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생명, 빛, 구원이신데 말이다.(요한1,9-11)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깨달음)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하나가 열임을, 열이 하나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 상태가 구원, 진리의 길이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 ‘잘하였다, 착한 종아!’라는 칭찬이 없다. 하나로 다섯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를 다섯으로 가지면 모세 오경, 율법이다. 이 종은 그 율법, 그 다섯을 잘 다스려, 그 다섯으로 다른 차원의 다섯을 깨달아 열로 갖고, 그 열이 하나임을 깨닫는 일을 다시 해야 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뜻, 사랑을 십계명으로 다섯, 다섯, 두 돌판에 주셨다.(신명4,13) 그 옛 계명과 새 계명, 옛 계약과 새 계약을 뜻한다. 곧 옛 것이 죽음의 법임을 깨달아 생명의 법, 그리스도 안에 새것이 되어야 한다.(갈라3,24-25 2코린5,17)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聖經)을 고이 모셔 놓고는 세상에서 배운 도덕과 윤리의 삶으로 사람들에게서 들은 ‘상선벌악’의 하느님으로 그냥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면 두려움의 신앙을 살 수 밖에 없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 성경(聖經)을 모르니, 사랑 그 하나의 계명을 모르니, 곧 죄인들의 마음 밭에 씨로 오셔서 썩어지시고, 그 길을 잃은 죄인들에게 열매로 하늘의 생명을 주시러 오신 그리스도의 희생, 사랑을 모르니, 두려운 하느님이 된다. 그것이 진리를 벗어난 불의(不義), 죄(罪)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 말씀을 이자로 불려줄, 곧 말씀, 문자 안에 감추어진 실체, 내용인 ‘잃어버린 죄인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랑’, 그 하나를 더 깨닫고 믿게 해 줄 성령(聖靈)께 의탁함이다. 성령께서 끄시는 말씀 나눔의 모임에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 나눔의 모임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구역, 반 모임, 또한 진리의 말씀이 아닌 자신들의 말을 나누는 친목(親睦)의 모임이 되어 버렸다. 올바른 모임, 단체를 찾고, 만들어야 한다.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각자가 받은 한 미나가 자신들의 생명, 구원 이었다. 그것을 ‘깨달으라.’ 주신 것이다. 깨닫지 못해 믿지 못하면 없는 것이다. 그것이 빼앗김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희생(犧牲), 그 크신 사랑을 헛되게 하는 큰 죄악이 된다. ‘다섯 미나’를 갖은 이는 언급하지 않으신다. 건너야 할, 버려야 할, 율법(律法)이기 때문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 ‘한 미나’를 잃어버린, 곧 선악(善惡)의 말로 죄인(罪人)이 된 이들을 구(求)하시는 일을 하시러, 십자(十字)나무에 달리시러 길을 가심이다. 원수(怨讐)는 그 십자가(十字架)의 대속(代贖), 그 주님의 사랑을 새 계명(誡命), 새 계약(契約)으로, 진리(眞理)로 믿지도 의탁(依託)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한 미나’를 고이 묻어둔 사람이다. 깨닫고 믿기 위한 벌이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필리3,18-19)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 보호자이신 천주의 성령님! 저희들의 마음에 충만하시어 믿음을 위한 깨닫는 일을 하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자기부인(버림)이 현세의 순교(殉敎). 독서(2마카베7,1.20-31) 1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 돼지는 부정(不淨)한 짐승이기 때문에~ 참조~(레위11,7) 7 돼지는 굽이 갈라지고 그 틈이 벌어져 있지만 새김질을 하지 않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한 것이다. = 오늘 일용할 양식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받아 들여 새김질, 곧 되새기지 않는, 기억(記憶)하지 않는 그 잘못된 신앙(信仰)을 비유한 것이다. 말씀을 받고도 되새기는 묵상, 기도하지 않는 것, 부정(不淨)한 것이다. 20 특별히 그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 말씀을 늘 되새겨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희망(希望)이 있다는 것이다. 21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 고결한 정신으로 가득 찬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북돋우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 조상들의 언어, 남자다운 용기,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로마4,17-18)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22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23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 - 지기부인(自己否認)이다 24 안티오코스는 자기가 무시당하였다고 생각하며, 그 여자의 말투가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였다. 막내아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임금은 그에게 조상들의 관습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부자로 만들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며 벗으로 삼고 관직까지 주겠다고 하면서, 말로 타이를 뿐만 아니라 약속하며 *맹세까지 하였다. 25ㄱ 그러나 그 젊은이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 자신들에게 절하면- 세상의 명예(名譽), 풍요(豊饒)를 약속한 사탄의 유혹(誘惑)과 같다(루가4,6-7참조) 말씀으로 지기부인(自己否認)이 된 사람만이 흔들리지 않는다. 25ㄴ그래서 임금은 그 어머니를 가까이 불러 소년에게 충고하여 목숨을 구하게 하라고 강권하였다. 26 임금이 줄기차게 강권하자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하였다. 27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몸을 기울이고 그 잔인한 폭군을 비웃으며 조상들의 언어로 이렇게 말하였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나는 아홉 달 동안 너를 배 속에 품고 다녔고 너에게 세 해 동안 젖을 먹였으며, 네가 이 나이에 이르도록 기르고 키우고 보살펴 왔다. 28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29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 순교(殉敎) - 현세에는 지기부인(自己否認)이다. 30 어머니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젊은이가 말하였다. “당신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오? 나는 임금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소. 모세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주어진 법에만 순종할 뿐이오. 복음(루카19,11ㄴ-28) 11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12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 벌이- 일용할 양식으로 주신 그 말씀을 매일 먹고, 마시고, 되새겨,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그 벌이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希望)에 찬 삶을 살아, 이웃(가족)에게도 전(傳)하여 살리는 그 이웃사랑, 그 벌이를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인(주님,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비유하신 것이다. (요한1,9-11참조)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말씀을 먹고, 마시고, 되새겨,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에 찬 삶을 살아 이웃(가족)에게 전하여 하늘의 용서로 살게했다는 것이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 성경(聖經)책을 고이 보관(保管)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사람의 규정(規定)과 교리(敎理), 그 법의 신앙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을 모른다. 두렵고 무서운 하느님으로 오해(誤解)하게 되어있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 창조(創造) 사흗날에 씨의 말씀을 오해(誤解)한 것이다. (창세1,11) 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 빈 땅이 어떻게 씨를 맺겠는가. 그런데 하느님께서 땅에게 ‘씨 있는 과일나무를 그것도 제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냉혹한 분으로 생각한 것이다. 땅(자신)을 위해 씨(예수)가 스스로 들어가 썩어져 열매(구원)를 맺었음을, 그리고 그것을 ‘땅이 맺었다’ 했다고, 하느님께서 해 주신 그 자비(慈悲)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말씀을 되새기지 않았으니 존재(存在)하지 않은 것을 존재하도록 하시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희생(犧牲)시키신 그 하느님의 사랑을 오해(誤解)한 것이다. 22ㄱ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 사랑과 자비(慈悲)의 하느님을 믿으면 용서(容恕)가, 법(法)의 하느님으로 믿으면 심판(審判)이다. 내가 믿는 대로 된다.(마태9,29) 22ㄴ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 모르면 배웠어야지 하시는 것, 깨닫게 해 줄 곳(성령)을 찾았어야지 하시는 것이다. (에페5,15-18) 15 그러므로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16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17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18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 깨달음과 믿음, 구원의 그 이익(利益), 이자(利子)를 주실 성령(聖靈)을 청하고 구(求)해, 그 성령에 취(醉)해야 한다.(요한14,26 1고린2,10참조)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 땅들을 위해, 곧 빈 땅들을 위해 구원(救援)의 열매를 맺으시러, 스스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시려 예루살렘(땅)으로 들어가시는 길이다. ☨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당신으로 충만하게 취하게 하시어 성모님처럼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와 같이 땅(흙인 우리,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가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11ㄴ~13) 사실 루카 복음 19장 11절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비유 하나를 말씀하신 것으로 나온다. 당시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 입성을 바로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제자들 및 청중들이 예수님과 자캐오와의 대화를 듣고 있는 현장에서 미나의 비유가 주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루카19,10),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 및 청중들이 이제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자신들에게 현세적 부귀영화와 로마로부터 정치적 해방과 자유를 찾아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려고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마태오 복음 25장 14~30절의 탈렌트의 비유와 비슷하다. 그러나 화폐의 단위 사용, 등장 인물의 숫자의 차이가 있고, 루카 복음사가만이 사람들이 귀족이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보고를 첨가하고 있으며, 또한 비유가 주어진 시기가 마태오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후이지만, 루카 복음은 입성 직전이라는 것이 두드러진 차이이다. 또한 탈렌트의 비유가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소명과 은사에는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에 대해 충성을 다하면 동일한 상급인 구원이 주어질 것임을 강조한 반면에, 미나의 비유는 최종적으로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기회를 선용한다면, 그 선용한 결과에 따라 상급도 차등있게 주어질 것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비유는 예수님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주신 다른 비유인 것이다. 이 비유에서 '귀족'에 해당하는 '안트로포스 유게네스'(anthropos eugenes; a men of noble birth)에서 '유게네스'(eugenes)는 '좋은'(good)을 의미하는 접두어 '유'(eu)와 '출생', '태생'을 의미하는 명사 '게노스'(genos)의 합성어로서 '태생이 좋은'(well-born), '고귀한 혈통'(of noble raw)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어떤 특정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는 가상 인물이다. 귀족이 먼 고장으로 떠나가 왕권을 받아 올 때까지는 아직 임금이 아니다. 여기서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느님께 가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음, 즉 그의 부재(不在)를 의미한다. 귀족이 가는 목적은 왕권을 받아 다시 오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오려고'에 해당하는 '휘포스트렙사이'(hypostrepsai; to return)는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다'는 의미를 지닌 '휘포스트레포'(hypostrepho)의 부정사로서, 영광과 존귀와 위엄의 본래 지위를 받아 가지고 다시 되돌아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이 용어는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재림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다시 오실 때에는 심판관과 통치자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오실 것이다(마태24,30). 한편 루카 복음 19장 13절의 '종'에 해당하는 '둘로스'(dulos; servant)는 '둘루스 헤아우투'(dulus heautu; his servants)에서 나온 말로서, 귀족이 부른 종들이 자기 휘하에서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종들임을 나타낸다. 원래 '둘로스'(dulos)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노예'를 가리키며, 여기서 '자기자신의'(heautu; his)가 첨부된 것은 오직 주인만을 위해서 살아야 됨을 보여 준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또는 모든 하느님 나라의 백성을 가리키는데,이들은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복음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재능에 따라 차등을 두어 종들에게 탈렌트를 분배한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귀족이 열 종들에게 각각 한 미나씩 균등하게 배분해 주었다. 또한, 두 복음서에서 각각 다른 화폐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탈렌트'는 '미나'(mina)의 화폐 단위보다 더 높다. '탈렌트'는 6,000 데나리온의 가치이고, '미나'는 100데나리온의 가치이므로, '미나'는 '탈렌트'의 60분의 1정도이다. 여기서 귀족은 종들에게 그것을 주면서 '벌이를 하여라'고 말한다. '벌이를 하여라'에 해당하는 '프라그마튜사스테'(pragmateusasthe; occupy; put the money to work)의 원형 '프라그마튜오마이'(pragmateuomai)는 '사업하다'라는 뜻으로서 상업적 거래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단어이다. 귀족은 한 미나를 종들에게 주며, 먼 고장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그때까지 이 돈을 활용해서 사업을 하여 이윤을 남기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장사, 사업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 귀족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 암시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있을 것에 대한 암시로 이해한다. 마태오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는 차등있게 탈렌트가 주어진 것을 통해 사람에 따라 소명과 은사의 차이가 있음을 나타낸 반면에, 루카 복음의 '미나의 비유'는 동일하게 한 미나씩을 줌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신 것을 나타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백성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재능과 시간을 잘 활용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이윤을 최대한도로 남기기를 원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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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19. 연중 33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잘하였다, 착한 종아!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 곧 마지막 길에 들어서시기에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최후의 날 도래에 앞서는 유예 기간을 예고하십니다. 교회의 기간에 해당하는 이 시간은 제자들에게 시련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모든 이가 알고 있던 사건, 당신의 탄생 시점에 전개되었던 사건을 예로 비유 말씀을 건네십니다. 이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헤로데 대왕의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유다와 사마리아 임금으로 공적인 임명을 받기 위하여 로마를 방문했을 때, 적대자들이 이를 가로막을 목적으로 오십여 명의 유다인들을 로마로 파견하자, (결과적으로 ‘임금’이라는 칭호는 받지 못하나, ‘분봉왕’ 또는 ‘제후’가 되어) 돌아와서 복수극을 펼쳤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예로, 이제 예수님이 당신의 왕권을 부정하려 안간힘을 쓰는 유다 지도자들의 반대 앞에 서십니다.
당신의 부재 기간 동안, 예수님은 종들에게 당신의 ‘재산’을 맡기십니다. 미나(Mina)는 그리스의 화폐 단위로서,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로마 화폐 데나리온의 절반 정도의 가치였습니다(참고로, 예수님 시대에는 세 가지 화폐가 통용되었습니다. 세금 납부 등 공적인 생활과 관련해서는 로마의 화폐 콰드란스/데나리온/탈렌트, 상거래 등 일상생활에서는 그리스의 화폐 렙톤/스타테르/미나/드라크마, 종교 생활에서는 유다의 화폐 세켈 등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십일조나 헌금은 세켈로만 헌납해야 했기에, 예루살렘 성전 주위에 ‘환전상’이 들어서 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종들은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든 충실함과 항구함을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부재중인 것처럼 보일 때도, 다시 말해서 불안하고 초조한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한 미나가 작은 가치의 화폐를 말하고 있는 만큼, 작은 일에도 정성을 보여야 하는 의무가 부여됩니다. 예수님의 ‘재산’은 사람들의 눈에 아주 작은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종들에게 계산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종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했는지보다는, 당신이 맡기신 미나가, 곧 하느님의 말씀이 어떤 성과를 보였는지에 관심을 쏟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종들의 열정과 능력에 따라 열매를 맺었으며, 작은 일에도 성실한 종들의 모습은 인정되고 보상됩니다. 다만 한 사람, 안전에만 급급한 나머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종, 이 종은 그 탓을 주인에게 돌리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주인님은 냉혹한 분이어서…,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바리사이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자랑하는 율법을 간직만 할 뿐,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삶으로 율법을 열매 맺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최후의 판관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은 마냥 두려움에 싸여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말씀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며 살피는 기다림이어야 함을 배우고 새깁니다.
오늘 하루, 주님께서 우리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맡겨 주신 말씀이 많은 결실을 낼 수 있도록 기도하며 힘쓰는, 활기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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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13
11월19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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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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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예수회 김정현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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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목숨 걸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선택합시다!>
놀랍도록 당당하고 위대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가 담긴 마카베오서는 읽을 때마다 큰 슬픔과 동시에 큰 감동을 제게 선사합니다.
용기 있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신앙으로 인해 생사의 기로 앞에 놓여있는 아들들에게 비굴하게 살아남지 말고 장렬하게 목숨을 바치라고 격려합니다.
적대자들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지 말라고 계속 귓속말을 던집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목숨 걸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요구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니 더 이상 참혹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어머니가 바라보는 눈앞에서 아들들 한명 한명이 처참한 몰골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제 유일하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아들만 남아있었습니다.
총명하고 신앙심 깊은 아들들과 어머니의 모습에 적대자들도 감동을 받았던지 갖은 회유와 미끼를 던집니다. 조상들의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세운 우상을 섬기기만 한다면, 부자로 만들어주고 벗으로 삼으며 높은 관직까지 주겠노라고 약속하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라면 안쓰럽고 측은한 마음에 적대자들에게 막내아들만큼은 살려달라고, 적어도 대는 이어야 하지 않겠냐고, 엄마인 나만 죽이고 막내아들은 목숨을 살려주라고 사정사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감한 어머니는 전혀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아들들을 향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 뭉클하게 만들며, 오늘 우리를 엄청 부끄럽게 만듭니다.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2 마카 7,23)
“이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2 마카 7,29)
오늘날 우리의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참으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하고 애지중지합니다. 미래를 위해 엄청난 교육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공경하는 법은 조금도 배우게 하지 않습니다. 깊은 신앙에로의 안내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우리 자녀들은 하나하나 하느님을 등지고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저 한치 눈앞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경외할 줄 모릅니다. 그저 이 세상의 좋은 것들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멋진 어머니의 찬탄할만한 신앙고백에 귀를 기울이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 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2 마카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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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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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앞에선 방관도 불순종이다 >
찬미 예수님!
1944년 겨울,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지옥이었습니다.
나치와 헝가리 화살십자당원들이 유대인들을 매일 밤 다뉴브강으로 끌고 가 총살하던, 그야말로 '죽음'이 왕 노릇 하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조르조 페를라스카'라는 이탈리아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공로로 '스페인 보호증명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안전하게 스위스로 도망칠 수 있는 '편도 티켓'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남을 완벽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차역으로 가던 중, 유대인 아이들이 화물칸에 실려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 사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이 그의 발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안전한 생존'을 버리고 '거룩한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기차에서 내려, 이미 대사가 도망가고 텅 비어버린 스페인 대사관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스페인 영사 대리'라고 선언하는, 목숨을 건 '거짓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무 권한이 없었지만, 마치 자신이 모든 권한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미나'(보호증명서 한 장)를 가지고 위대한 '장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스페인 대사관 명의로 '안전 가옥' 8채를 확보하고, 수천 장의 가짜 보호증명서를 발행했습니다. 심지어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나치 최고 장교 앞에서도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나는 스페인 영사, 호르헤 페를라스카요! 이들은 스페인의 보호 아래 있소!" 그는 기차역으로 달려가 이미 아우슈비츠로 떠나려던 기차 문을 열고 사람들을 끌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나' 하나로 5,200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귀족이 종들에게 똑같이 '한 미나'씩을 맡기고 왕의 자리를 받으러 떠납니다. 두 종은 그 한 미나를 가지고 "가서 장사하여" 열 미나와 다섯 미나를 남겼습니다. 그들은 주인을 '왕'으로 믿었기에, 그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거룩한 모험'을 감수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종은 그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는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루카 19,20-21)라고 변명합니다. 그의 죄는 장사를 하다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또 다른 부류가 나옵니다. 바로 "우리는 저자가 우리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루카 19,14)라고 외친 시민들입니다. 이 둘은 다른 죄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정확히 같은 죄입니다.
주인을 '무서운 분'으로 오해하여 두려움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이나, 주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대놓고 반역한' 시민이나, 그 본질은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학교에 가라"는 뜻을 주었을 때, "싫어요!"라고 대들며 밖으로 나가는 자녀나,
"네..." 하고 대답만 하고 방구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자녀나,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불순종은 똑같습니다. 하느님, 곧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나의 '왕'이시라면, 내 눈앞에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상황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분의 왕권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1964년 뉴욕,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아파트 앞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최소 38명의 이웃이 30분 넘게 창문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거나 비명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나설 필요가 없어서',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38명의 방관자들은 세 번째 종과 똑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이라는 수건에 '인간의 도리'라는 미나를 싸서 숨겼습니다.
우리는 매일 이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전한 방관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거룩한 모험'을 감수하는 신앙인이 될 것인가. 구약의 에스테르를 보십시오. 그녀는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어 궁전 안에서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하만이 유다 민족을 몰살하려 할 때, 모르도카이는 그녀에게 "그대가 이럴 때에 침묵을 지키면... 그대와 그대의 아버지 집안은 멸망할 것이오"(에스 4,14)라고 경고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에스테르는 '안전한 생존'을 버리고,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나아가는 '거룩한 모험'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미나'(왕비의 지위)를 가지고 '장사'하기로 결심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제가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에스 4,16)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안 살리는 죄책감. 어쩌면 이 죄책감이야말로 우리를 잠에서 깨우는 '천사'의 목소리일지 모릅니다. 2014년,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구출하라'는 '미나'(직분)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남기고 가장 먼저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미나'를 수건에 싸 들고 구명정에 올랐고, 수백 명의 생명은 바다에 잠겼습니다.
이와 정반대의 선택을 한 선장이 있습니다. 1985년 11월, '전재용 선장'은 남중국해에서 원목을 싣고 항해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망망대해에서 작은 어선에 타고 있던 96명의 베트남 보트피플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국제법상 그들을 구조하는 것은 선장의 '재량'이었습니다. 회사의 규정은 '그냥 지나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연료도 시간도 돈도 낭비되고, 혹시라도 전염병이나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선장이 져야 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칠 모든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굶주림과 공포에 질려 손을 흔드는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안 살리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항로를 돌려 96명 전원을 구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나'(선장의 권한)를 가지고 가장 위대한 '장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나의 안전, 나의 이익, 나의 규정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수건이 아닙니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불순종이다. 신앙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거룩한 모험'을 매일 떠나게 하는 나침반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한 미나'는 무엇입니까? 장사는 모험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 어떤 '장사'를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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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셋째 날은 은행 업무와 운전면허증 갱신 업무를 보았습니다. 은행 일은 금방 끝났지만, 면허증 갱신은 쉽지 않았습니다. 준비물이 여러 가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진 2매, 출국 항공권, 해외 체류 비자’가 필요했습니다. 항공권은 인쇄본으로 제출해야 했습니다. 또, 갱신과 적성검사를 위해서는 신체검사도 받아야 했습니다. 혼자 감당하기에 버거웠지만, 안내 직원이 친절하게 도와주었습니다. 제가 헤매고 있으니 직접 프린터를 이용해 항공권도 출력해 주었습니다. 그분의 친절함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한국의 행정 시스템은 참으로 빠르고 효율적이었습니다. 대기표를 뽑으면 예상 대기시간이 화면에 표시되고, 번호가 뜨자마자 창구에서 신속하게 처리해 줍니다. 신청 후 5분 만에 현장에서 새 운전 면허증을 바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앞면은 한글, 뒷면은 영어로 되어있었고, 유효기간은 2035년까지입니다. 앞으로 10년은 걱정이 없습니다. 그날 저를 도와준 안내 직원과 창구 직원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이들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실 것입니다.
저녁에는 전에 함께했던 본당의 형제님들과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전의 추억으로 돌아갔습니다. 전 신자가 함께 기차를 타고 성지순례를 갔던 일, 도보로 수리산과 절두산을 향해 순례하던 기억, 또 천수만으로 가족 캠프를 갔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태풍 곤파스로 성당 흙이 아파트 쪽으로 밀려 내려갔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큰일났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서울시와 구청의 도움으로 산을 깎아내어 안전하게 정리했더니, 그 자리에 멋진 앞마당이 생겼습니다. 당시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구청 교우들을 위해 미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알게 된 직원들이 성당 마당 정비에 좋은 방안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땅에 지금은 십자가의 길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잡목으로 뒤덮였던 곳이 이제는 아름다운 정원이 되어, 성모의 밤 전례도 하고, 사순시기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도 드린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버려진 땅이 은총의 공간으로 바뀐 것은, 결국 믿음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주어진 일에 성실한 사람,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면허증 갱신 창구에서 묵묵히 일하던 직원,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본당을 위해 봉사하는 형제님들처럼 말입니다. 어제는 엘아자르의 순교 이야기, 오늘은 일곱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의 믿음과 헌신은 ‘부활 신앙’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을 때, 그때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라는 문을 열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쟁으로 정해지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절대평가의 나라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예수님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는 탁월한 재능을 세상을 위해 썼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한 믿음의 길을 알았다면 더욱 복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 다른 하나는 남을 돕기 위해 주신 것이다. 발이 둘인 것은 하나는 나를 위해 걷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게 다가가기 위해 있다. 눈이 둘인 것은 하나는 나를 바라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아름답게 보기 위해 있다. 귀가 둘인 것은 하나는 내 유익을 듣고, 다른 하나는 남의 어려움을 들어주기 위해 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나 자신을 위해 쓰되, 그 절반은 이웃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자신만을 위해 쓰는 재능은 하느님 나라의 열쇠가 되지 못합니다. 밤하늘이 별빛으로 아름답듯이, 우리의 선행과 봉사가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작지만 성실한 우리의 손길이, 누군가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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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은 ‘미나의 비유’입니다. 어떤 귀족이 길을 떠나며 종 열 명에게 한 미나씩을 맡깁니다. 다른 종들은 그것을 가지고 저마다 이익을 냈는데 한 사람은 그냥 수건에 싸서 두었습니다. 주인, 곧 하느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냉혹하게 거두어 가시는 분으로 여겨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마구 다루시는 냉혹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오해가 그 종의 마음을 위축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을 올바로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한 어머니를 만납니다. 율법이 금지하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임금 앞에서 그 어머니는 자신의 일곱 아들을 이렇게 격려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2마카 7,22) “나는 모른다.”, “내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아들들에게 하느님을 분명하게 가리켜 보입니다. 사람과 만물을 만드신 온 세상의 창조주를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막내아들을 이렇게 격려합니다. 확신 가득한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7,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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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11-28: 열 미나의 비유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과 책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미나”, 곧 은총과 재능, 시간과 소명이라는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우리가 받은 은총을 봉인해 두는지, 아니면 열매를 맺도록 투자하는지가 구원의 열쇠가 된다.
예수님은 먼 나라로 왕권을 받으러 가는 귀족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수난과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을 예고하신다. 그 사이 제자들은 주인에게 받은 미나를 잘 활용해야 한다. 열 미나를 남긴 종은 충실성을 인정받아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는다. 다섯 미나를 남긴 종도 칭찬받는다. 그러나 한 미나를 수건에 싸 두었던 종은 심판을 받는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총을 낭비하거나 묻어 두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열매 맺기를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잘 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7절) 작은 것에 충실할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큰 기쁨에 참여할 수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비유를 해석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은 우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형제들을 위해 열매 맺으라고 주어진 것이다. 은총을 가만히 묻어 두는 것은 은총을 거부하는 것과 다름없다.”(Homiliae in Matthaeum, 78) 오리게네스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땅에 씨앗을 묻어 두고 물도 주지 않아 열매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Commentarium in Lucam, 39) 즉, 은총은 ‘소유’가 아니라 ‘사명’이다.
사목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은총과 달란트를 주셨으니,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소명을 성실히 수행하며, 사회와 교회 안에서 봉사해야 한다.”(34항) 또한 교리서는 말한다. “각 그리스도인은 받은 은사를 공동선에 이바지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이는 교회의 성장과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함이다.”(1937항 참조)
우리는 각자 다른 시간, 재능, 재물, 관계라는 미나를 받았다. 그것을 단순히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과 봉사로 열매 맺어야 한다. 우리가 작게라도 하느님을 위해 충실히 행한다면, 주님은 그것을 크게 축복하신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너는 네게 맡겨진 미나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가 각자 받은 은총을 통해 이웃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며, 하느님 나라 확장하기를 원하신다. “주님, 제가 받은 은총을 봉인하지 않고, 열매 맺는 삶으로 응답하게 하소서. 작은 일에 충실하여 큰 기쁨에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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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벗과 함께>
루카 19,11ㄴ-28 (미나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늘 벗과 함께>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루카 19,12-14)
홀로 먼 길을
떠난 벗을 그리며
나에게 남긴
벗의 고운 자취를
정성스레
품고 다듬어야지
벗의 자취를
억척스레 지우려는
거칠고 메마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벗을 지워버린
나 홀로의 삶을
그들에게 빌붙어
구걸하지 않으리라
벗과 다시 만나는 날
언젠가 꼭 오리니
벗이 나에게
내가 벗에게
서로에게 남긴
아무도 앗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자취를
뜨겁게 느끼며
흔들림 없는 믿음과
늘 새롭게 솟는 희망과
활활 타오르는 사랑으로
오롯이 하나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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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큰 죄’입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덧붙여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루카 19,11ㄴ-14)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루카 19,20-23)”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당신을 메시아로 선언하시려고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생각은 예루살렘 입성 때에도 이어졌습니다.(루카 19,38)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일은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또 ‘지금’과 ‘재림’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이 있다는 것과 당신의 재림 때까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2) 12절과 14절은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구절입니다. 헤로데 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물려받은 사람은 ‘아르켈라오스’입니다.(마태 2,22 당시 유대인들은 그를 몹시 싫어해서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로마 황제에게 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비유의 재료로 사용하셨는데,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간 간격은, 아르켈라오스가 왕권을 받으려고 로마 황제에게 가 있었던 시간으로 표현되었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한 자들의 불신은, 백성들이 아르켈라오스를 반대한 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은, 아르켈라오스가 왕이 된 다음에 반대자들을 처형한 일로 표현되었습니다(루카 19,27).
3) ‘미나의 비유’의 핵심은 ‘세 번째 종’입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라는 말은, “주인님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분이어서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원금만이라도 잘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종은, 주는 것도 없이 빼앗아가기만 하는 주인이니, 원금을 잃으면 대단히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생각했습니다.>
주인이 세 번째 종에게 한 말은, “무슨 일이든지 했어야 한다.” 라고 꾸짖는 말입니다. 원금을 잃는 것이 무서웠다면, 은행에 넣어 두었어야 했다. 그러면 돈벌이를 한 것보다는 적은 금액이 되겠지만 이자라도 붙여서 되찾았을 것이다.” 라는 주인의 말은, 그 당시의 은행 제도를 바탕으로 한 말일 뿐이고, 오늘날의 은행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세 번째 종의 죄는 ‘아무것도 안 한 죄’입니다. 주인이 그 종을 처벌한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왜 죄가 되느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좋은 일’(선행)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악한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루카 10,31-32)
4) 만일에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이 돈벌이를 하다가 실패해서 원금까지 잃었다면? 그래도 주인은 그들을 칭찬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결과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노력’을 보시는 분, 즉 어떤 업적을 남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를 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실패를 겪을 수도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사도들이 배척당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마태 10,14) 사도들에게 주어진 책임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사도들의 책임이 아닙니다.
<만일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 복음을 모르는 채로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지 않은 우리의 책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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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느님의 나라,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열 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과 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캐오는‘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기다렸습니다. ’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한 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망가뜨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랜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 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노의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의 하느님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뿌리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소중히 여기는 하루를 기대합니다. 어떠한 큰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가19,26). 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되는 심판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신자들이 신앙심이 없다고 넋두리하고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신앙을 키워주지 못하고 일깨워 주지 못한 저의 잘못을 자책하는 오늘입니다. 대접을 받기에 익숙해지고 독불장군으로 고착되는 오늘을 봉헌합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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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안토니오 에피파네스 통치자의 모진 박해는 유대인들에게 내려집니다. 마카베오서 저자는 일곱 아들들과 그 어머니의 순교 장면을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통치자의 심문을 간단합니다. 율법서에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엄염인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사형이라는 규칙을 세웠기 때문에 먹으면 배교하는 것이고 먹지 않으면 순교가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로서 아들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끔찍한 것이고 극도의 고통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들이 용감하게 순교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마카베오 저자는 그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특별히 그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 고결한 정신으로 가득 찬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북돋우며 그들에게 말하였다.”(1마카 7,20-21)
마태오는 탈렌트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의 조건에 대해 설명하는 데에 비해 루카는 미나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 귀족이 왕권을 받기 위해서 먼 고장으로 떠나기 전에 열 종에게 가각 열미나를 나누어 주며 돌아 올 때에 셈을 바치라고 합니다. 그가 돌와 왔을 때에 첫째 종이 나서서 말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루카 19,16) 주인은 그 종에게 칭찬하며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17절)
둘째 종은 주인에게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18절)라고 말하고 주인은 다시 그 종을 칭찬하며 말합니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19절)
그러나 다른 종은 와서 수건에 싸두었던 미나를 건넵니다. 그러자 주인은 종에게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22-23절)
그리고 주인은 그 종이 가지고 한 미나 마저 열 미나를 가지고 있는 종에게 뺏어서 주라고 이르며 의미 있는 한 마디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6절)
의미를 해석하자면 성실하게 열미나를 벌은 종에게는 은총이 더 가고 노력하지 않은 자는 가진 능력마저 녹슬고 못쓰게 된다는 뜻이지요. 한번 정도 못이기는 척하고 돼지고기 한절음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그렇게 막히고 미련할 수가 없습니다. 귀족에다 미모까지 갖춘 한 여인은 하느님과 동정을 약속한 것 때문에 모진 박해와 순교의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세상 말대로 ‘가만히만 있어요.’라는 속삭임이 우리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구태여 나가서 신앙인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이 세상은 모를뿐더러 오히려 그 사람을 현명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한 미나를 더 보내는 것은 사실 문제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성실했어도 한 미나 그대로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의 앞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어야 합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고 어리석다 해도 진실함과 성실함을 지킬 때에는 추호도 없는 강직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또한 믿음의 어려움이면서도 믿음의 소중함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내 스스로의 게으름이나 과소평과로 무뎌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부족하고 한계가 있다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내가 이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며 하느님 앞에서 자비와 사랑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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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다시 오실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시키십니다.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루카 19,15)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오려고 먼길을 떠나기 전, 열 종에게 한 미나씩 나누어 주고 벌이를 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왕권을 받고 돌아와 종들과 셈을 하려는 참입니다.
이 장면은 사람의 아들의 날, 우리의 임금이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와 셈을 하시게 될 구원과 심판의 날을 보여줍니다. 그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마련해 주셨던 영적 물적 자원들을 어떻게 성장시켜 열매를 맺었는지 그분과 함께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루카 19,22)
주인이 이른 대로 성실히 벌이를 해온 종들은 주인에게 착한 종이라 불리지만, 주인이 두려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종은 악하다는 호통을 듣습니다. 그들은 주인(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시각과 왜곡된 자아상으로 은총과 선물을 허비한 이들입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자신이 받은 여러 자원을 성실하게 돌보고 키워 주인께 되돌려 드리는 이에게는 더 큰 축복이 기다립니다. 순종과 헌신, 믿음과 사랑에 대한 보상입니다. 반면 받은 것조차 경시와 불평으로 묻어버리고 주인이 냉혹하다고 원망하기까지 한 이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을 정도로 모조리 다 잃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일곱 형제의 순교 이야기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2마카 7,20)
사랑하는 일곱 아들을 한 날에 다 잃은 어머니가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주님께 대한 희망"입니다. 그녀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주님을 경외함이라 믿기에 아무리 처절한 상황이 닥쳐도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임금은 그에게 조상들의 관습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부자로 만들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며 벗으로 삼고 관직까지 주겠다고 하면서 ... 맹세까지 하였다."(2마카 7,24)
임금의 회유책에서 무엇이 느껴집니까?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의 가치와 대립하라고 악이 내거는 유혹은 재물, 세속의 행복, 권력자의 측근이 갖는 잇권, 관직입니다. 시대와 장소, 문화가 달라도 어쩜 이리 복사판처럼 꼭 같은지요!
오늘의 주인공인 어머니와 일곱 아들은 임금의 회유를 비웃으며 극심한 고문과 잔인한 형벌을 견디어 내고 끝내 순교로써 하느님께 신의를 지킵니다. 하느님으로 부유하고 천지의 창조주를 벗으로 삼는 복락은 고작 세속의 부자가 되고 권력의 중심에 서는 일과 비교할 가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 열정과 신의와 헌신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한 미나를 열 미나, 백 미나로 불려서 온 세상을 감싸안고도 남을 축복으로 확장시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운 우리는 그러라고 초대된 이들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손에 소중히 쥐어 주셨던 한 미나가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마다 힘들고 버거운 인생길에서 힘껏 애쓰며 살아온 우리에게 주님께서 반드시 "잘 하였다, 착한 종아!" 하실 겁니다. 축복에 축복이 더하여 주님으로 부요하고 충만해진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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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인과 맺는 관계성>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벌거숭이로 알몸이 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초겨울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선물이요 은총임과 동시에, 그에 따른 과업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선물인 ‘미나’는 주인이 ‘벌이를 하라고 맡긴 것’(루카 19,13 참조)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인은 돌아오면 그 소명을 실현하였는지의 여부에 따라 심판을 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왕권을 받으러 먼 고장으로 떠난 어떤 귀족’은 예수님의 승천을, ‘다시 돌아옴’은 재림과 종말을 암시해줍니다. 이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과 맺는 관계성’에 있습니다. 곧 주인에 대한 ‘믿음’과 ‘순명’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행실을 ‘순명’으로 채워나가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거나 혹은 자신의 안정과 보존에만 머물지 말고, 선으로 활용하고 충실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에 충실하고 있는지,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에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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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루카 19,13)
주님!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사랑이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 크신 힘에 감사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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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하고 성실한 삶>
-하느님의 나라는, 삶은 선물이자 과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17,8)
“가을의 자연은 하루하루 날마다 읽어야 할 내용으로 가득한 살아 있는 책, 성경책입니다.”
이래서 가을은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입니다. 무엇보다 평생교육의 하느님 공부에 매일 <미사전례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개신교 예배에 참석했던 어느 자매의 너무 “싱거웠다”라는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바로 복음의 미나의 비유가 답을 줍니다. 마태복음의 탈렐트의 비유와 흡사합니다. 비유를 통해 깨닫는 바, 하느님의 나라는, 삶은 선물이자 과제라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죽어야 끝나는 삶입니다. 끝까지 하루하루 “한결같이” 살아감이 중요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말합니다.
“생각하기를 포기하면 살아가는데 급급해진다.. 그러니 삶이 사납게 닥쳐올수록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우리 믿는 이들이 생각할 바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믿음과 희망을 두고 늘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미나의 비유가 우리 삶에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이 한번뿐이 없는 소중한 한미나의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흡사 복음의 미나 비유에서 주님으로 상징되는 주인에게 한 미나씩 선물로 받은 사람들과 같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루하루 최선의 능력을 다해 착하고 성실히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예외없이 내 삶의 선물에 대해 헴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주인이신 주님과의 결산이 시작됩니다. 죽음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최종 결산해야 할 최후 심판의 날일 수 있습니다만, 아무도 그 마지막 시험 날짜를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미나로 열미나를 남긴 첫째 종은,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보답을 받고,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남긴 종 여기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습니다. 좌우간 나름대로 역량을 힘껏 발휘하여 소정의 업적을 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바 업적의 양이 아니라 각자 삶의 충실도입니다.
문제는 한 미나 그대로 가져온 사람입니다. 삶의 선물에 대한 과제 이행이 전무한 종으로, 그의 생각이 얼마나 오해로 왜곡되어 있는지 우리의 <하느님관>을 비춰보게 됩니다. 주인을 주님으로 바꿔 읽으면 더욱 실감나게 이해될 것입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좋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얼마나 소심하고 어처구니 없는 오해와 착각으로 점철된 자폐적 하느님관인지요! 정말 하느님을 신뢰하고 희망하면서 긍정적 낙관적 열린 사고로 모험적 투신의 삶을 살면서 최선을 다했다면 이런 과제 불이행이나 불행한 심판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과 전혀 상관없는 무관한 관계와 더불어 과제 이행 역시 전무했으니 얼마나 무지한지, “이 악한 종아”와 더불어 주님의 혹독한 질책과 심판이 뒤따릅니다. 주님 탓이 아니라 순전히 무지와 태만으로 스스로 자초한 자업자득, 심판의 재앙임을 깨닫습니다.
“저자에게서 한 미나를 빼앗아 열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대로 영적 현실에도 적용되는 부자는 더욱 부자되고 빈자는 더욱 빈자가 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 나름대로 긍정적 낙관적 사고로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고 끊임없이, 한결같이, 끝까지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삶이 얼마나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는 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미나의 비유는 우리가 착하고 성실한 삶을 살았는지 또는 불충한 삶을 살았는지 거울처럼 비춰주면서 회개로 이끌어 줍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일곱 아들의 순교와 이를 목격하고 마침내 순교한 어머니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이자 결론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와 희망을 둔 어머니와 일곱형제와 일관된 순교적 삶이었는 감동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역시 모전자전 그 어머니의 그 아들들이었는지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특별히 그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고결한 정신으로 가득 찬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순교적 삶을 그대로 보고 배운 일곱 아들들, 참으로 선사받은 선물인생을 순교적 삶의 과제 이행에 참으로 충실했던 감동적 사람들입니다. 역시 우리 삶의 부족과 나약함을 거울처럼 비춰주면서 우리를 회개에로 이끌어 줍니다.
복음의 주님 종들이 한 미나를 선물로 받앋듯이 우리 역시 날마다 똑같은 하루를 선물로 받습니다. 똑같은 하루의 선물이지만 하루가 끝났을 때 결과의 성과는 참 다양할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앞에서 회개와 더불어 하루하루 날마다 받은 하루의 미나를 헴바치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날 때 당신 모습에 흡족하오리다.”(시편17,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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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창세기적인 여인>
오늘 우리가 읽은 마카베오서는 어제 위대한 노인에 이어 위대한 어머니의 신앙심에 관해 들려주는데 저는 이 어머니를 창세기적인 여인이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ㅠ“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녀에게 일곱 아들은 하나도 그녀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섯 아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어도 막내아들만은 내 아들로 남겨두지 않고 막내마저 하느님께 바치며 이렇게 얘기한 것입니다.
창세기적 여인과 창세기적 믿음은 존재의 시작을 이렇게 믿고, 이렇게 소유 없이 가난하며 이렇게 종말론적 희망을 지닙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부모에게서 생겨났어도 하느님께서 부모를 빌려 나를 나게 하셨다고 믿는 것이요, 내가 자녀들을 생산한 것이 틀림없어도 나는 나의 몸을 그분 창조의 도구로 내어드린 것밖에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가난할 때 부모와 자식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모든 애착에서도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마카베오서의 창세기적 여인의 위대함은 종말관에서도 나타납니다. 오늘 마카베오서는 창세기적 여인의 입을 빌려 종말론적인 희망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창조하시는 분이 구원도 하시는 겁니다. 사랑 없이 불장난으로 애를 생산한 인간은 낳기만 하고 버리기도 하지만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의 하느님은 당신이 낳은 생명을 내버려 두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내 구원하실 거라고 우리 신앙은 창세기 여인처럼 믿습니다.
우리 미사 감사송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데 감사의 두 굵직한 이유가 바로 창조와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선으로 창조하시고 정의로 책벌하셨으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비로 구원하셨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동안 감사드릴 것이 많고도 많겠지만 나의 창조와 나의 구원에 대해 굵직히 감사드릴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창세기적인 믿음이 있어야만 이럴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창세기적인 여인에게서 도전도 받고 자극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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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루카 19,23)
<봉사자의 자세!>
오늘 복음(루카 19,11ㄴ-28)은 '미나의 비유'입니다.
미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요 선물이지만, 이는 또한 우리가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하는 은총(선물)이라는 것,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은총)을 잘 활용해서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받은 것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루카 19,24)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봉사자의 자세'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는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봉사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건설의 봉사자들, 교구장 주교의 명을 받아 파견된 본당 사목자를 도와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의 봉사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봉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기쁨과 성실과 겸손'입니다. 능력과 잘남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봉사는 하느님의 힘(성령의 힘)으로 해야 하고, 또한 함께 하는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사울의 뒤를 이을 봉사자(임금)로 다윗을 뽑으실 때, 다윗은 이사이의 아들 중에서 막내였고, 양을 치는 소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처럼 눈에 들어오는 대로 겉모습(능력)을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셨습니다. 많은 예언자들과 열두 사도들의 경우처럼, 주님께서는 오히려 약한 이들, 부족한 이들을 당신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때가 때이다 보니 봉사자로의 부르심을 받는 이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 부르심에 성모님처럼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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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께
받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잠시 맡기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신앙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이며
교만이 아니라
충실함입니다.
하느님께
멀어진 사람은
아무 것도
나누지 않습니다.
나눔은
서로를 살리는
생명의 길임에도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우리가 가진
것입니다.
각각의 종에게
주어진 미나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과 재능,
기회를 의미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은 맡겨진
은총과 재능을
충실히 사용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은총을 우리의
두려움 속에
묻어두지
않는 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충실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능성의
존재이며,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할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두려움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우리가
가진 것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한 미나를
받은 종이
그것으로 열 배를
만든 것처럼,
우리가 가진
재능과 선행,
작은 노력이
실천으로 이루어지면
큰 결과로 이어집니다.
열 미나의 비유는
하느님께
받은 것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한다는 교훈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시간과 마음을
이웃들과 기쁘게
나눕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심고,
무엇을 어떻게
거둘 것인가를
묻고 실천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두려움 속에
묻어두지 않고
사랑과 용서를
진정 살아내는
오늘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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