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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6: 3-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의 훈계가 먹혀들지 않을 때에 우리는 점점 더 나은 권위에 그 훈계를 부탁하게 됩니다. 최종적인 권위에 부탁하여 훈계하여서도 듣지 않을 때 그냥 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로마서 초두에 있는 말씀처럼 그 상황 자체가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종 권위자로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듣지 않고 자기들의 길을 향해 맥진 합니다.
1. 본문 3절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입니다.
1) 비록 모세가 악하고 불결스런 상태에까지 세상이 타락하여 도저히 더 이상 더 악해질 수가 없을 정도로 되었다고 전에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에 잠겨있는 하나님의 보복이 단지 가혹하다기보다는 훨씬 더 혹심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하려고 모세는 하나님 자신을 말씀하신 화자(話者)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들의 죄악이 너무도 비등해서 도저히 치유될 희망마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남겨 둘 필요성이나 이유가 전혀 없다고 선언하심으로 더욱 더 그 선언에 확고함을 기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세상이 지금 우리가 단지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무서워하는 하나님의 노여움의 무서운 본보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격분한 마음으로 경솔하게 하신 것이 아니며 또한 그들의 죄악을 보다 더 무섭게 내리시는 것은 더구나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해 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체 세상을 한 기록만 남겨두고 모두 멸망시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급히 서두르신다고 비난하는 것을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들이 인간의 죄에 대하여 보복하시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이 잔인하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불평하지 못하게 하려고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의 인격으로 세상의 타락이 도저히 용서될 수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어떤 치료 방법으로도 절대로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선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히브리인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모세가 사용하고 있는 그 말을 (나단)이라는 말의 어근에서 파생시키고 있는데 그 말은 ‘칼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근거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마치 칼이 칼집에 꽂혀 있는 것과 같이 그분의 영이 인간 몸에서 더 이상 포로로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다는 의미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유대인들 가운데 문제시되고 있는 그 말이 (둔)이라는 말의 어근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인데 그것이 어느 것보다도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흔히 ‘재판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고 때로는 ‘소송을 제기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근거하여 상이한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그 구절을 설명하기를 하나님이 더 이상 그분이 영으로 인간을 다스리시는 수고를 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에서 재판관의 역할을 하시기 때문인데 우리가 옳은 것을 추구하는 이성으로 우리를 일깨워 주고 계실 때에 그런 역할을 하십니다. 루터는 자신의 습관에 따라 그 말을 외적인 사법권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외부적인 사법권을 선지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행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족장들 가운데 어떤자가 한 집회에서 ‘우리는 이제 소리쳐 외치는 것을 그쳐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께서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을 지치게 하는 일로 적당치 않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독창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확실한 공상으로 성경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들을 단지 여호와께서 마치 이 세상의 고집불통의 비뚤어진 성질을 다루는 데에 진력이 나신 것처럼 그 복수를 현재의 것으로 통보하고 계시는 것을 지금까지는 세상을 귀중하게 다루어 오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형벌을 보류하고 있는 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분은 인간들을 향하여 진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만약 위협으로나 온화한 징계의 전례를 가지고 그분이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부르고 계신다면 그것을 오직 인간을 위하여 그렇게 애쓰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수세기 동안을 이미 세상과 분투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도 차이가 없이 도리어 더욱 악화 일로에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칠 대로 지친 것처럼 그분은 전혀 더 이상은 세상과 겨루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를 불러서 회개하게 하시면서 그들과 오랫동안 승강이를 벌여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홍수가 그 논쟁의 끝을 초래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적으로 루터의 의견을 배격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인간들의 통탄스런 죄악을 아시고 선지자들의 수고가 헛되게 버려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선언은 그런 특별한 경우에만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세상의 팽배하고 있는 도저히 치료 불가능한 고집에 대하여 그분이 비난하고 계신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치 그분이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보복의 행위가 인간과 겨루는 계기를 단절시키지 않았다면 그 분쟁은 계속적으로 지속될 것이며 절대로 끝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은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2)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더 쟁론을 한다고 해도 전혀 그들에게 유리한 점이 없게 되는 이유를 부가시켜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영을 인간의 육신적인 성품에 정반대 되는 위치에다 두고 계시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바울은 선포하기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라고 했습니다(고전2:14).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이성적으로 능력이 결여되고 있는 육신과 하나님의 영이 논쟁하는 것은 헛수고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이름을 불명예의 표로서 인간들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표현 방법을 곧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적용을 영혼의 열등한 부분에만 국한시키는 자들은 굉장히 기만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모든 면에서 망쳐져 있으며 인간의 이성도 그의 모든 감정이 왜곡되고 있는 것 못지 않게 봉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체가 육신적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안 것은 우리 인간이 중생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시 영적인 사람이 되기 전에는 전체 인간이 자연히 육신적인 것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모세의 말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그 말들이 하나님 편에서는 책망과 동시에 서글픈 불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정신으로 모든 다른 피조물들을 능가했어야 됩니다.
그러나 올바른 이성에서 이탈해 있는 인간은 야생동물들과 거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하고 부패한 정신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계십니다. 그들의 잘못으로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았으며 지금은 더욱 악화되어 진정한 인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짐승들에 거의 가까운 정도로 타락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그들은 창조된 결과대로 참된 인간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우발적인 잘못이라고 암시하고 있으며 인간이 이 세상에서만은 맛을 즐기며 지각이 그의 불능이 되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가 육체적인 것은 이것 때문이다’ 라는 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로 하나님은 그 분 자신이 지정해 놓으신 질서가 완전히 방해를 받아서 그분의 형상은 육신으로 전환되었다고 불평하고 계십니다.
3)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 는 말씀에서 락탄시우스와 기타의 고대 작가들은 그들의 생각에서 너무도 졸렬한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생명의 기간이 이 기간 내에 제한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사용되었던 언어가 누구든지 개인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세상에서 주어진 회개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감탄할 만한 자비가 나타나고 있으니, 즉 비록 그분이 인간의 죄악에는 진저리가 나셨으나 그래도 거의 1세기가 넘는 긴 세월동안 극단적인 보복을 진행하실 것을 연기해 오고 계셨다는 면에서 그분의 긍휼이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순되어 보이는 점은 노아가 350세까지 살고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대홍수시대부터 계산하면 350년간을 살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방주에 들어간 날까지 그는 꼭 600세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20년을 더 찾겠습니까? 유대인들은 대답하기를 이 년도들은 인간의 죄악들이 계속 증가되는 결과로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그의 나이가 500세라고 말할 때는 그가 실제적으로 그 지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긍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기간의 시작과 그것의 끝을 감안하고 있는 이 말의 방법은 아주 흔한 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5세기 생애 가운데 대부분의 기간이 지나갔으므로 그는 거의 500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그렇게 500세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본문 4절은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입니다.
1) 본문 4절 초두에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에서는 이 세상에 팽배해 있었던 모든 죄악들을 상술하고 있는 가운데서 모세는 특별히 이곳에서 한 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거인들이 몹시 폭행과 포악성을 휘두르며 다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 시대 사람을 가리켜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개인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고 추정합니다. 그는 물론 다른 나머지 사람들보다 더 힘이 세고 그들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하면서 자신들을 불합리하게 그리고 헤아려 보지도 않고 추겨 올렸던 자였습니다. 히브리어 명사 (네피림)이라는 말에 관하여 그것의 기원은 ‘넘어지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나팔)에서 유래했다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법가들은 이 말의 어원학에 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그들은 일반적인 체격을 훨씬 능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자들은 그들의 거구(巨軀)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보기만 하면 놀랐으며 그래서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또 그들의 출중함에 놀라서 사람들이 의기소침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안해졌다고도 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억수같이 퍼붓는 비와 맹렬한 비바람이 유사성을 지니는데 그것은 폭풍우와 억수같은 비가 격렬하게 내려서 들판을 황폐시키며, 폐허로 만들 듯이 이 도적떼들도 세상에 파멸과 황폐를 초래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사실상 그들이 특이하게 체구가 큰 것은 말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건강한 자들이라는 사실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밖에 우리는 그 동일한 말이 체구가 굉장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인정합니다. 그 체구는 가나안을 정탐하러 간 자들을 간담이 서늘하게 했던 거구들이었습니다(수13:34). 그러나 모세는 그가 언급하고 있는 자들을 여기서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체구가 크니만큼 거기에 비례하여 그들의 강탈성이나 정욕의 지배력도 동일하게 클 것이라는 것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문맥에서 분사 (베감)이라는 말은 삽입된 것인데 강조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해석가들의 잘못을 동일하게 범하고 있는 제롬은 이 구절을 가장 나쁜 방법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간 후에도”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더우기’ 또는 ‘그리고 이때에’ 라고 말한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세가 거기에 거인들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나서 다시 추가하기를 그런 난잡한 성행위로 태어난 자들로 구성된 다른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해석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뒤범벅이 된 성행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과 혼합되었을 때에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도 역시 그 결과이었습니다. 만약 가인의 자손들 가운데 그런 불법이 성행했다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타락이 여기서부터 더욱 더 분명하게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거룩한 씨가 그와 똑같은 부패로 인하여 불결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전염성은 대단히 지독해서 하나님의 성소를 형성했어야 했던 적은 가족들을 통하여 멀리 번져갔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 죄악에 대하여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그 당시 이 거인들은 보다 선재한 기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후에 이 잡혼(雜婚)으로 출생된 자들도 그들의 생활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2)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시대’ 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먼 옛날’ 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마치 지나친 방탕과 제멋대로 정욕을 불태우면서 최초로 포악성과 세상에서의 권세를 행사했던 자들이 바로 이 인종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석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부터’ 라는 표현을 ‘세상 앞에서’ 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올람)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자들은 이것을 잠언이나 속담식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홍수 직후 시대에서는 전혀 그들과 같은 자들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의 표현은 보다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 전체를 요약하면 그들은 잔인한 폭군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과 구별되어 있는 특수 계급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최후의 잘못은 교만이었습니다.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고 모든 멍에를 팽개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분수에 어긋나게 자신들을 자랑하며 거만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거만스런 행동이 결국은 하나님의 모든 제도를 뿌리쳐 버리고 그분을 멸시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인간에 대해서는 경멸적이고 잔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게 복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이 인간을 대하여 정중하게 처신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부가하기를 그들은 ‘유명한 자들’ 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 말을 함으로써 그들이 자기들의 죄악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죄악을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는 강도들이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일반 사람들보다는 무엇인가 월등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서 그처럼 명성과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웅이라는 굉장한 칭호를 가지고 잔인하게 그들의 통치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포에게 상해를 입히고 압박하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권세를 부리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세상에서 최초로 나타난 귀족 계급이었습니다. 다시 반복하거니와 누구든지 전통있고 지저분한 가계에서 자신을 너무 지나치게 즐기려고 이런 귀족 계급이 형성된 것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으로 자신을 높이 추켜 올리는 귀족 계급이었습니다.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 그 자체가 정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특이한 선물로 장식해 주신 자들이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나게 유명해지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계급이 있어서 구별이 있어야 되는 것도 유리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야망이 언제나 사악하고 더욱 더 나아가서 그 야망이 포악한 횡포성을 동반할 때에 더욱 사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횡포성은 약자(弱者)를 더욱 더 멸시하는 권세를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 죄악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악한 자들이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명예를 취득할 때 악을 더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면에서 더욱 더 악랄하게 자행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건방지게 연기와 같은 자기의 허무한 명성을 사랑하며 뻐길 때에 사태는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들을 간교한 방법으로 기만하려고 궁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망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그 진리를 의심스런 추측으로 표현하면서 시인들은 그런 올무에 걸려서 그 거인들에 관하여 우화적인 표현을 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거인들이 땅의 아들들이라고 불려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 거인들이 그들 조상들의 자리를 계승하지도 않고 곧장 그를 통치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