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괄의 난' 진압한 정충신과 금남로, 논공행상을 생각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성지 금남로는 '이괄의 난' 평정에 큰 공을 세운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의 군호 금남군(錦南君)에서 따온 것이다.
인조는 이괄의 반란군이 임진강까지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계획을 바꾸어서 충청도 공주로 도주했다.
도원수 장만은 반란군이 한양에 입성한 바로 다음 날, 운명을 건 승부를 무악재의 안산(鞍峴, 지금의 안산)에서 벌이기로 한다.
방어사 정충신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정충신은 반란군은 올려다보며 싸워야 하지만 진압군은 도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므로 지형의 이점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했다.
정충신은 연서역(延曙驛, 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을 통과해 안현에 도착했다.
정상으로 내달려 봉수대를 지키는 병사를 생포했고, 평상시의 봉화(烽火)를 올리도록 해 이괄의 진영에서 안현이 탈취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전황은 밑에서 위쪽으로 공격하는 반란군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과 총탄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설상가상 바람의 방향마저 바뀌었다.
반란군 쪽으로 서북풍이 불면서 반란군 진영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안현을 향해 기어오르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괄은 고작 60여명 정도의 기병만 거느리고 이천(利川) 쪽으로 달아났다.
정충신이 관군을 이끌고 이천에 당도했을 때 상황은 끝나 있었다.
반란군이 이괄 등 지휘부 아홉 명을 살해한 상태였다.
'이괄의 난'을 진압한 뒤 정충신은 도원수 장만과 함께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정되고 금남군에 봉해진다.
정충신의 아버지는 광주 향청의 좌수였고, 어머니는 밥 짓는 노비였다.
어머니가 노비인 경우 자식을 노비로 삼는 노비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정충신의 신분은 노비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 정충신은 광주목사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한다.
임시 도절제사로 임명된 권율은 이치웅치전투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를 격퇴해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했다.
권율의 승전 소식을 담은 장계(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를 선조가 머물고 있던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전달한 이가 17세 소년 정충신이었다.
20여일 외로운 사투 끝에 왜군이 득시글거리는 길을 뚫었다.
장계가 도달하지 않았다면 선조는 압록강을 건너 명으로 갔을 것이다.
이치·웅치대첩은 임진왜란 3대 육전(陸戰) 중 하나이다.
웅치전투는 전북 완주군과 진안군의 경계에서 벌어진 전투로, 곡창인 호남을 지킨 가장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이치전투는 전북 완주군 운주면과 충남 금산군 진산면 일대에서 왜군과 싸워 이긴 전투이다(완주군 운주면과 금산군 진산면은 대둔산을 사이에 두고 연결돼 있다).
이후 정충신은 도승지이자 권율의 사위 이항복의 도움으로 학문과 무예를 익혔다.
의주 행재소에서 열린 무과시험에 합격했다.
이항복은 '충신'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선조는 노비에서 면천을 시켜줬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정충신은 광해군의 어명으로 여진족의 동태와 정세를 파악해 보고했다.
북방을 지키는 무관이 되어 여진족의 침략에 대한 방비를 주장했다.
그즈음, 영의정 이항복이 광해군의 계모이자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했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됐다.
정충신은 스승 이항복을 따라 유배지에 동행했다.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 님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
이항복은 유배 가는 도중 철령에서 시조를 읊었으나,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정충신은 다시 등용돼 평안도 만포첨사(滿浦 僉使)로 국경을 수비했다.
만포는 두만강 강변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임진왜란 직전까지 이순신 장군이 만포첨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정충신은 안주목사 겸 방어사로 재임 중에 명(明)과 후금(後金) 사이에서 외교적 중립을 주장했다.
정충신은 여진족이 세운 후금의 힘,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친명배금'을 주장하는 인조반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을 격파했다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고, 충남 서산 일대의 많은 토지를 사패지(賜牌地)로 받아 후손이 서산으로 입향했다.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충신은 부원수(副元帥)에 임명돼 출전했다.
그러나, 정묘호란 직후엔 후금과의 단교(斷交)에 반대했고, 충청도 당진에 유배됐다가 다시 황해도 장연으로 이배됐다.
유배를 가면서도 '친명배금'을 반대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인조는 정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1636년 3월 후금과 단교했다.
그해 5월 정충신은 사망했고, 그가 걱정했던 대로 같은 해 12월 후금은 조선을 침범했다.
광주 양림동 사직공원에는 정충신의 시비(詩碑)가 있다.
"공산이 적막한데 슬피우는 저 두견아 / 촉국흥망이 어제 오늘 아니어늘 / 지금히 피나게 울어 / 남의 애를 끊나니.”
촉의 망제가 나라를 빼앗기고 두견새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차용해 자신의 처지를 적막한 공산, 두견새에 비유했다.
또 촉의 흥망 같은 일은 어느 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경고했다.
우국충정이 진하게 묻어난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금곡리에는 그의 영정을 모신 '금남군정충신영정각'이 있고,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는 정충신의 사당 진충사(振忠祠)가 있다.
정충신은 당진에 유배된 이후 서산 대산에서 은거했는데, 여기에 자신의 묘지를 정했다.
다산 정약용은 1779년, 화순현감이던 부친을 만나기 위해 광주를 지나다 정충신을 떠올리며 다음의 시를 남긴다.
"언제나 광산부를 지나갈 적에는
가슴 속에 정금남(정충신)이 생각난다네 / 신분은 미천했으나 재주는 이순신과 견줄만 했었지 / 옛 사당에는 풍운의 기운 서렸고 남은 터에는 부로들의 전설이 전하네 / 웅장하여라, 서석의 드높은 진산 그 정기 모아 기남자(奇男子)를 배출했구나."
광주의 옛 전남도청 앞에서부터 유동사거리까지의 도로는 정충신의 군호를 따서 금남로(錦南路)이고, 옛 전남도청 앞 민주광장에 연한 서석로에서 북쪽 독립로와 맞닿는 충장로 5가까지는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시호를 딴 충장로(忠壯路)이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당시 전국 의병 총사령관으로 활약하지만 역모의 누명을 쓰고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옥사했을 때 김덕령은 29세였다.
광주 사직공원에는 억울한 심정이 담긴 김덕령의 시도 새겨져 있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핀 꽃 다 붙는다 / 저산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 이 몸의 연기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이괄(1587~1624)은 용맹한 장수였다.
그의 휘하에는 날랜 병사와 칼솜씨가 빼어난 항왜(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인들) 무리까지 있었다.
인조반정 당시 이괄은 큰 공을 세웠다.
인조반정 당시 김류(金瑬)가 반정군을 지휘하기로 돼 있었는데, 거사 당일 약속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괄이 임시 대장을 맡기로 했는데, 김류가 뒤늦게 나타나면서 '이괄 대장'은 없던 일이 됐다.
그런데도 공신 책봉에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무관 출신이라 문관들이 낮춰봐서다.
그럼에도 이괄은 부원수 겸 평안병사 직을 부여받고는 국경 방위 임무에 충실했다.
그런데, 이괄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누군가 고자질했다.
집권 이후 몇몇 공신은 더 많은 권력을 누리기 위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반역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의금부도사가 평안도로 가 이괄의 아들을 역모죄로 체포하려고 하자 목을 베고 반란의 기치를 들었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상황에서 그가 반역할 것이라는 공작을 하자 이에 반발해 진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괄의 난'이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반란군으로 인해 한양이 점령당한 일은 조선 역사 최초였다.
왕은 충청도 공주까지 도주했다.
이로 인해 집권층은 물론, 백성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또한, 이 사건으로 조선의 북방 군사 방어 체계가 무너졌다.
'이괄의 난' 패잔병 일부는 후금에 항복했고, 불안한 조선 내정 상황을 알려 호란을 야기했다.
올바른 논공행상(論功行賞)은 지도자의 기본 역량이다.
소수가 공(功)과 상(賞)을 독점하겠다고 내부에서 물고뜯어서는 정권도 망하고 나라도 망한다.
#정충신 #이괄의난 #안현 #권율 #이항복 #이치웅치 #친명배금 #금남로 #충장로 #김덕령
ㅡ사진 윗줄 왼쪽은 정충신의 초상화. 무인들은 흉배에 해치나 호랑이 문양을 주로 썼다. 서산 소재 진충사 소장.
ㅡ사진 오른쪽 위와 가운데는 말 안장(鞍) 모양을 한 산이어서 이름 붙여진 안산(鞍山)과 봉수대. 평안도에서 위급한 신호를 알리던 봉수대의 연결 봉수대가 위치했던 곳이 안산이다. 2024년 10월 초, '이괄의 난' 진입로를 따라 안산에 올랐었다.
ㅡ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바라본 금남로(오른편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