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머니가 45세에 늦둥이로 태어났다. 그러니
위로는 딸만 3의 누나가 있을뿐이다 큰 누나는 27년생 나하고
19살 차이이다. 내가 낳자마자 결혼을 하였다 그래서 조카하고
6개월의 차이로 와삼촌이 되어 대접을 받는다.
그때에만 해도 남아선호 사상에 늦둥이로 노산으로 아들을 낳았으니
이거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은 것이다 . 누나들이 사랑도 대단하다.
막우에 막네누나 하고는 노상싸움이다 3살차이 .....
그 어려운 농촌에서 외가집으로 가서 겨우 살림을 차릴 정도로 가난한
살림에 아들에 대한 기대는 대단하신것이다 누나들은 초등학교도 않보네고
나는 고등학교까지 그리고 스스로 서울로 대학을 다니겠다고 올라 왔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니 20세전후 어머니는 67세쯤 되는것 같다. 내가 서울로
올라와서 학교도 다녀야지 한참 공부를 할때 어머니는 이미 나이가 든 세대이다.
겨우 내가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소의 문선공으로 일을 하여 몇 푼 않 되는 돈을 어머니
에게 가져다 준 것뿐이다. 평생을 누가 돈을 벌어서 어머니손에 가져다 준분이 없다.
나는 겨우 직업도 없이 학교도 중단을 하고 방황을 한 시대이다.
아들이 돈을 벌수있는 나이도 아니고 하니 평생을 나주 장으로 영산포장으로 찬 바람을
마다하시고 산넘어 들을 건너 몇 푼 않되는 돈을 벌기 위하여 고생하였건만 시골서 살았어도
농사와 식물 그리고 동물을 키워 돈을 마련하였을것이지만 ,서울로 올라와 버렸으니 어머니는
이거 막막한 현실이다.
한번은 나주로 가을철에 내려가 양말 쉐타 등을 가지고 내려가셔서 쌀 보리 김장김치를
몽땅 물물교환으로 가지고 오셔서 한 겨울을 잘 보낸기억이 있다. 평생을 선비를 만나 가계에
도움을 못받으신 어머니 .........
유일하게 기대건건 막네 아들인데 ,아직어려서 공부를 하겠다고 그해 기나긴 겨울을 어머니는
병환이 나시고 나는 인천교대시험을 공부를 차디찬 마포 꼭대기에서 시험공부에 매진하였다.
그어려운 병환이 나서도 병원을 한번 모시고 갈 형편이 않 되었다. 나의교육중에 어머니는
아침에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눈물이 하늘에서 쏫아지는 듯한 그 빗불처럼 .........
그래도 나는 그어려운 고통속에 인천교대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교수님께
어머니가 돌아가실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니 얼른 집으로 가란다 집에 오니 어머니는 생을 마감할려는
긴 숨을 들이마시고 뱉는다. 인천의 제물포역세서 집으로 오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
마지막으로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교사가 된다는 말슴을 전하고 그토록 중학교 고등학교의 뒷바라지를
하시다가 평생을 아들하나 믿고 살다가신 어머니에게 한맺힌 눈물한번 닦아주지를 못한 불효자식입니다
첫댓글 동구리님~
그 시절의 어머님들은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 가셨지요
호강한번 못 해보고 힘든 삶만 사시다가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원통한지요
어머님이 많이 그립겠습니다
시인님 고맙습니다
제가 가장어려울때의 삶의 형태를 그린것입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제일어려운 시기 ,어찌 잊을수가 있을까요 ?
내인생에 제일 후회하고 가슴아픈 사연입니다
지나고 보면 어느 자식들이나 다 불효
같아요 사후에 효자는 없는 듯 싶네요
어려운 시절 누구나 엇비슷한 삶이 아니
였나 싶습니다. 가슴에 묻어있는 슬픈
사연들 이제는 점점 몸도 늙어가니 더욱
서럽네요
지금도 가슴이 아픔니다
지금이야 툭하면 병원에 가지만, 그러한 어려운 가난 ,돈이 뭐이길레
고생만하시다가 저세상으로떠난 어머니가 무척이나 죄송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시절에는 다 그랬답니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셔서 훈륭하신 문학사
꿈을 이루어 가셔서 어머님이 지켜주식덕분이실겁니다.그때는 다 그렇게 힘들게 살았던것 같습니다.
어머님생각에 글을 어떻게 쓰셨는지요.
저역시도 짠한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납니다.
꼭 버티시고 건강지키시고
그꿈 꼭 이루시길 빕니다.
그대에는 농촌에서 살수가 없어 서울로 올라와소 고생한 현실입니다
세상에 어머니에게 병원을 한번 모시고 가지를 못했으니, 가슴이 무척이나 아픔니다
벼8ㅇ원으로 가셨으면 돌아가시는 않했을것인데 ......
어머니는 아랫목에 누워 계시는데 나는 차디찬 책상에 앉아 시험공부를 하여 합격을하여
초등학교의 교사가 될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선배닝 은 효도를 잘하신겁니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교사의길을 택하셨고
공직에 계셨으니 ᆢ 아주 잘하신 겁니다
아마도 아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평생을 고생하며
살으셨을것입니다 그래도 그고생으로 교사 ,서울시 공직을 한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어머니의 고생의 산물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늘 돌아보면
아쉬움 그리움으로
얼룩진 것들이 우리들
삶이 였지요.
선배님은 부모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셨으니 행복한 분이십니다.
정말로 평생을 옆을 바라보고 살지를 않았습니다
그냥 앞만 보고 노력을하고 삶의 방향이 어디인지 ?
그러한 면에서는 지금은 아내는 없지만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정말 눈물나네.......
아 어머님 그리가시면 아들은 어쩌라고......
고생만 하시다가 가시다니........
울 어머니 생각도 나네......아..스바... 왜 울리는겨..................................................
가슴이 아프네요....미어지네요.......
죄송합니다
나의 한스러운 서울에서 제일어려운 시기를 한번 글을 쓴다는게 .....
저도 어머니 임종을 못 지켰지요 오빠네서 언니네로 가셔서 이년 치매로 고생하시다 끝내 막내딸인 저를 못 알아 보신채 가셨지요
임종 못 본것이 지금도 한이 됩니다
부모님은 한없이 자식들을 걱정하고 사랑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럴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