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읽기의 잔상(殘像) >
- 정영인 -
모든 교육의 기초는 독서산(讀書算)이다.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뇌를 명민하게 하는 가장 값싼 쉽고 검증된 방법은 읽는 것이라 한다. 읽기는 뇌를 관장하는 뇌의 좌측 측두엽에서 나타난다. 문자로 된 자료를 처리하면서 글자로 단어를, 단어로 문장으로 문장을 이해하면서 그 정보를 전송하면 신경세포를 긴장하게 만든다. 따라서 두뇌로 하여금 더 열심히 해야 하겠다는 자극을 준다고 한다. 교육학 박사 미국 UCLA 매리언 울프 교수는 “읽기는 이해력과 통찰력에 필요한 독특한 일시 정지 버튼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읽기의 잔상(殘像)은 최소한 5일간 지속 된다. 이런 현상을 근육 기억에 빗대 ‘그림자 활동’이라고 부른다. “말하기 전에 생각하라. 생각하기 전에 읽어라.” “오늘의 리더(reader)가 내일의 (leader)가 된다.”고 마가레트 퓰러가 말했다.
이젠 코로나19로 인해 벌어진 온라인 수업은 가뜩이나 부족한 기초학력을 퇴화 시키고 있다. 최소의 문제해결력도 저하되고 있다. 약의 사용서 설명도 이해 못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 더구나 기초학력을 평가하지 않는 교육 현실은 그 현상을 더욱 부추긴다. 그러니 학력의 양극화 현상은 더더욱 심화 될 것이다.
어느 심리학 교수가 조사한 가장 잘 쉬는 방법, 최적의 휴식 방법이 무엇이냐를 조사를 했다. 무려 58%로 1위인 것은 ‘독서’였다. 책만 읽으면 잠이 오는 사람이 많으니 독서가 최상의 휴식 방법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더구나 한국인의 독서량은 OECD 국가 중에서 하위를 차지한다. 동남아 유명한 리조트의 지배인이 한 말이 있다. 한국인 투숙객은 금세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가방에 책이 없는 사람은 한국이라는 것이다. 아마 소변을 보면서 핸드폰을 보는 사람도 한국인 것이다. 한 일본 기자는 책 한 권을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닌다. 그렇다고 자주 그 책을 보는 것도 아니다. 누가 물어 보았다. 잘 안 보는 책을 왜 가방에다 넣고 다니냐고. 그는 말했다. 자투리 시간에 단 한 페이지만이라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도 대답을 했다.
조선시대 이덕무는 자신을 간서치(看書痴)·책벌레라 했다. 그는 독서 방법을 9가지로 구분했을 정도이다. 이덕무가 말하는 책을 읽는 방법을 ‘구서(九書)’라 했다. 구서는 ‘독서(讀書), 간서(看書), 초서(鈔書), 교서(校書), 평서(評書), 저서(著書), 장서(藏書), 차서(借書), 포서(曝書)이다. 첫째, 독서(讀書)는 책을 읽는 것이다. 둘째, 간서(看書)는 눈으로 읽는 것이다. 셋째, 초서(鈔書)는 베끼면서 읽는 것이다. 넷째, 교서(校書)는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며 읽는 것이다, 다섯째, 평서(評書)는 평하면서 읽는 것으로 교서보다 더 적극적인 독서활동이다. 여섯째, 저서(著書)는 글짓기를 하는 것이다. 일곱째, 장서(藏書)는 책을 보관하는 일이다. 여덟째, 차서(借書)는 책을 빌리는 일이다. 아홉째, 포서(曝書)는 책을 햇볕에 말라는 일이다.
그보다 더 문제는 우리나라 문맹률은 0.2%로 매우 낮지만,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들의 문서독해능력 비교하니, 국제 성인 문해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258.9점으로 조사대상인 22개국 중 꼴찌를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글을 읽을 줄 알지만, 책을 읽지 않아서 실질 문해율이 낮게 나온 것으로 본다. 글보다 영상으로 습득하면서 글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 없이 정보의 결과만 나오다 보니, 문자언어와 음성언어가 함께 발달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이다..
다양하고 많은 양의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인터넷의 장점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하지 않는다. 인터넷 시대에 정보를 따라 흘러 다니는 우리는 더 이상 깊이 있는 사고를 하지 않고 그에 따라 뇌 구조까지도 물리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집중력 저하나 건망증을 호소하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하기 어려워하고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 또한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읽어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나 청맹과니나 다름없다. 어느 세계적인 석학은 앞으로 문제는 문해력에 있다고 한다. 문해력은 국가발전의 기본력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인천시에서는 ‘우리는 읽·걷·쓰 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 고 있다. 읽고, 걷고, 쓰자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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