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118)
*"탁"하고 친 것도 아닌데 , "억"하고 죽은 사연 ?
"손님은 아직도 주무시지 않고 책을 읽고 계셨습니까 ? "
"어서 들어 오세요. 잠이 오지 않아 책을 읽고 있던 중입니다.
주인 양반이야 말로 여태까지 잠을 자지않고 계셨소 ?"김삿갓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을 맞았다."책을 읽으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 "
주인은 김삿갓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담배를 한 대 권한다.
"한밤중에 주무시지도 않고 책을 열심히 읽고 계시는 것을 보니,
손님은 대단하신 선비인가 보군요?""대단한 선비는 아니지만, 책을 좋아하는 편이지요 ....
그런데 노형은 주무시지 않고 계셨소 ? ""걱정스러운 일이 있어 잠이 와야 말이지요."
"걱정스러운 일이라뇨 ? 댁에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 "
"실은 내 형님께서 사정이 매우 딱하게 되셔서 ....... "그리고 주인은 잠시 머뭇 거리다,
"손님은 선비시니까 말씀인데,지금 사경(死境)에 처해 있는 내 형님을 좀 도와 주실 수는
없을까요? "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랐다.
"형님께서 사경에 처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
어떤 사정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지, 사정 한번 들어 봅시다."
그러자 주인은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 주는 것이었다.
주인의 친형인 양중태(梁中泰)라는 노인은 어느 날 자기 집 사랑방에서
마을 친구인 김명주(金明珠) 라는 노인과 장기를 두다가,
한 수만 물러 달라느니 안 된다느니 하고 말다툼을 벌였다.
늙은이 들이 장기를 두다가 흔히 벌이는 언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일진이 사나운 탓인지, 양 노인이 상대방을 밀치거나 때린 것도 아닌데,
상대방 김 노인은 혼자서 노발대발 하다가 제 풀에 쓰러져 ,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그러니까 양 노인은 본의 아니게 살인범으로 몰려,
지금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그 이야기를 듣고 측은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탁>치니 <억>하고 죽은 것도 아니고, 흥분해서 제 풀에 죽은 것을,무슨 살인죄가 된단 말이오?"
"누가 아니랍니까,그런데 김 노인의 친구로서, 내 형님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훈장놈이 하나 있어요.
그 놈이 고소장을 교묘하게 써가지고 관가에 무고를 하는 통에,
내 형님은 꼼짝 없이 살인범으로 몰려,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중이랍니다."
"고소장을 어떻게 썼기에 생사람을 살인범으로 몰았다는 것이오 ?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구려.""고소장 사본이 여기 있으니까, 한번 읽어 보아 주시렵니까 ? "
김삿갓은 주인이 내 민 고소장을 읽어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고개를 끄덕 거렸다.
<양중태는 김명주 노인이 자기와 말다툼을 하다가 쓰러져 죽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 입니다.서로간에 치고받고 하는 육박전을 하지 않았다면,
단순한 말다툼만으로 김 노인이 죽었을리 만무 합니다.양중태는 김명주가 뇌출열로 죽었다고 말하지만,
아무런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면 멀쩡하던 사람이 절로 죽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 "
훈장이라는 사람은 양 노인을 이렇게 살인범으로 교묘하게 몰아붙이고 나서,
끝으로 다음과 같은 절묘한 글을 한 구절 써넣었다.
<毒酒在房 不飮不醉 (독주재방 불음불취)>
독한 술이 방안에 있어도 마시지 않았다면 취하지 않을 것이고
<腐繩繼牛 不引不絶 (부승계우 불인불절)>
썩은 새끼로 소를 매놓아도 잡아당기지 않으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글은, 양 노인이 어떤 식으로든 김노인을 죽게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소장의 내용은 글을 직업으로 밥을 먹는 훈장이 쓴 것으로 ,그럴듯한 주장이었다.
글의 주장의 논리대로 라면, 양 노인은 살인죄를 모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생사람을 살인범으로 몰아 버리는 데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음 - ...글이라는 것은 참으로 마술 같은 것이로구나 ! "
주인은 <마술>이라는 말을 듣고,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란다.
"네 ? 마술이라뇨 ? 뭐가 마술 같다는 말씀입니까 ?""아, 아니올시다. 나 혼자 지껄여 본 말이오 ....
아무튼 이 고소장만 읽어 보아서는 주인장 형님이 살인죄를 면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주인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사색이 되면서 한탄하 듯 말을 한다.
(119편 계속)
방랑시인 김삿갓 (119)
*<억>하고 죽은 이유, 油盡燈盞 無風自滅
"훈장이라는 자가 무슨 원수가 졌다고, 아무 죄도 없는 내 형님을 잡아 먹으려고 그러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어요 .....
선생 ! 그 놈이 글재주로 내 형님을 옭아매려고 하는데, 무슨 대응책이 없겠소이까 ?"
김삿갓은 고개를 갸웃거리며,"글쎄올시다. 훈장이라는 사람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죄를 뒤집어쓸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 "
"물론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도 무슨 수를 쓰든지, 죄가 없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해야 하겠는데,
도무지 신통한 방도가 없습니다. 억울한 내 형님이 살아날 수 있도록
선생께서 좋은 방도를 꼭 좀 강구해 주소서. 그 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겠소이다."
김삿갓은 훈장이 썼다는 문제의 고소장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 고소장은 생사람을 잡으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훈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양 노인과 아무리 원수간이기로 생사람을 이렇게 까지
모함할 수 있을까 ?")
김삿갓은 낯도 코도 모르는 훈장이 은근히 괘씸하게 여겨져 주인에게 이렇게 말을했다.
"이 고소장을 읽어 보면 형님이 틀림없이 살인범으로 몰리게 되어 있군요.
그러니 이쪽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진정서를 사또 앞으로 빨리 제출하도록 하시오.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형님이 무슨 곤욕을 치르게 될지 모르는 일이오."
주인은 그 말을 듣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지며, "매우 어려운 부탁이지만,
그 진정서를 선생께서 좀 써주실 수는 없겠소이까 ? " 하고 말했다.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중대한 일이니까, 진정서를 내가 써드리지요."
그리고 사또에게 올리는 진정서를 다음과 같이 쓰기 시작하였다.
우선 < 나이 든 노인은 지나치게 흥분하는 경우 뇌출혈을 일으켜 쓰러지는 일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실이다>는 내용을 누누히 강조해 놓고 나서,
끝으로 훈장의 고소장 내용과 같은 방식으로 아래와 같은 절묘한 글을 한 구절 적어 넣었다.
<油盡燈盞 無風自滅 >(유진등잔 무풍자멸)
<晩秋黃栗 不霜自圻 >(만추황율 불상자기)
기름이 마른 등잔불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절로 꺼지고
늦가을의 밤송이는 서리가 오지 않아도 절로 터지는 법이다.
훈장이 고소장에서 <썩은 새끼로 소를 매놓았어도 끌어당기지 않으면 새끼가 끊어지지 않는다>
하였기에 , 김삿갓은 <등잔불은 기름이 마르면 바람이 불지 않아도 불이 절로 꺼지는 법이다>라고
훈장의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다.
김삿갓 같은, 시문(詩文)에 능한 천재가 아니고서는 얼른 생각해 낼 수 없는 절묘한 반론이었다.
주인은 그 진정서를 읽어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선생께서 이렇듯 절묘한 진정서를 써 주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내 형님 집이 여기서
이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날이 밝거든 선생을 형님 댁에 모셔다 놓고,
나는 그 길로 읍내로 달려가 사또 앞으로 진정서를 제출하고 오겠습니다.
선생은 아무 데도 가시지 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꼭 좀 기다려 주시옵소서."
이리하여 김삿갓은 다음날 아침, 객줏집 주인장과 함께 양 노인 집에 가게되었다.
양 노인의 집은 백 석지기 농사를 하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살인죄로 옥에 갇혀 있는 관계로, 집안은 상갓집처럼 썰렁하기 이를데 없었다.
김삿갓은 가족들을 이렇게 위로하였다."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상만사는 사필귀정이라,
주인 양반은 머지않아 무죄 방면으로 집으로 돌아오시게 될 것입니다."
사또가 만약 바보가 아니라면, 양 노인은 틀림없이 무죄 석방이 되리라고 김삿갓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 예측은 보기 좋게 들어맞아서, 양 노인은 진정서를 제출한지 사흘만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양 노인은 동생으로부터 자세한 애기를 들었는지라,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고 눈물을 흘리며,
"죽은 목숨과 다름없던 저를 선생이 살려 주셨으니, 세상에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 "
하고 생명의 은인처럼 고맙게 여기는 것이었다.김삿갓은 그날로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양 노인은 한사코 붙잡고 늘어지며 <길을 떠나시더라도 겨울을 지내고 봄이나 되거든 떠나라>며
만류하였다.그러나 김삿갓이 기어코 길을 떠나려고 하자, 양 노인 형제는 어쩔 수가 없었던지
돈 꾸러미 하나를 내밀어 주며, "기어이 떠나시려거든 ,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노자로 써 주옵소서."
하는 것이 아닌가.김삿갓은 일언지하에 사양하였다.
"나는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 진정서를 써드렸을 뿐이지, 사례를 받기 위해 진정서를 쓴 것은
아닙니다. 이 돈은 한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며칠 동안 잘 얻어 먹은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무슨 사례금입니까 ? "그러나 양 노인 형제는 펄쩍 뛰면서,
"틀림 없이 죽게 된 사람을 살려 주셨는데, 저희가 어찌 은혜를 모른 척하겠습니까.
저희들의 성의로 아시고, 꼭 받아 주옵소서." 하며 한사코 되돌려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 꾸러미에는 돈이 얼마나 들어 있습니까 ? " 김삿갓이 물으니, "저희 집 형편이 좋지 못해
겨우 오백 냥만 마련했사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에엣? 오백 냥씩이나 ? "
김삿갓은 펄쩍 뛸듯이 놀랐다. 백석 지기 타작을 한다고 들었지만, 산골에서 오백 냥이라면
엄청난 거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돈 꾸러미를 손수 끌러 오백 냥중에서
오십 냥만 꺼내고, 나머지 사백오십 냥은 양 노인에게 돌려 주면서 말했다.
"노인장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오십 냥만 받아 가지고 떠나겠습니다."
그랬더니 양 노인은 받지 않으려 하면서, 김삿갓에게 돈 꾸러미를 억지로 안겨 주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돈 꾸러미를 길바닥에 내려 놓으며 도망치듯 달아나며,
"남을 도와 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다시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하는 말을 하고, 바쁜 걸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120회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