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21일이면 아산시 전체가 들썩거린다. '
아산시의 음식점과 술집,옷가게들은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아산시 탕정면에 자리 잡고 있는 삼성전자 임직원들의 월급날이기 때문이다. 인구 24만명의 중소 도시에 9500명에 달하는 삼성 직원들과 2만2000명이 넘는 협력업체 종사자들이 풀어 헤치는 지갑은 지역 상권 유지 · 확장의 절대적인 버팀목이 되고 있다.
KTX 천안 · 아산역에서 내리자 삼성전자 액정표시장치(LCD) 단지 인근의 대형 크레인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역사 앞 부지에선 66층짜리 주상복합 빌딩 공사가 한창이었다. 군데군데 도로들에도 확장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공사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건설 현장이 많이 눈에 띄었다.
◆포도밭이 첨단 산업단지로아산시가 군에서 시로 승격된 것은 1995년.삼성전자가 아산시와 인접해 있는 천안에 LCD 투자를 하던 시절이었다. 천안에 초기 LCD 생산단지를 구축했던 삼성전자는 추가 부지 확보를 위해 정부 측에 아산시 탕정면 일대 부지를 산업단지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투자는 곧 이뤄지지 않아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탕정 일대는 포도밭으로 가득차 있었다.
탕정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3년부터.삼성전자는 당시 1단계로 확보했던 75만평 부지에 LCD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탕정에 대한 삼성의 애정은 남다르다. '끓을 탕(湯)'에 '우물 정(井)'을 쓰는 탕정 지역이 LCD 산업에 꼭 맞는다고 해석할 정도다. 유리 기판을 주 원료로 LCD를 만드는데,이 유리 기판을 만드는 과정이 꼭 끓는 물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다.
실제 당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탕정을 세계적인 크리스털 밸리로 만들겠다"며 강력한 투자 의지를 내비쳤다. 이 전 회장이 구상했던 것은 요즘 말로 삼성이 주도하는 '기업 도시'였다. 아파트 1만1400여세대와 학교 9개,공원과 상업시설 등을 지어 신도시를 꾸민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안은 시민단체들이 "기업이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는 것은 특혜"라며 반대해 무산됐다. 삼성전자가 주거지역 개발을 뺀 LCD단지 개발만을 승인받게 된 이유다.
◆해외투자 문의도 봇물현재 삼성전자가 터를 닦아놓은 곳은 모두 140만평으로 수원 사업장(45만평)의 4배를 넘어선다. 이곳에 투자한 금액은 지난해 말 기준 약 13조3000억원.신규로 확보한 부지에 2개 생산라인을 더 건설하면 총 20조원을 투자하는 셈이 된다. 2015년까지 삼성전자가 투자를 마치게 되면 5만명 이상이 추가로 고용되는 효과를 일으킬 전망이다.
아산시의 이문영 공보팀장은 "삼성전자가 들어온 뒤로는 전국 어느 곳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도시에 활력이 넘쳐나고 있다"며 자랑을 늘어놨다.
탕정면 일대에 LCD 단지가 만들어진 뒤 늘어난 인구는 약 4만8000명.탄탄한 구매력을 갖춘 인구의 신규 유입은 지역경제 전반에 훈풍을 몰고 왔다. 아산 지역에서 삼성전자와 협력사 임직원들이 쓰는 돈은 연간 4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소비율이 45% 가까이 되다 보니 아산시 사상 최초(?)로 영화관을 세우기로 했다. 재정도 탄탄해졌다. 삼성이 내는 지방세(2008년 기준 295억원 상당)는 전체 세수의 17%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 경제에 인구와 세수 증대보다 훨씬 큰 효과는 기업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2004년엔 아산 지역에 있는 회사가 1296개사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말엔 1727개사로 431개사가 늘어났다. 아산시 관계자는 "삼성 덕에 LCD 관련 회사들이 속속 모여들면서 중국 업체들까지 투자 문의를 해 오고 있다"며 "요즘은 해외 투자유치 상담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말했다.
◆"서울 하나도 안 부러워요"대부분 서울이나 수원 근무를 생각하고 삼성에 입사했던 사람들은 처음에 사업장 부지가 충청도로 결정됐다는 소식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삼성전자 LCD사업부에서 심리상담사로 일하고 있는 이유인 과장(38)은 "탕정에 사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직접 안 살아 보면 잘 모를 것"이라고 했다.
공기 맑고,회사 가깝고,집값 싸고,교육환경 좋고….이유는 끝이 없었다. 그는 1989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1997년에 천안으로 내려왔다. 천안에서 탕정으로 통근하던 그는 최근 임직원용 아파트 트라팰리스를 분양받아 입주했다. 이 과장은 "이사 온 뒤로 많은 것이 변했다"고 말했다. 우선 막내딸의 아토피가 싹 사라졌다. 천안에 10년 이상 살았지만 딸의 아토피는 잘 낫지 않았다.
하지만 탕정으로 이사 온 뒤에는 아토피 증세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공기가 좋은 덕이라고 했다. 외고 진학이 꿈인 중학교 2학년생 큰딸도 대만족이란다. 집 뒤에 충남외고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기자가 찾아갔던 이 아파트 단지에 마침 이 과장과 같은 동에 사는 주부 석은숙씨(37)가 여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와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마음대로 뛰어놀게 할 수 있어 좋다"며 "아파트 단지에 있는 수영장 헬스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데다 교육 여건도 마음에 들어 이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산시는 삼성전자의 차세대 LCD 공장 투자로 추가 인구가 유입될 가능성에 대비,9곳에 학교 설립 신청을 해 둔 상태다. 기업의 자발적인 투자가 해당 지자체의 지원을 불러일으켜 지방 경제가 함께 발전하는 선순환 구조가 돼 있었다. 아산시 관계자는 "정부가 기업에 지방으로 이전하라고 강요하기보다 기업이 선도적으로 지방 투자에 나설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진정한 지방분권 시대가 열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