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한 사상 최대의 무력
[ 2 ]편에서 언급(言及)한 것처럼 이듬해 발발(勃發)한 독소전쟁(獨蘇戰爭)으로 인해 그 기록(記錄)이 1년 만에 갱신(更新)되기는 했지만 1940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독일과 연합국의 대결(對決)은 당시까지 Hardwear 적(的)으로 역사상 최대(歷史上最大)의 전쟁이었습니다.
일단 병력(兵力)만 해도 양측(兩側) 합쳐 약 600만에 이르렀고 2만문의 야포(野砲), 6천대의 전차(戰車) 그리고 8천여기의 군용기(軍用機)가 전선(戰線)에 배치(配置)된 상태(狀態)였습니다.
↑이동 중인 프랑스 전차, 당시 프랑스는 최강의 육군을 보유했습니다
가공(可恐)할 점은 이처럼 거대한 무력(武力)이 호시탐탐 전쟁(虎視眈眈戰爭)을 벌일 준비(準備)를 완벽(完璧)하게 마쳐 놓고 있었다는 사실(事實)입니다.
분명히 이들은 외교(外交), 군사적(軍事的)으로 휴전(休戰)이나 정전(停戰)을 하지 않은 교전 당사자(交戰(當事者)들이었습니다.
비록 프랑스와 영국은 실전(實戰)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비(對備)는 하고 있었고,
독일은 군부(軍部)가 작전 연기(作戰延期)를 원했으나 히틀러의 명령(命令)이 떨어지면 진격(進擊)을 해야 했습니다.
↑30여 만의 영국원정군도 전개를 마친 상황이었습니다.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셰르부르(Cherbourg) 항(港)에 도착한 영국군 최정얘(最精銳) 콜드스트림 (Coldstream)근위대(近衛隊) 소속 장병들.
제1차 대전 서부전선(西部戰線)의 최고 절정기(最高絶頂期)에도 이 정도의 병력이 동원(動員)되었지만 1914년 전쟁 발발(戰爭勃發) 당시에는 군비(軍備)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던 상황(狀況)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1940년에 양측(兩側)이 무장(武裝)하고 있는 무기(武器)는 제1차 대전 당시와 질적(質的)으로 달랐습니다. 즉, 이 정도의 엄청난 전력(戰力)이 준비를 완벽히 마치고 총성(銃聲)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유래(流來)가 없었습니다.
↑독일도 만반의 준비를 마쳐 놓고 있었습니다
팽팽한 기운(氣運)이 감돌 때, 별다른 상황 파악 없이 구태의연(舊態依然)했던 연합군 지휘부(聯合軍指揮部)와 달리 독일 군부(軍部) 내에서는 엄청난 격론(激論)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핵심(核心)은 바로 공격 방법(攻擊方法)이었습니다.
보다 혁신적(革新的)인 공략법(攻略法)을 주장한 소장파(小壯波) 장군들이 이러한 논쟁(論爭)의 중심에 서있었고 그 중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이 A집단군 참모장(參謀長)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 1887년 11월 24일~1973년 6월 10일)이었습니다.
(출처-alamy) ]
↑혁신적인 공략법을 주장한 만슈타인
만슈타인은 상대(相對)도 충분(充分)히 예상(豫想)하고 있는 지점(地點)으로 아군(我軍)을 몰아넣는 황색 작전을 강력히 비판(批判)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작전을 제시(提示)했습니다.
그는 적(敵)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을 통로(通路) 삼아 강력한 주공(主攻)을 진격(進擊)시켜 연합군을 분리(分離)시킨 후, 배후(背後)에서 대 포위 섬멸(對包圍殲滅)하자는 이른바 낫질 작전(Sichelschnitt)을 제시했고,
회심(回心)의 돌파구(突破口)로 아르덴(Ardennes)을 지목(地目)했습니다.
↑주력을 산악으로 돌파시켜 연합군 배후를 차단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주력(主力)이 이곳으로 통과(通過)한 후 세당(Sedan)을 지나 연합군 배후(聯合軍背後)를 완전히 잘라버리자는 구체적(具體的)인 각론(各論)도 제시(提示)했습니다.
비록 아르덴이 자연 국경선(自然國境線)일 만큼 험준(險峻)한 산악 지대지(山岳地對地)만 사전에 정지(停止)만하면 기갑부대(機甲部隊)가 충분히 진격(進擊)할 수 있다는 결론(結論)을 내려놓은 상태(狀態)였고,
반면 프랑스군의 대비(對備)는 소홀(疏忽)했습니다.
더구나 폴란드에서 구데리안(Heinz Wilhelm Guderian, 1888년 6월 17일~1954년 5월 14일↓)이 이끈 기갑부대는 놀라운 돌파(突破)를 보여주었습니다.
↑바바롯사 작전 초반 구데리안. 제2기갑군을 맡아 진격의 선봉(先捧)에 선 그는 또 한 번 전격전(電擊戰)의 신화(神話)를 세웠지만 폴란드나 프랑스와 달리, 전격전만으로 광대(廣大)한 러시아 대륙(大陸)을 정복(征服)할 수 없다는 사실(事實)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폴란드군이 포위 당했고 포모르스카(Pomorska) 기병 여단(騎兵旅團)의 병력 중 250명이 탈출(脫出)하기 위해 기습공격(奇襲攻擊)을 감행(敢行)했습니다.
↑1939년, 2차대전의 시작이었던 폴란드 침공에서 폴란드군 포모제 기병여단이 펼쳤던 크로얀티(Krojanty) 전투는 이미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후퇴하는 아군을 엄호하기 위해 독일군에게 돌격을 시도했던 폴란드 기병들은 뒤늦게 나타난 적 기갑부대의 포화에 전멸 당했죠.
이 일화는 현장에 있던 이탈리아 종군기자의 손에 의해 각색되어, '폴란드 기병들의 멍청한 돌격'이라는 아주 훌륭한 프로파간다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병이라는 병종이 전장에서 사라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죠.
그러나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를 이끌던 보수적(保守的)인 노장(老將)들은 폴란드에서의 경험(經驗)이 있었음에도 기갑부대(機甲部隊)를 집중 운용(集中運用)하는 전술(戰術)에 대해 여전히 의문(疑問)을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아르덴으로 통과(通過)시키는 것이 불가능(不可能)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황색 작전(黃色作廛, Aufmarschanweisung N°2)으로 작전을 펼치면 불가피(不可避)하게 아군(我軍)의 많은 희생(犧牲)을 동반(同伴)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인정(認定)했습니다.
↑독일 소설가 레마르크의 원작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할리우드는 1930년 극장 영화, 1979년 TV영화로 두 차례 영화화했다. 사진은 두 영화에서 주인공 파울 보이머를 연기한 배우들. 왼쪽부터 오스카 작품·감독상을 받은 1930년작의 루 에어스, 골든글로브 TV영화 작품상을 받은 1979년작의 리처드 토머스.
/IMDB
↑여전히 제1차 대전의 악몽 재현을 우려했던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만큼 독일도 최악(最惡)의 경우 제1차 대전 같은 지옥(地獄)이 재현(再現)될 가능성(可能性)이 크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認知)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히틀러 혼자만이 전쟁을 개시하고 싶어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고 비유(卑幼)할 만큼 사실 지난 전쟁의 악몽(惡夢)과 현재의 팽팽한 상황은 양측 모두가 소극적(消極的)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940년 5월 10일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