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16~17)
마태오 복음 9장 15절의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빼앗길'에 해당하는 '아파르테'(aparthe; will be taken)는 '~로 부터'
(from)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치사 '아포'(apo)와 '들어올리다', '가져가다'는
뜻이 있는 '아이로'(airo)의 합성어인 '아파이로'(apairo)의 가정법 부정(不定)
과거이다.
여기서 부정(不定)과거(Aorist)가 쓰인 것은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드러낸다.
마태오 복음을 읽는 초대 교회 유다계 크리스찬들은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으므로, 이 단어의 상징적인 뜻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A.D.1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12사도의 가르침'인 '디다케'(didache)를 보면,
바리사이들이 단식하던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새로운 전통을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세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초대 교회 시대에 마태오 복음 9장 15절의
가르침대로 단식이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예수님을 잃은 인간적인 슬픔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인간의 죄악을 슬퍼하며 그 죄를 보속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단식을 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단식은 아직도 메시야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유다 공동체들의 단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으로 치우친 단식에 대해 현실의 삶
속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단식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강조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은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단식인데, 복음의 윤리적인 면이 동반되는 단식이었다(이사58,6).
한편, 마태오 복음 9장 16절에서 '헌 옷'에 해당하는 '히마티오 팔라이오'(himatio
palaio; an old garment)는 형식적이며 경직된 이전의 모든 구질서와 낡은 가르침을
의미하며, '새 천 조각'에 해당하는 '에피블레마 라쿠스 아그나푸'(epiblema rakous
agnaphou; a patch of unshrunk cloth; a piece of new cloth)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 질서와 새 가르침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아직 줄어들지 아니한 새 옷감을 헌 옷감에 대어 기워놓으면,
당장에는 쓸모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옷을 물로 세탁할 경우에 새 옷감이
줄어들면서 헌 옷감을 잡아당겨 옷에 주름이 지거나 찢어져서 옷 전체를 망가뜨리게
되므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새 것과 헌 것이, 즉 예수님의 복음과 유다인들의 율법주의적 사고가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의 가르침을 폐지하거나 반대로 과거의 가르침에 단순하게
덧붙인 차원의 것이 아니고, 과거의 가르침의 근본 정신을 밝히며, 이것을 형식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게 함으로써 온전하게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9장 17절에서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에 해당하는 '오이논 네온'
(oinon neon; new wine)을 가죽 부대에 넣어두면 차츰 발효가 되어 처음보다 더 큰
부피로 팽창하게 된다.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 부대(wineskins)는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딜 수 있지만,
헌 가죽 부대는 탄력성과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새 포도주로, 유다교의 고루한 가르침을 헌 가죽
부대로 비유하시면서 유다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다.
즉 바리사이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과거의 가르침에 얽매여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비판만 해서는
안되고, 자신이 변화되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9장 16~17절은 율법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구현되었으므로(요한1,45; 마태5,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약과 약속의 말씀을 따라야만 과거의 율법을 바로 준수하는 것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