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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묵상글 ( 연중 33주간 목요일. - 평화 이기주의.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1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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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1.20 05:11
- 평화 이기주의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은 전체가 갈릴래아에서 얼마 동안 활동하시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 33주간 월화수요일 삼일은 예루살렘 길목인 예리코에서
복음을 선포하신 얘기를 들었고 오늘은 아주 특별한 얘기를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우시는 것은 복음 전체를 놓고 볼 때 아주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제가 알기로 두 번밖에 없습니다.
왜 우십니까?
예루살렘이 폭삭 망할 것이기 때문이고,
예루살렘이 왜 망하냐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 아이러니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와 정반대로 평화가 제일 없는 곳이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평화가 없는 것은 평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화는 우리 인간이 그렇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왜 평화 의지는 없는 것입니까?
평화 이기주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평화롭기 바라지만 같이 평화롭기를 바라지는 않기에
결과적으로 나만 평화롭기를 바라는 꼴이 됩니다.
평화공존이라는 좋은 말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나만 잘살려고 하고 내가 잘살기 위해 너를 눌러야 하고,
심지어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기에 은근히 남이 불행해지길 바랍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나는 버스 전용차선을 막힘없이 달리면서
다른 차들은 거북이걸음으로 가는 것이 미안하지 않고 오히려
은근히 기분이 좋으면 그것이 바로 행복 이기주의인 것이지요.
나만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나
나만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나
이 ‘나만’이 행복이나 평화 문제에서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 평화롭고 행복하고,
우리 모두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같이 평화롭고 행복해야
나도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을 가르치시는 주님이
평화의 임금이심을 예루살렘이 모르고 거부하다가 마침내는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그 평화를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예루살렘처럼
이 평화를 거부하고 평화 이기주의를 살고 있진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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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울음
“주님 평화의 일꾼이 됩시다”
예전 예수님이 활짝 웃으시는 그림을 보고 얼마동안 간직하다가 치운 기억이 생각납니다. 복음 어디에서도 이런 예수님의 활짝 웃는 모습을 읽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이 웃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특이하게 예수님이 우셨다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대목도 여기에만 나옵니다.
역시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에서 루카에만 나오는 고유사료입니다. 아마도 70년 로마군인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루카는 80-90년 경에 위 복음을 엮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하여 전하는 진리는 변함없이 영원합니다. 복음 서두부터 인상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서울은 물론 대부분의 도시에 입성하신데도 역시 우실 것이란 생각이며,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아 하나? 화두처럼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요? 다음 탄식이 답을 줍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희에게 닥쳐올 것이다.”
당대 예루살렘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무지에 눈이 가려 평화의 주님을 모시지 못함으로 자초한 재앙이요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예루살렘의 이름 뜻에 반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평화의 임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지의 어리석음으로 배척함으로 마침내 예루살렘은 깡그리 파멸되고 완전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시는 것은 오늘 지금 여기에서 평화의 임금으로 오시는 것으로 실현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 예루살렘이 평화의 임금,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 공동체가 상징하는 바,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평화가 답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갈구하는 바도, 하느님이 소원하는바도 온누리의 평화입니다. 예수님 탄생시 하늘에서 울려온,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찬미도 기억할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가 한셋트입니다. 영광과 평화는 한 실재의 양면입니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평화가 하느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간혹 사람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신부님은 좌파입니까? 혹은 우파입니까?” 그러면 저는 지체없이 답합니다.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입니다.”
바로 제3의 길, 참평화의 길을 가는 예수님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강조하신 평화인지요! 세상을 떠나기전, 부활하신후 우선적인 선물이 평화였고 이 미사를 통해서도 당신의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 고백하는 우리는 산상설교의 참행복중 다음 대목도 기억합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그러니 유비무환입니다. 그 재앙의 때가 닥쳐오기전 평화의 주님을 모시고 주님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수도원처럼 참평화의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수도원에는 “평화의 집”이라는 피정집도 있습니다만, 수도원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집, 기도의 집, 평화의 집, 환대의 집이라 불립니다.
말 그대로 주님의 평화를 살아가는 새 예루살렘 요셉 수도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평화를, 성 베네딕도의 평화를 찾아 수도원에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유일한 길은 평화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길뿐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평화가 제1독서 마카오베기 상권의 독립투사 마티아스에게 는 결핍되어 있습니다. 바로 다음 마티아스의 살인 대목이 평화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습니다.
‘마타티아스는 열정이 타오르고 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달려가 제단 위에서 그자를 쳐 죽였다. 그때에 그는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 제단도 헐어 버렸다.’
그리고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은 모든 것을 성읍에 남겨둔채 산으로 달아납니다. 평화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살해한 종교역사요 종교전쟁이었는지요! 예수님 이전이기에 마타티아스는 주님의 평화를 알길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목표가 정의롭다 해도 평화가 아닌 폭력으로는 결코 정의를 이룰 수 없고 그런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보복의 악순환’에서,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평화의 주님 안에서 가능한 상호공존의, 상생의 평화입니다. 오늘날 역설적으로 평화를 갈구하지만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흡사 <인류사>는 <전쟁사>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은 평화의 주님, 주님의 평화뿐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주님 평화의 일꾼으로 사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십사> 기도할 것이 아니라 <당신 평화가 되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 평화의 사도, 평화의 일꾼, 평화의 전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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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루카 19,41)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마치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범죄를 두고 울었던 것처럼(1열왕 8,11), 예레미야가 유다의 유배를 두고 세 번이나 울었던 것처럼(예레 9,1;13,17;14,17) 우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전에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루카 13,34)하시고 탄식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또한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 앞에서도 우셨습니다(요한 11,3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큰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브 5,7)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마태 5,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하고 탄식하시며, 당신께서 우시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함에 대해 우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가슴이 미어지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과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예고(루카 19,43-44; 21,20-24; 23,28-31)하시고, 그것을 종말을 예시하는 역사적 심판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울음과 말씀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적 경고임과 동시에, 회개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당신의 ‘눈물’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도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방문미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는 울음과 연민의 경험을 상실한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에게서 우는 능력을 빼앗아갔습니다.
... 누가 울고 있습니까? 누가 오늘 이 세상에서 울고 있습니까?”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뜻을 외면하여, 또 다시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주님!
오늘 당신의 뜻을 알아듣고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게 하시고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평화를 이루게 하시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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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다섯째 날에는 예전에 다니던 '동일 침술원'을 다녀왔습니다. 예전에도 허리가 아프거나, 목이 아프면 찾아가서 치료받았습니다. 원장님은 앞이 보이지 않지만,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잘 보았습니다. 원장님은 저의 골반이 많이 틀어져서 허리가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하셨듯이, 침을 놓았고, 골반을 교정하는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평소에 몸을 자주 풀어주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원장님을 찾아뵙고 치료받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에, 예전에 자주 갔던 '엉클통'이라는 식당에 갔습니다. 식당 사장님은 20년 전에 갔던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세월의 흔적으로 머리는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했지만, 다른 모습은 그대로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동일 침술원 원장님은 늘 같은 자리에서 '와서 보라'고 합니다. 원장님을 만난 사람은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원장님을 만난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원장님에게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저도 몇 년 동안 다녔지만, 나중에야 원장님이 보지 못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엉클통 사장님도 3번이나 식당의 자리를 옮겼지만, 늘 한결같은 맛과 친절로 '와서 보라'고 합니다. 거짓과 위선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늘 한결같은 사람이 주는 믿음과 성실함은 삶을 살아가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감춘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켜놓고 됫박으로 가려 놓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작년 12월 3일에 ‘비상계엄’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1년이 되어갑니다. 1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탄핵하였고, 헌법재판소는 그 탄핵을 인용했습니다. 6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한국은 새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성숙한 민주주의, 평화로운 정권 교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깨어 있는 시민들의 헌신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비상계엄을 막으려는 시민들이 국회의사당에 모였습니다. 비상계엄을 해제하려는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 거리에 모인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이 있었습니다.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던 군인이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바다를 건너온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소금은 물에 녹아듭니다. 그래서 음식에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물은 소금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줍니다. 소금은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물과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물과 기름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 떠 있는 기름은 물에 녹아들지 않습니다. 물은 기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기름 역시 자신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강에 있으면서도 더 넓은 바다로 가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물과 기름 같은 관계는 사람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가 때로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한국에서의 사목 방침을 고수하면 현지에 있는 신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현지에 있는 신자들이 한국에서 온 신부님에게 현지의 상황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한국에서 온 신부님도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물과 기름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현지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사제 모임에도 잘 참석하면서 이해하고 경청하면 조금씩 현지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현지에 있는 분들이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새로운 사목의 방향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면 공동체는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물과 소금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마타티아스는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어기며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는 동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그때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마타티아스는 율법과 계명을 지켜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움에 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과 기름처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앙이 물과 기름 같은 신앙으로 겉도는지, 물과 소금 같은 신앙으로 풍요로운 신앙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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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확증 편향의 힘!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1월 19일 수요일- 마흔네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우리의 편향을 인식하기!
나는 이미 무엇을 믿고 있는가? 이 새로운 자료가 내가 품고 있는 신앙과 생각을 확인해 주는가?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은 가장 강력한 편향 가운데 하나인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 대해 논의합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의 '안경'을 끼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무엇을 믿고 있는가? 이 새로운 깨달음이나 말씀은 내가 품고 있는 신앙을 확인해 주는가? 내가 이미 세워 놓은 신앙의 틀 안에 들어맞는가?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새로운 깨달음이 내 신앙의 틀과 맞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불합리하고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며 거부하려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부하는 태도 자체가 오히려 불합리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무지해서가 아니라 효율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 마음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성령의 인도와는 무관하게, 들어오는 생각과 정보를 빠르게 판단합니다. 이미 내가 품고 있는 신앙의 틀에 맞는 깨달음은 쉽게 받아들여지고, 그것은 내 믿음을 확인해 주기에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내' 신앙의 틀에 쉽게 들어맞지 않는 깨달음은 '나'로 하여금 깊이 묵상하고, 다시금 성찰하며, 오랫동안 붙들어온 확신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이런 영적 사고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며, 내 마음은 때때로 그것을 고통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성령께서 나를 새롭게 빚으시고, 더 큰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새로운 깨달음은 마치 오래된 신앙의 틀에 맞지 않는 새로운 그림과 같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려면 새로운 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그 수고를 피하려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빛을 '거부'하거나 '삭제'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나는 지금의 신앙 틀을 지키겠네, 고맙지만..."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율성에 스스로 작은 만족을 느낍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이 만족을 넘어, 새로운 틀을 세우는 수고 속에서 더 큰 진리와 은총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사람은 변화를 거부할 때 느끼는 고통이 변화를 받아들일 때의 고통보다 더 커질 때에야 비로소 마음을 돌이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이미 가진 신앙의 틀을 고수하려는 확증 편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고통을 피하려는 마음을 넘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1]
〈배우는 법: 어떻게 보는가〉라는 팟캐스트의 한 회차에서, 자키 루이스 목사(Rev. Dr. Jacqui Lewis)는 우리가 가진 신앙적 편향, 곧 확증 편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살아온 경험에 의해, 완결성을 지닌 이야기를 찾도록 이끌립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끌리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의미가 되고, 교회의 전승과 과거의 여정과 이어지며, 우리의 삶과 공명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이야기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이미 마음속에 있는 것을 확인해 주는 이야기일 때가 많습니다. 신앙의 길에서는 이러한 확증 편향을 넘어,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이야기와 빛을 받아들이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2]
우리가 편향이 우리를 어떻게 흔드는지 깨닫고자 할 때, 맥라렌은 이를 성찰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모든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 제가 진리를 갈망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것이 제가 이미 참되다고 생각하는 것을 흔들고, 바꾸며, 뒤집는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모든 진리 안으로 저를 인도하시고, 더 많은 진리를 감당할 수 있도록 저를 넓혀 주소서. 그리하여 언제나 자기기만의 반쪽짜리 진리가 아니라, 혼란이 있더라도 온전한 진리를 선택하게 하소서. 지혜가 어디로 이끄는지 그 길을 따를 열정을 제게 허락하소서. 감사합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성품성사를 통해 사제로 서품되었지만, 교회 지도부의 잘못된 관리와 성직자들에 대한 부족한 배려, 그리고 은폐된 여러 가지 남용 때문에 존경심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의 하느님과의 여정은 리처드 신부님의 저술과 매일의 관상 묵상을 통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것은 제가 낙심할 때 저를 일으켜 세워 주며, 내적·외적 갈등 속에서도 신앙을 나눌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Peter S.
References
[1] Brian McLaren, Why Don’t They Get It? Overcoming Bias in Others (and Yourself), rev. ed. (Self-published, 2019, 2024), 15–16, e-book.
[2] Adapted from Brian McLaren, Jacqui Lewis, cohosts, with Richard Rohr, Learning How to See, podcast, season 1, ep. 1, “Why Can’t We See?,” October 5, 2020. Available in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3] Adapted from Brian McLaren, Learning How to See, podcast, season 2, ep. 1, “The Big Ditch,” July 2, 2021. Available in MP3 audio download and PDF transcript.
화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ud Helisson, untitled (detail), 2021, photo, Brazil,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렌즈는 우리가 본래 지닌 편향을 상징합니다. 이미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만을 선호하거나, 우리와 닮은 이들만을 바라보는 편향은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합니다. 그러나 참된 깨달음은 다시 바라보고, 다르게 볼 수 있으려는 열린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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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루카 19,41-42)
우는 이들의 참행복을 보여 주시는 예수님
우리 구원자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 이렇게 하심으로써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참행복들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가르치신 바를 몸소 증언하신 것이지요. 그분은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에 대해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 하셨지요. 또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우리의 평화”이시며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신"(에때 2,14-15 참조) 우리 주 예수님보다 큰 평화를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분이 누가 있습니까? 그분은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우리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만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모든 참행복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며 우신 것입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해 우시며 말씀하셨지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런 다음 그 이유까지 일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4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들이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께 젖을 먹인 가슴은 복됩니다!(루카 11,27).
예수는 목숨을 버릴 만큼 버림으로 충만해 있었다. 신적인 말씀은 사람이 될 만큼 버림에 활짝 열려 있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인간성을 버리고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버림으로 충만해져야 할 차례다. 성령을 파송받으려면, 예수마저도 버려야 한다 - 예수는 죽었다가 승천해야 했다. 엑카르트는 경고한다.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현존은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예수는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성령이 올 수 없다고 벗들에게 말했다(요한 16.7 창조). 하느님의 새 아들이 우리 안에서 태어나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버려야만 한다. 이처럼 철저한 버림의 의미로 보건대 엑카르트의 영성심리학은 종교적인 강박증은 물론이고 일체의 강박증에 맞서는 심리학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모든 행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의 신성과 우리의 신성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흘러 나오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러한 예수의 행위 중에서 자비야말로 가장 충만한 행위다. 넷째 오솔길에서 살펴보겠지만. 액카르트에게 자비는 정의를 뜻한다. 실로 예수는 “정의의 아들”이다. 그는 실제로 사람이 된 신적인 자비의 화신이다. 신적인 자비가 사람이 된 까닭은 짐을 짊어지고 고난을 견딜 “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신성이 인간의 고난으로부터 자비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실로, 그리스도는 “태어나지 않은 정의 그 자체”이며, “정의의 열매이자 아들”이다. 의로운 사람이 정의 자체와 관련되어 있듯이, 그리스도도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자비의 화신인 이 정의의 아들을 본받아야 한다.(508)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6장 오직 하느님만을
통고의 마리아
막이 열리다
갑자기 세 부인이 수도복을 보고 그 앞에 멈추었다.
“도로테아회의 수녀님들이시죠 ?"
“네, 그렇습니다"
“포르투갈 분이신가요? 투이에서 오시는 건가요?"
“네 "
“마침 우리도 투이로 가는 중입니다. 파티마에서 발현을 본 루치아 수녀님을 만나고 싶어서요. 그분은 스페인에 계시죠?"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은포르투갈에 있어요"
하고 루치아는 대답했다.
“정말입니까? 야단났군"
“참말이구 말구요. 포르투갈에 있습니다"
“만일 루치아 수녀님이 투이에 계시다면 만날 수 있을까요? 퍽 어려운 모양이던데"
“틀림없이 만납니다.”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라니요? .... 지금 저를 보는 것처럼입니다."
부인들은 인사를 하고 멀어졌다. 젊은 두 수녀는 발렌사로 통하는 다리 --쓰이지 않을 때는 거두어 올려 놓는 장치가 되어 있음--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마치 어린이와 같이 흥겨워 웃으면서 ...... 실상 두 사람은 단순함과 천진함에서 진정 어린이 같았다.
‘통고의 마리아’는 언젠가 뽄뜨베드라 가까이 있는 또야라는 작은 해변가에서 며칠 쉬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별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 수녀에게 말했다.
“파티마의 성모님을 본 처녀가 투이에 있는 모양이죠?"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 믿을 만한 신문에서 얽었는데요.”
수녀는 시치미를 떼고 어디까지나 모르는 척하면서,
“그렇습니까 ? 그렇다면 그럴 것입니다…제가 그 사정을 잘 몰랐던 것이죠 ..
그녀는 여전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순박함과 함께 함구령을
철저히 지키려는 굳은 의지의 융합에서 생긴 귀여운 장난을 하였다.(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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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갑곳성지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너라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의 눈에는 그것이 가려져 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도시였고,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로 예루살렘은 파괴의 길을 걷게 되지요. 주님께서 우셨던 것은 단순히 도시의 멸망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조건이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 속에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힘이나 돈, 혹은 자신의 계획이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고, 결국 또 다른 불안과 두려움을 낳습니다. 참된 평화는 오직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때에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우신 이유는,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 구원과 평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이 주어집니다.
“나는 무엇에서 평화를 찾고 있는가? 세상의 안정과 성공인가, 아니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인가?”
우리 가정과 일터,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가져다주는 길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닮아 용서와 자비, 나눔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작은 용서를 하고, 작은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그곳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가 눈을 열어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을 살아낼 때, 우리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이 세상 안에 참된 평화가 싹트게 될 것입니다.
⭐맛땅콩과 칼몬드
언젠가 이곳에 방문하신 분께서 작은 비닐봉지를 주셨습니다.
꽤 묵직한 비닐안에는 ‘맛땅콩’ 한 통과 ‘칼몬드’ 한 통이 들어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저녁 시간 입이 심심할 때 그 땅콩과 칼몬드를 입에 넣습니다. 그리고 기억합니다. 그분의 한마디를 말입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건강하세요.’
입속에 땅콩을 넣고 오물거리며 기도합니다.
사랑을 베푸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기를….
사랑이 필요한 곳에 하느님 은총이 가득하기를….
그리고 제가 하느님의 어마어마한 사랑에 작은 도구가 되기를 말입니다.
오늘 고소하고 또 따뜻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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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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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신체적, 정신적, 성적, 경제적 폭력을 모두 포함하는 ‘데이트 폭력’이 있습니다. 집착에서 오는 잘못된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집착만 하고 있으면 상대는 도망갈 것입니다. 짝사랑도 그렇습니다. 짝사랑이 기억의 좋은 한 면을 차지할 수도 있지만, 꽤 오랜 시간 슬픔을 갖게 합니다. 왜냐하면 나만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돈에 집착하면 돈은 달아난다고 합니다. 그 돈을 가진다 하더라도 돈과 계속 싸우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돌고 돌기 때문에 ‘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도는 것을 막으려 하기에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 간의 이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 삶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쪽만의 사랑이라면, 또 집착에서는 오는 것이라면, 그리고 움켜쥐려고만 한다면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사랑의 관계가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에 부합해서, 우리 역시 사랑으로 다가서야 진정한 사랑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는 집착으로 주님께 다가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도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우시는’이라는 단어의 그리스어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소리 내어 통곡하는 슬픔을 이야기할 때 사용합니다. 멸망해 가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향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래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 있는 주님의 안타까움이 크게 보이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의 히브리어 뜻은 ‘평화의 도시’입니다. 지명의 뜻대로 ‘평화의 도시’가 되어야 하는데, 참된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모순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 우리 역시 자주 영적 눈멂의 상태에 있었음을 반성합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주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면서, 세상의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럴수록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보시고 우시지 않을까요?
오늘의 명언: 모든 말을 존중하라(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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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은 우리의 옷이 되어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고, 안아 주시며, 보호해 주십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바로 직전 구절에서, 군중은 주님을 따르며 환호와 기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갑자기 바뀝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루카 복음 저자는 무언가를 강조하기 위해 대조하는 방식을 자주 사용합니다. 행복선언과 불행 선언, 성전 안의 두 사람, 부자와 라자로 등등….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를 바라보시며 큰 슬픔에 잠기셨습니다. 그분은 우셨습니다. 예루살렘, 즉 이 평화의 도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신 것입니다.
그분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리게네스가 지적했듯이, 예수님의 삶 전체는 참 행복을 드러내는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거나, 희생을 감수하거나, 용서를 베푸는 이유는 단순히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그 행위는 외형만 남고, 내적인 의미를 잃게 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은 심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그 도시와 그 도시 사람들을 향한 깊은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위—가르침, 치유, 십자가의 희생—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단순히 "좋은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의 근본 원리이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을 "모든 덕의 으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하신 말씀은 대부분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미 전했던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이사야, 에제키엘, 호세아 같은 예언자들도 예루살렘의 불충실과 회개 없는 모습을 보고 깊이 슬퍼하며 하느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단순히 미래를 예언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을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하느님을 떠날 때마다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메시지를 갑자기 던지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예언자들이 전했던 하느님의 애통함과 사랑을 이어받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눈물은 구약의 예언자들의 눈물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사랑했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슬픔은 백성이 멸망할까 두려워하는 마음,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지요....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는 올리브 산 기슭에는 작은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성당의 이름은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인데, 라틴어로 "주님께서 우셨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말입니다. 이 성당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신 장면을 기념합니다.
성당 제대 아래에는 특별한 모자이크가 있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품고 있는 모습입니다. 병아리들은 그 날개 아래서 보호받으며, 일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 모자이크는 성경 말씀, 곧 예수님께서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너희를 모으고 싶었다." (마태 23,37; 루카 13,34)라고 하신 말씀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14세기 영국의 신비주의자 노리치의 율리안나는 하느님을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보호적인 분으로 묘사했습니다. 그의 글에서 하느님은 단순히 심판자나 왕이 아니라, 자녀를 감싸 안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선과 위로가 되어 주시는 분임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옷이 되어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고, 안아 주시며, 보호해 주십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둘러싸시며, 그 사랑은 너무나도 다정하여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니 영원히 이렇게 우리를 감싸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마저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수치, 우리의 죄를 감싸주시기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시는 분(창세 3,21)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 삶에 있어 가장 큰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감싸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여전히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복음, 즉 참 기쁜 소식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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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X X X X X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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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십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의 예루살렘이
평화와는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십니다.
다른 것이 눈을 가려
무엇이 평화인지 분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그 이익을 위해서 서로 합의하는 식으로
사람들은 평화를 만들어 갑니다.
자기의 이익이 보호 받아야 하기에
서로 큰 다툼은 없습니다.
다툼이 없기에 사람들은 평화롭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서로의 이익이 충돌하고
그것이 합의로 해결되지 않는 순간
그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싸움으로 바뀔 것입니다.
즉 각자의 이익을 위한 평화는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평화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누구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다윗성으로 들어오신다고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는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환영하는 사람 가운데에서도 누구는
예수님의 힘으로, 메시아의 힘으로
로마를 물리치기를 원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도 그것을 예상해서
자기들의 기득권이 빼앗길까 두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이익만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셨음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각자의 이익에 눈이 먼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그렇게 스스로 평화에서 멀어집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내 것을 쥐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살기 위해 무엇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채워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오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때로는 나만을 위해서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채워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지 못하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툼으로 바뀌어갑니다.
나에게 무엇인가 필요한만큼
옆사람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함께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될 때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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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9,41-44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마지막 시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처음에 자기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아가며, “높은 데서 호산나”라고 찬미의 노래를 불러가며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금새 태도를 바꾸어 그분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며 배척했지요.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능력의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놀라운 능력으로 자기들을 핍박하는 로마인들을 몰아내고 조국에 독립과 번영을 가져다 줄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절대군주’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분께서 자신들이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그분께 등을 돌린 것이지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슬픔과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십니다. ‘평화의 도성’이라는 뜻의 예루살렘에 살면서도, 정작 자신들에게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들이, 세속적인 힘과 권력에 기대어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가짜 평화를 누리기에 급급하는 그들이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안정적으로, 더 많이 추구할 수 있는 상태가 평화라고 속삭입니다. 재물, 권력, 지식 등을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 그 압도적인 힘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상황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너질 뿐입니다.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충실히 따르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 순명과 실천을 통해 하느님 섭리 속을 걸으면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것이지요. 참 평화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나에게 가장 이로운 일이자 참된 행복을 누리는 길임을 믿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순교성인들이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고 의연했던 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으며 어떻게든 그분 뜻 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보다 자기 능력과 재산을, 세속적인 권력을 더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보다 제 뜻과 탐욕을 우선적으로 따랐습니다. 그 결과 기원 후 70년 경 완전히 멸망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지요.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나를 찾아오시어 손 내미시는 그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때가 되면 즉시 잘못된 길을 가던 것을 바로잡고 그분께로 돌아서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그분께 나의 작은 정성과 노력으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즉각적인 회개와 사랑의 실천으로 구원의 때를 놓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절호의 기회를 붙잡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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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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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박윤식”님을 찿아 들어 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위에 X X X X X 로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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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김종업로마노 형제님 공유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 (1마카2,15-29)
마카베오기 상권은 1-2장이 입문이라고 이미 밝혔다.
입문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후계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에피파네스라는 신성모독적 별칭을 가진 안티오쿠스 4세의 박해(1장)와 이에 항거하는 마타티아스 사제와 그의 다섯 아들(요한,시몬,유다,엘아자르,요나탄)의 반란을 소개한다.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이, 성읍과 집안에서 존경받는 신분인 마타티아스의 배교 행위가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왕명을 따라 모데인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임금의 벗이 될 뿐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리게 될 거라고 유혹한다(17-18절).
이에 대해 마타티아스는, 임금의 왕국에서 모두가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자신과 아들들과 형제들은 한데 뭉쳐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계약에 충실하고, 결코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한다(19-21절).
"우리는 임금의 말을 따르지도 않고, 우리의 종교에서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겠소."(22절)
말하자면, 야훼 유일신 신앙을 따라 정도를 걷겠다고 의지를 드러낸다.
이교도의 것을 섞어서 절뚝거리는, 양다리 걸치는 혼합 종교를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어떤 남자가 나와서 배교 행위로 이교도 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려는 일을 보게 된다.
마타티아스는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열정이 타오르고,심장이 떨리고, 의분이 치밀어 올라 그를 쳐 죽이고, 이교도의 제단에 제물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임금의 신하도 죽이고,제단도 헐어 버린다(25절).
마치 전에 피느하스가 살루의 아들 지므리에게 한 것처럼, 율법에 대한 열정을 드러낸 것이다(민수25,1-18).
"피느하스가 일어서서 법대로 다스리자 재앙이 멈추었으니 이것이 그에게 세세에 영원히 의로움으로 셈해졌다.'(시편106,30-31)
그러고 나서 마타티아스는 그 성읍에서 말한다.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겁고,계약을 지지하는 이는, 모두 나를 따라 나서시오."(27절)
예레 34장 18절에 나오지만, 유다인들은 A와 B가 계약(berit:베릿)을 맺을때(karat: 맺다-직역하면,자르다), 송아지를 한 마리 가져다가 반을 자르고(죽이고), 그 잘라진 틈으로 A와 B가 지나간다.
계약을 어기면, 그 송아지처럼,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계약이란 피(생명)로 맺는 것이다.
물질적인 상행위로서의 contract 이 아니라 covenant 이다.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피(생명/인격)를 나누는 교환 행위를 말한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런 계약을 맺었다.
계약을 맺는 장면을 아무도 보지 못했으나, 피가 오고 간 것이다.
그리고 그 계약의 산물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는 십계명이고 율법인 것이다.
우리가 계명과 율법을 어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피(생명/목숨/인격)를 뿌려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계약의 당사자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몸도 마음도 갈라서서는 안된다.
다른 생각을 해서도 안되고, 다른 짓을 해서도 안된다.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몸도 마음도 갈라서서는 안된다.
충성해야 한다.
신약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뿌려 맺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도 마찬가지다.
구약의 백성이 계약의 산물인 계명을 어겼을 경우, 육신도 죽고, 영혼도 구원받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계명을 어긴 육을 가진 인간들이 모두 영육간에 죽어야 했기에, 구원받을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없는 예수님이 아담으로부터 인류의 종말에 이르기 까지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다.
그로 말미암아 죄 지은 인간들이 더 이상 육신이 죽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동시에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죽고, 영혼 생명의 단절, 즉 은총이 끊어지지만, 다시 회복되는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 성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다시 일치와 성화의 길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복음이다. 무상의 선물이다.
옛 계약(구약)과 새로운 계약(신약)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선물인 성령을 모시기에 합당하고 순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성전에서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을 모실 때와 성전 밖에서의 삶이 일치하는가?
가정과 사회와 직장에서 어떻게 죄와 죄의 기회를 단호히 끊고 거부하며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마타티아스의 율법에 대한 열정, 계약을 지지하고 충성하는 모습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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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간 목요일 ] 오늘의 묵상 (사제 김상우 바오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읍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 시대에 유다교의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중심축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신앙생활의 정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기원후 70년 무렵 로마군에게 함락되자 그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절망감과 위기감에 휩싸입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구약이라고 부르는 성경에 자신들 삶과 종교의 중심점을 새로 잡으며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다시 정립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였고, 새로이 겪게 될 위기와 절망과 고통의 순간들을 극복하여 나아갈 힘을 성경에서 찾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구세주 그리스도이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특히 그들을 대표하는 상징물인 예루살렘 성읍을 향하여 눈물 흘리시며 통탄하여 마지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다인들은 오늘날까지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위기의 순간에 그것을 지혜롭게 이겨 내는 용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 자신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함께 지고 걸어가는 믿음입니다.
삶의 무게에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을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준비로 채워 나가려면,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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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19,41-44)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하느님의 평화를 누려야 할 예루살렘이, 제사와 윤리 그 율법으로 사람의 뜻을 위한 도성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신다~
42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는 평화다. 그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그리스도 이시니 예수님이 우리의 평화이시다.
(에페2,14)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속죄제물)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요한14,27)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대속 으로 죽으시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 예수님의 십자가로 얻는 죄의 용서, 자유, 구원의 진리로 쉼, 안식(7), 하늘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규정과 교리에 의한 사람의 희생과 노력, 그 열심히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그 하늘의 평화가 감추어져 있다.
43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 그것은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느님을 계속 거부한다는 의미다.
(예레 6,6-16) 6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무를 베어 내고 예루살렘을 칠 공격 축대를 쌓아 올려라. 예루살렘이야말로 벌을 받아야 할 도성으로 그 안에 온통 *억압이 자리 잡고 있다.
= 하느님의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곳이다.
8 예루살렘아, 교훈(진리)을 받아들여라.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너와 갈라서고 내가 너를 폐허로 만들어 인적 없는 땅이 되게 하리라.” 10ㄱ 누구에게 말을 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알아듣도록 경고해야 합니까? 그들의 귀는 *할례(육의죽음)를 받지 않아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 사람의 지혜, 뜻으로 듣는 그 귀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10ㄷ이제 주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비웃음 거리가 되고 그들은 그 말씀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13 정녕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정한 이득만 챙긴다. 예언자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거짓을 행하고 있다.
=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계명인 냥 가르치는 그 거짓이다.(마르7,7~!9참조)
14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죄의식)를 대수롭지 않게 다루면서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고 말한다.
= 사람의 계명과 종교 행위, 예식으로는 죄로 인한 상처, 곧 계속되는 미움, 죄 의식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하늘의 안식,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는 말씀이시다.
15 그들은 역겨운 짓을 저질렀으니 부끄러워해야 하는데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얼굴을 붉힐 줄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쓰러지는 자들 가운데에서 쓰러지고 내가 그들을 징벌할 때 넘어지리라. 주님이 말한다. 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갈림길에 서서 살펴보고 *옛길을 물어보아라. 좋은 길이 어디냐고 물어 그 길을 걷고 너희 영혼이 *쉴 곳을 찾아라. 그러나 그들은‘그 길을 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44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찾아오신 때, 이미 찾아 오셨었다는 말씀이다. 언제?- 아담이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뜻을 적대하는 그 죄를 범했을 때이다. ‘아담이 죄를 짓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스스로 만들어 입은 그 옷은 죄를 덮을 수가 *없다~
(창세3,21) 21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 가죽 옷, 아담의 죄를 덮어, 용서 하시려고 찾아오셔서 어린 숫 양을 죽이시고 그 죽음이 남긴 가죽 옷으로 만들어 입히셨다. 그 후에, 세상의 화려함과 큰 힘을 가진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그의 민족을 찾아가셨다.
(탈출3,7-8) 7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세상)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 그러나 이집트에서 구출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그 이민족의 풍습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좋아 보여 받아들이고 따랐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노(震怒)를 산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시련을 겪게 하시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깨닫고 부르짖으면 하느님께서 찾아 가셔서 판관들을 세워 그들을 그 시련에서 해방시켜 주신다.
그러나 살만하면 또 이민족의 풍습을 따라 살며,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다. 하느님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또 시련을 겪게 되고, 하느님은 또 그들을 찾아 가시고~
판관기는 전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죄와 하느님의 무한하신 용서, 그 반복의 이야기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들은 끝까지 오늘날까지 자신들의 욕망을 고집하며 하느님의 말씀(뜻)을 따르지 않고 버린다. 그래서 아담을 구했던 어린 숫 양,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을 도왔던 모 세, 그리고 가나안의 판관들, 그 구원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당신의 아들을, 그들의 끝없는 죄의 속죄 제물로 보내신다.
하늘의 쉼, 안식(7),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세상 모든 죄인(짐승)들의 구원(생명)의 양식으로 보내신 것이다.
(루가2,12) 2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당신의 몸으로 지키시려 오신 것이다. 곧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살지 않는 그 하느님의 뜻을 버리는, 대적하는 죄,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그들의 죄로 죽으시러 오신 것이다.
그것이 창조 이전 하느님의 구원의 계약(약속)이셨고 뜻 이였다.(에페1,4~) 그 뜻에 순명하신 어린양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그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의 길이 구원, 생명의 진리인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두루마리(성경)속에 일곱 번 봉인된, 곧 감추어진 일곱, 그 안식을 주는 진리를 깨닫고, 알 수 있도록, 열고 들여다 볼 수 있으신 분이 예수님 뿐이시라는 것이다.
(묵시5,1-9) 1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진리)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성경)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안식)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4 두루마리를 펴거나 그것을 들여다보기에 합당하다고 인정된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5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예수)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을 뜯기에 합당하십니다. 주님께서 살해되시고 또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 사람들을*속량하시어 하느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 인간들은 그 진리의 쉼, 안식이신 예수님을 모르기에 그분의 길이 어리석어 보인다.
(1코린1,23-24)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그러니 인간의 지혜, 계명으로 똑똑하다, 의롭다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찾아 가셨듯이, 오늘 죄인인 자신들을 찾아오신 구원자를 못 알아본다. 사람의 자기 의로움으로 죄인이 아니라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들이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 하신다.(1요한1,10)
인간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들의 열심한 그 의로움으로 하늘에 오르려는 그것이 죄임을 모르기에~(창세11,1-9 로마9,30- 10,4참조)
그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구원의 하느님, 곧 자신의 죄 때문에 찾아오신 구원의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예루살렘, 그 안에 들어있는 내가 부서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때는 전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계속된다.(묵시1,8참조)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히브4,1) 1 그러므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 주님! 당신의 일곱영, 진리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는 시련의 사건들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라는 것을 깨닫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의 뜻, 욕망을 위한 신앙에서 돌아서 하느님의 약속(생명)을 얻게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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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19,41-4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41~42)
루카 복음 19장 41~44절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사 중에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 메시야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흥분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가까운 장래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을 바라보고 우시며 애가를 부르신다.
루카 복음 19장 41절에는 '에클라우센 에프 아우텐'(eklausen ep auten; and wept over it)이 나온다.
'~에 대하여'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에피'(epi)의 축약형인 '에프'(ep)와 '예루살렘 도시'를 가리키는 여성형 지시 대명사 '아우텐'(auten)이 기록되어 있는데, 직역하면 '그를 위하여 우셨다'이다.
즉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 재앙을 정확히 내다보시고 이에 대해 슬퍼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시며'에 해당하는 '에클라우센'(eklausen)의 원형 '클라이오'(klaio)는 '울다', '곡하다', '애곡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감정을 삭이며 소리 죽여 우는 내적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슬픈 감정을 밖으로 표출시키는 격렬한 비통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괴로움을 영혼의 부르짖음 같은 통곡으로 표현하셨다.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이것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핍박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멸망하게 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악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메시아적 슬픔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루카 복음 17장 42절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알아 보아야 한다.
여기서 '평화'로 번역된 '에이레넨'(eirenen)의 원형 '에이레네'(eirene)는 히브리어 '샬롬'(shalom)과 같은 뜻의 희랍어로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부터 생기는 '구원'과 '충만한 은총' 및 '진정한 기쁨'을 의미한다.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에 해당하는 '타 프로스 에이레넨'(ta pros eirenen; what would bring you peace)에서, 전치사 '프로스'(pros)가 '~에 속한' (belong)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문자적으로 '평화에 속해 있는 것들'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말씀과 행적을 통해 당신 자신에게만 진정한 구원과 평화가 있음을 보여 주신 것들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원과 충만한 은총을 만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끝으로 42절의 '감추어져 있다'에 해당하는 '에크뤼베'(ekrybe; it is hidden)는 부정과거 수동태인에,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져 지금과는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에 감추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효력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진리를 계속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단어가 수동태로 쓰였는데, 하느님께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완고해진 그들의 지성을 어둡게 해서 예수님께 관한 일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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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0일 목요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
이번 한 주 동안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여정을 복음으로 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수난하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예수님의 마음을 엿보게 됩니다.
독백과도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루카 19,42)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19,42).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도시가 평화를 알지 못하고 평화를 볼 눈이 없음에 깊이 탄식하십니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입니다(이사 32,17 참조). 그리고 정의는 ‘그의 것을 그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마땅한 흠숭을 드리고, 내 이웃을 그 존엄에 맞갖게 존중해 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러나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예수님을 없애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를 지키려 합니다.
평화와 어울리지 않는 수단으로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1219년, 십자군 전쟁의 역사 속 가장 치열하였던 시기에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 하나가 이슬람 진영 한복판에 찾아들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그는 이 전쟁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며 하느님의 뜻은 오로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형제적 삶을 사는 데 있음을 선포하고자, 무장하지 않은 ‘평화의 사절’로 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오늘날까지 ‘거룩한 땅’ 이스라엘에 머무르며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있는 성지들을 돌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평화의 발걸음에서 시작되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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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120. 연중 33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공유
김건태 신부님_너를 찾아오신 때
이스라엘을 성지 순례하다 보면,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 올리브산 중턱에 ‘눈물’ 모양으로 건축된 작은 기념 성당 하나를 방문하게 됩니다. 경내 입구에 위치한 흰색 표지판에는 Dominus Flevit(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흔히 ‘눈물 성당’이라 부릅니다. 성당 내부 구조도 특이한데, 미사를 봉헌할 때 예루살렘을 내다볼 수 있도록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도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로 보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서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순례자들은 도성 가까이 이르자, 해오던 대로 시편 122편 ‘순례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집으로 가세. …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그러나 예수님은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다윗이 여부스족을 몰아낸 다음 수도로 삼고, 뒤를 이어 솔로몬이 성벽과 성전과 왕궁을 건축한 이래, 예루살렘은 정치적이며 민족적, 종교적인 중심지로 자리합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하느님의 거처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이 강조되면서 예루살렘의 신성불가침 사상이 싹트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상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이 성전에 머무신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하느님이 성전에 머무실 수 없다면,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성전은 한낱 인간이 세운 건조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언자들은 정의와 진리와 평화를 멀리하던 백성을 향해 일찍부터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어, 기원전 6세기 초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수많은 지도 계급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 오십 또는 육십 년에 걸친 처절한 바빌론 유배생활을 거쳤음에도, 크게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때가 되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현존은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요 호소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를 거부하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결심으로 당신이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시게 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자유를 존중함으로써, 도성을 파괴로부터 구하시는 데 무력한 존재로 머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눈물을 흘리십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상태를 고집하는 이 양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을 되찾아 기쁨을 나누는 감정과 같은 모습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순례자들이 도성의 평화를 위해 노래하는 동안, 예수님은 백성, 특히 백성의 지도자들의 눈을 닫아 버린 오만과 자만을 애도하십니다. 이들은 결코 평화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파괴 예언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70년의 예루살렘 함락에 관한 세세한 점들을 기초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예고가 선포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해방을 선사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려 하시나, 사람들은 이 구원의 선물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살해할 것이며, 믿음이 아니라 불신의 열매를 거두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 진노의 심판은 더는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은 인간의 죽음을 원치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지금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 역시 예루살렘의 주님들과 같은 모습을 고집한다면, 슬픔, 나아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마냥 부족한 존재이지만, 회개하여 하느님을 향하는 것 자체가 그분의 뜻임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 하루 하느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뜻을 살피며 채워나가는, 귀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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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14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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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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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인천교구 현정민 바오로(내가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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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께서 나 때문에 우십니다!>
혹시 최근 누군가 때문에 눈물 흘리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 그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돌아서서 남몰래 홀로 흐느끼는 그의 모습이 안스러워서, 그가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과 상처가 극심해서...
갈 길 잃고 방황하는 자녀들, 잘못된 길이 분명한데, 끝도 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자녀들 때문에 밤낮없이 기도하며, 대성통곡 터트리는 부모님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부모라는 게 뭔지, 자식이라는 게 뭔지...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도 우십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 때문입니다. 동시에 바로 오늘 우리 때문입니다. 그리로 가면 멸망의 길이 뻔한 데도, 그 어떤 타이름이나 경고의 질책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그 길로 직진함의 끝이 얼마나 참담하고 혹독한 것인지를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이시기에,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루카 19, 43-44)
사실 루카 복음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리는 자비의 책입니다. 인간 말종 자캐오에게 구원을 확증하셨습니다.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던 예리코의 눈먼 사람에게 새 삶을 선물하셨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던 나병 환자들에게 보송보송한 피부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당대 유명한 죄 많은 여인의 마음을 받으시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 우리의 결핍, 우리의 방황, 우리의 죽음을 결코 견딜 수 없었던 주님께서 오늘은 우리 때문에 우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왕의 왕, 삼라만상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가련한 한 인간, 바로 ‘나’ 때문에 우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롭고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런저런 고통과 상처 때문에 힘겨워하고 있는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 또 다시 우실입니다. 또한 끝까지 주님께로 돌아서지 않는 우리를 보고 우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천년 전 영적인 눈이 먼 동포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도성,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끝끝내 우상숭배에서 돌아서지 않는 유다를 바라보시며 우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를 보시고 또 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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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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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 4년을 버티게 한 단 하나의 습관>
찬미 예수님!
우리는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대니얼 디포가 완전히 창작해낸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알렉산더 셀커크(Alexander Selkirk)'라는 스코틀랜드 항해사의 실제 체험이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와 '알렉산더 셀커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크루소는 '난파'라는 사고로 무인도에 갇혔지만, 셀커크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무인도에 내렸습니다.
1704년, 셀커크는 '싱크 포르(Cinque Ports)'라는 배의 항해사였습니다. 그는 성격이 거칠고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낡아서 곧 침몰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선장과 대판 싸운 뒤 "이 배를 타고 가느니 차라리 무인도에 내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칠레 연안에서 670km 떨어진 '마스 아 티에라(Más a Tierra)'라는 무인도에 정말로 버려졌습니다. 그는 곧 다른 배가 자신을 구조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그곳에서 그가 보낸 시간은 무려 4년 4개월이었습니다.
그가 섬에 내렸을 때 가진 것은 옷가지, 칼 한 자루, 도끼, 그리고 '성경 한 권'뿐이었습니다. 첫 몇 달간 그는 해안가에 머물며 절망적인 고독과 싸워야 했습니다. 밤마다 해안으로 몰려나와 울부짖는 수천 마리의 바다사자 떼 소리는 그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오늘 복음 속 예루살렘처럼, 완벽한 혼돈과 멸망의 공포(세상의 혼란) 한가운데에 던져졌습니다.
그를 미치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규칙적인 일과'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과의 중심에는 '아침'과 '저녁'의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해 준 우즈 로저스(Woodes Rogers) 선장에게 훗날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그 섬에서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하고, 성경을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그는 섬에 달력을 만들어 날짜를 확인하며, 특히 '주일'에는 모든 노동을 멈추고 온전히 하느님과
만나는 '방문의 때'로 지켰습니다. 그는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라는 매일의 자기봉헌을 통해, 무인도의 야만성이 자신의 내면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영적 방어벽을 쌓았습니다.
1709년 2월 2일, 마침내 우즈 로저스 선장이 이끄는 배가 그를 발견했을 때, 선원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4년 4개월을 홀로 지낸 사람이 당연히 미쳐 있거나 언어조차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셀커크는, 짐승 가죽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문명인보다 더 평온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즈 로저스 선장은 1712년에 출판한 자신의 항해 일지 『세계를 일주한 순항』에 이 놀라운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셀커크)는... 읽고, 시편을 노래하고,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 고독 속에서 자신이 이전에 살았던 그 어떤 삶에서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셀커크는 세상의 모든 평화라고 여기던 것들이 사라진 무인도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 '하느님'(어머니)을 만나는 '방문의 때'를 지켰습니다. 그는 그 규칙적인 기도를 통해 '평화'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장소'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하다가 런던 탑의 차가운 독방에 갇혔습니다. 그의 아내 앨리스가 찾아와 "대체 왜 고집을 부리십니까? 여기 감옥보다 우리 집이 더 좋지 않습니까?"라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토마스 모어는 평온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감옥과 내 집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여기도 하느님께서 계시고, 내 집에도 하느님께서 계시오." 그는 어떻게 감옥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그의 평화는 '집'이나 '정원'(장난감)에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평생을 지켜온 '규칙적인 기도 시간'(아침/저녁)을 단 하루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때'를 놓치지 않았기에, 그는 왕의 위협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진은 현대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무엇이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안정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연구했습니다. 수많은 변수 속에서 가장 강력한 요인은 '돈'이나 '학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규칙적인 가족 저녁 식사'였습니다.
아이에게 평화는 학교 등수나 스마트폰이 아닙니다.
부모이고 부모와의 규칙적인 만남입니다. 일주일에 단 몇 번이라도, 정해진 시간에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규칙적인 만남'을 가진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훨씬 안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이 '저녁 의식'은 단순히 밥을 먹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루의 혼란을 마감하고, 가족이라는 '안식처'(어머니)로 돌아와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평화를 확인받는 '방문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왜 우셨습니까? "네가 하느님께서 너희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19,44)
예루살렘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규칙적인 의식'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렉산더 셀커크와 달리, 그 제물(장난감)에만 매달려 정작 그들을 찾아오신 '하느님'(어머니)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오시는 때'에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 로마의 압제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세상'에게 평화를 구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길을 너 홀로 몰랐구나" 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기다릴 때 언제 돌아올지만 알아도 평화를 얻습니다. 평화는 때를 아는 자만의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하느님께서는 하루의 시작을 '저녁'으로 보셨습니다. 하루의 혼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저녁 기도'로 하느님을 만나 평화를 얻고, '아침 기도'로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 우리 신앙의 리듬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아.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 의식이 필요해." '규칙적으로 만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준비시킵니다.
다니엘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예루살렘 쪽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 아침-점심-저녁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평화로웠습니다. 세상의 장난감이 주는 헛된 평화에 속지 마십시오. 매일 정해진 '아침'과 '저녁'에, 나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의식'을 회복하십시오. 그 '때'를 아는 사람만이 참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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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다섯째 날에는 예전에 다니던 '동일 침술원'을 다녀왔습니다. 예전에도 허리가 아프거나, 목이 아프면 찾아가서 치료받았습니다. 원장님은 앞이 보이지 않지만,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잘 보았습니다. 원장님은 저의 골반이 많이 틀어져서 허리가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하셨듯이, 침을 놓았고, 골반을 교정하는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평소에 몸을 자주 풀어주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원장님을 찾아뵙고 치료받기로 했습니다. 며칠 전에, 예전에 자주 갔던 '엉클통'이라는 식당에 갔습니다. 식당 사장님은 20년 전에 갔던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세월의 흔적으로 머리는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변했지만, 다른 모습은 그대로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하셨습니다. 동일 침술원 원장님은 늘 같은 자리에서 '와서 보라'고 합니다. 원장님을 만난 사람은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원장님을 만난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원장님에게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저도 몇 년 동안 다녔지만, 나중에야 원장님이 보지 못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엉클통 사장님도 3번이나 식당의 자리를 옮겼지만, 늘 한결같은 맛과 친절로 '와서 보라'고 합니다. 거짓과 위선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늘 한결같은 사람이 주는 믿음과 성실함은 삶을 살아가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감춘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켜놓고 됫박으로 가려 놓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작년 12월 3일에 ‘비상계엄’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1년이 되어갑니다. 1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탄핵하였고, 헌법재판소는 그 탄핵을 인용했습니다. 6월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한국은 새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성숙한 민주주의, 평화로운 정권 교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향한 깨어 있는 시민들의 헌신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비상계엄을 막으려는 시민들이 국회의사당에 모였습니다. 비상계엄을 해제하려는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었습니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 거리에 모인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이 있었습니다. 부당한 명령에 저항하던 군인이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바다를 건너온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소금은 물에 녹아듭니다. 그래서 음식에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물은 소금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줍니다. 소금은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물과 하나가 됩니다. 그러나 ‘물과 기름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에 떠 있는 기름은 물에 녹아들지 않습니다. 물은 기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기름 역시 자신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강에 있으면서도 더 넓은 바다로 가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물과 기름 같은 관계는 사람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공동체가 때로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한국에서의 사목 방침을 고수하면 현지에 있는 신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 현지에 있는 신자들이 한국에서 온 신부님에게 현지의 상황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한국에서 온 신부님도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물과 기름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현지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사제 모임에도 잘 참석하면서 이해하고 경청하면 조금씩 현지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현지에 있는 분들이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새로운 사목의 방향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면 공동체는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물과 소금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마타티아스는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어기며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는 동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그때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마타티아스는 율법과 계명을 지켜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움에 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과 기름처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앙이 물과 기름 같은 신앙으로 겉도는지, 물과 소금 같은 신앙으로 풍요로운 신앙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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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이번 한 주 동안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여정을 복음으로 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수난하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예수님의 마음을 엿보게 됩니다. 독백과도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루카 19,42)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19,42)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도시가 평화를 알지 못하고 평화를 볼 눈이 없음에 깊이 탄식하십니다.
평화는 ‘정의의 열매’입니다.(이사 32,17 참조) 그리고 정의는 ‘그의 것을 그에게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마땅한 흠숭을 드리고, 내 이웃을 그 존엄에 맞갖게 존중해 주는 것이 평화입니다. 그러나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평화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예수님을 없애 그들이 생각하는 평화를 지키려 합니다. 평화와 어울리지 않는 수단으로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1219년, 십자군 전쟁의 역사 속 가장 치열하였던 시기에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 하나가 이슬람 진영 한복판에 찾아들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입니다. 그는 이 전쟁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며 하느님의 뜻은 오로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형제적 삶을 사는 데 있음을 선포하고자, 무장하지 않은 ‘평화의 사절’로 이 전쟁에 뛰어든 것이었습니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오늘날까지 ‘거룩한 땅’ 이스라엘에 머무르며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있는 성지들을 돌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평화의 발걸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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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9,41-44: 네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신다. 그분의 눈물은 단순한 인간적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평화의 때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데서 오는 구원의 아픔이다. 그 눈물은 단지 2천 년 전 한 도성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각자의 마음을 향한 주님의 눈물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42절) 평화(shalom)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서 누리는 충만한 삶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분의 초대를 거부했다. 예수님은 서기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성전과 도성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신다. 이는 하느님 은총의 때를 알아보지 못한 영적 파멸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4절) 즉, 하느님이 다가오시는데도 눈이 가려져 그것을 보지 못한 비극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셨다. 이는 그 도성이 파괴될 것을 아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의 구세주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10,113)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의 눈물을 해석하며 말한다. “주님의 눈물은 곧 하느님의 자비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울고 계신다. 우리가 죄 안에 있을 때 그분은 우리보다 더 깊이 우리의 비참함을 아신다.”(Sermo 362,1) 즉, 주님의 눈물은 심판의 눈물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사랑의 눈물이다. 사목 헌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인류 역사의 중심과 정점은 주님의 파스카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은총의 때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다.”(10항) 교리서는 “하느님은 끊임없이 인간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자유롭게 응답할 것을 기다리신다.”(2567항)고 가르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네 삶 안에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있는가?” 예루살렘이 눈이 가려 메시아를 거부했듯이, 우리도 일상에서 하느님의 방문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우리가 눈을 감고 있으면 은총의 때는 그냥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눈을 열어 받아들이면 우리의 삶은 참 평화로 충만해진다.
예루살렘을 보며 흘리신 주님의 눈물이 더 이상 우리를 향한 눈물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매 순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응답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하도록 해야 한다. “주님, 저희 눈을 열어 주시어, 평화를 가져오는 길을 알아보게 하소서. 은총의 때를 놓치지 않고, 당신의 초대에 응답하여 늘 깨어 있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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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루카 19,41-44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루카 19,42)
감추어진 불신 거슬러 한결같은 믿음
잿빛어린 체념 거슬러 새하얗게 희망
물어뜯는 증오 거슬러 물들이는 사랑
검게물든 저주 거슬러 밝디밝은 축복
게걸스런 홀로 거슬러 신명나는 함께
날카로운 맞섬 거슬러 부드러운 스밈
무자비한 누름 거슬러 곰살맞은 섬김
가차없는 버림 거슬러 따사로운 품음
오만스런 차별 거슬러 살맛나는 평등
나살려는 죽임 거슬러 모두위한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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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루살렘 멸망 예고는 ‘나’를 향한 경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1-44)
1) ‘예루살렘 멸망 예고 말씀’은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도시 하나만의 멸망을 예고하신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의 멸망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옛날의 사건은, 교훈이 되긴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인간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는 심정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3-24)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사람들이고, 믿음도 거부하고 회개도 거부하면서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큰 슬픔을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나’를 보시면서 기뻐하실까? 아니면 눈물을 흘리실까?>
2) 앞의 13장에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3,34-35)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심정을 잘 나타냅니다. 철없는 어린 자녀가 고집을 부리면서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을 보는 부모의 심정......
3)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은, “지금이라도 회개한다면”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무한정’이 아닙니다. 당신이 정한 심판의 날이 닥치기 전까지만 기다려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모르니까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라는 말씀은, 안 보여서 못 본다는 뜻이 아니라, 보이는데도(볼 수 있는데도) 안 본다는 뜻입니다. 회개할 줄 몰라서 회개를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에 관심이 없어서, 또 회개하는 것이 싫어서 안 하는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것을 몰라서 사람들이 회개를 못한 것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이 말씀의 뜻은, “하느님께서 찾아오셨는데도 믿기를 거부하고 맞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복음을 선포했는데도 사람들이 믿지 않은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4) 하느님께서 찾아오셨다는 말에서, ‘나인’ 고을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7,13-16)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음을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5)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것’과 또 온갖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에 감사드리는 것은,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바로 그 감사에서 진실한 회개가 시작됩니다. <회개하기를 싫어하거나 거부하면서 예수님의 반대쪽으로만 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감사할 줄은 모르고 끊임없이 요구하기만 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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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눈물을 닦아드리자>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는 애끊는 바로 그 마음입니다.
예루살렘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적개심과 더불어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 교만과 아집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라자로의 무덤에서(요한 11,35). 눈물을 보이셨고, 오늘, 불신앙 때문에 우셨고(루카19,41) 겟세마니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히브5,7) 우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참다운 평화는 예수님에게서 만이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면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찾지 말고 한 번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근본에로 돌아가서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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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읍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 시대에 유다교의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중심축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신앙생활의 정점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기원후 70년 무렵 로마군에게 함락되자 그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절망감과 위기감에 휩싸입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구약이라고 부르는 성경에 자신들 삶과 종교의 중심점을 새로 잡으며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다시 정립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하였고, 새로이 겪게 될 위기와 절망과 고통의 순간들을 극복하여 나아갈 힘을 성경에서 찾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구세주 그리스도이신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특히 그들을 대표하는 상징물인 예루살렘 성읍을 향하여 눈물 흘리시며 통탄하여 마지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유다인들은 오늘날까지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위기의 순간에 그것을 지혜롭게 이겨 내는 용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절망과 고통의 순간에 자신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함께 지고 걸어가는 믿음입니다. 삶의 무게에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을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준비로 채워 나가려면,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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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노동준 안토니오 신부님]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알묘조장>
옛날 중국 송나라에 어리석은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벼를 돌봤지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옆집 벼는 별 탈 없이 잘 자라는데 자기 논의 싹은 도무지 자라날 기미가 안 보이는 겁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농부는 논에 심긴 벼를 조금씩 위로 끌어당겨 주었습니다. 벼가 조금은 자란 듯하여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간 농부는 다음날 모두 말라서 죽은 벼를 보며 땅을 쳤습니다.
이렇듯 일을 서두르다 도리어 해를 보는 것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 ‘알묘조장’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 농부와 다를까요? 섣부른 마음이 앞서 일을 그르친 적이 없을까요?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용서를 서두르는 것도, 평화의 마음이 만개하지 않았는데 그 외연만 꾸미는 것도 모두 ‘알묘조장’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생쌀이 바로 밥이 되지 않듯 마음을 꾸미는 일에도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이라며 한탄하시지요. 저는 평화도 벼와 같이 익으면 자연히 고개를 숙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이루는 일에는 많은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하루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또 인내로이 평화를 기다릴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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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참된 평화를 이루는 길>
+찬미예수님
<하버드 상위 1%의 비밀>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사회 심리학자가 중간 정도 성적의 학생들을 따로 분류한 뒤, 이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는 상위권 학생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속해서 알려주었고, 두 번째 그룹에는 상위권과 비교당하는 부정적 신호들을 차단했습니다. 세 번째 그룹에는 부정적인 신호를 차단함과 동시에 공부는 자신의 힘을 키우는 의미 있는 경험이라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 후, 학교도 선생님도 교과서도 바뀌지 않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그룹의 학생들의 성적이 두 배 가량 뛰어올랐습니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마지막 그룹의 학생들에게 이 효과가 두드러졌습니다. 우리는 이 예를 보면서, 인간이 생각보다 타인의 판단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인간은 기본적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사회체계를 신뢰하도록 성장해왔으므로 개인을 향한 부정적 신호를 받아들이고 신뢰하도록 진화해왔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을 거절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남들과 스스로를 비교하지 않고 본인의 의지와 가능성을 믿고 자존감을 높이기만 해도 우리는 충분히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유다인들은 유난히 자존감이 낮았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놀라운 특권이 있었고 계명이 주어져 있었던 만큼 이미 선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권 혹은 환경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언제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날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즉,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기 보다는 메시아가 올 날만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던 셈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울법 학자들과 같은 기득권층에서 이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한편 그들은 죄인들 혹은 가난한 이들과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이는 곧 본인이 다른 이들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부정적인 신호를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이들을 험담하고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본인보다 훨씬 우월한 사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겨야 할 경쟁상대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파생되는 열등감과 증오는 장차 그들에게 파멸을 가져올 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께서 왜 이들에게 그토록 사랑을 강조하셨는지 알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나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 다른 어려운 이들의 어려움을 공감하며 그들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 안에서 경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힘은 사회적 신분과 상관없이 누구나 무한하게 가질 수 있는 힘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긍정적 신호를 스스로 갖게 하고, 보다 보람되고 기쁜 삶이 의미 있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을 경우 그들이 맞이하게 될 파멸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주님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국을 예고하시며 끝내 눈물을 보이시고 맙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그토록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은혜를 내리셨지만 그를 외면한 결과가 어떠한 비극으로 끝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대한 엄격한 심판자로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득담은 애정어린 예고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여러 번 몸소 방문하시고 사람들에게 호소하시지 않았을 것이며 눈물을 흘리시면서까지 장차 당할 멸망을 슬퍼하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알게 됩니다.
첫째로,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벌 주기를 더디 하시고 오랫동안 참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을 죽였고 하느님이 보낸 자들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도시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마침내 자기 아들까지 보내주시어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 일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거절하니 결국 예수님은 눈물까지 보이시며 아파하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시선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종종 외면하는 오늘의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아픈 마음을 떠올려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사랑의 호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은 강요가 아닌 사랑의 호소입니다. 이 사랑은 받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은 완벽히 우리의 자유에 달려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이러한 주님의 호소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결국 그리스도를 배척한 결과입니다. 실제로 오늘의 복음으로부터 40년이 지난 기원 후 70년, 제1차 로마-유대 전쟁이 일어납니다.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불태우고 유대인 저항군을 진압합니다.
이 패배의 결과로 유대인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디아스포라가 시작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여 주님의 사랑의 호소를 거절했을 때의 미래를 반드시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자녀가 잘되길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자신의 탓으로 어긋난 길로 빠져 어긋나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부모들은 피눈물을 흘리는 법입니다.
이 때, 부모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저, 그 자녀의 회심만이 부모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종종 우리를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시는 주님을 오늘 미사 중에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사랑과 용서만이 주님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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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루살렘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루카 19,41)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마치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범죄를 두고 울었던 것처럼(1열왕 8,11), 예레미야가 유다의 유배를 두고 세 번이나 울었던 것처럼(예레 9,1; 13,17; 14,17) 우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두고 전에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루카 13,34) 하시고 탄식하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또한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리아 앞에서도 우셨습니다.(요한 11,3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 큰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브 5,7)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마태 5,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 19,42) 하고 탄식하시며, 당신께서 우시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함에 대해 우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다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가슴이 미어지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과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해서 세 번씩이나 예고(루카 19,43-44; 21,20-24; 23,28-31)하시고, 그것을 종말을 예시하는 역사적 심판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울음과 말씀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적 경고임과 동시에 회개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당신의 ‘눈물’로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도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3년 ‘람페두사 난민 방문 미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는 울음과 연민의 경험을 상실한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에게서 우는 능력을 빼앗아갔습니다. ... 누가 울고 있습니까? 누가 오늘 이 세상에서 울고 있습니까?”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뜻을 외면하여, 또 다시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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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주님!
오늘 당신의 뜻을 알아듣고 당신을 울리지 않게 하소서!
세상을 보고 울 줄을 알고 아파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고통에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찾아오신 때를 알게 하시고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평화를 이루게 하시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당신을 알게 하소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드리고, 당신의 눈에 웃음을 꽃피워 드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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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평화 이기주의>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은 전체가 갈릴래아에서 얼마 동안 활동하시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루살렘 상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 33주간 월화수요일 삼일은 예루살렘 길목인 예리코에서 복음을 선포하신 얘기를 들었고 오늘은 아주 특별한 얘기를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우시는 것은 복음 전체를 놓고 볼 때 아주 보기 드문 장면입니다. 제가 알기로 두 번밖에 없습니다.
왜 우십니까?
예루살렘이 폭삭 망할 것이기 때문이고, 예루살렘이 왜 망하냐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 아이러니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이름이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와 정반대로 평화가 제일 없는 곳이 아닙니까?
일반적으로 평화가 없는 것은 평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평화는 우리 인간이 그렇게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왜 평화 의지는 없는 것입니까?
평화 이기주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평화롭기 바라지만 같이 평화롭기를 바라지는 않기에 결과적으로 나만 평화롭기를 바라는 꼴이 됩니다.
평화공존이라는 좋은 말을 우리가 알고 있지만
나만 잘살려고 하고 내가 잘살기 위해 너를 눌러야 하고, 심지어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기에 은근히 남이 불행해지길 바랍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 나는 버스 전용차선을 막힘없이 달리면서 다른 차들은 거북이걸음으로 가는 것이 미안하지 않고 오히려 은근히 기분이 좋으면 그것이 바로 행복 이기주의인 것이지요.
나만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나 나만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나 이 ‘나만’이 행복이나 평화 문제에서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 평화롭고 행복하고, 우리 모두 같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같이 평화롭고 행복해야 나도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을 가르치시는 주님이 평화의 임금이심을 예루살렘이 모르고 거부하다가 마침내는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그 평화를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예루살렘처럼 이 평화를 거부하고 평화 이기주의를 살고 있진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과 내일 김장 김치 담그는 날이라 제가 새로운 강론을 올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양해 바라고, 아직 신청하지 못한 분은 오늘 내로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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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루카 19,42ㄱ)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자!>
오늘 복음(루카19,41-44)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복음에서 구체적인 표현으로 언급되고 있는 예수님의 눈물은 '오늘 복음'과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흘리신 눈물'(요한11,28-37)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요한 11,35)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19,44)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평화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는데,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루살렘이 평화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 예수님 예고대로 예수님 부활과 승천 후의 때인 기원 후(AD) 70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그것은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알아보는 것'이고, '구원과 부활에로 우리를 이끄는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잡고 평화이신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가,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성사적 시각(영적인 눈)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 독서는 마카베오서의 말씀인데, 모진 박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전합니다. 곧 '엘아자르의 믿음(2마카 6,18-31/화)과 '일곱 형제를 둔 어머니와 그 아들들의 믿음'(2마카 7,1.20-31/수)과 '마타티아스와 그 아들들의 믿음'(1마카 2,15-29/목)을 전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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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루카 19,42)
늦가을 끝자락의
평화처럼,
평화는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내려놓고
멈추어 서는
자리에서 조용히
스며드는 하느님의
깨끗한 계절입니다.
하느님 없는
평화는 끝내
무너져
내립니다.
예루살렘의 문제는
평화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와 있는
평화를 알아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평화는
하느님과의
바로 선 관계이며
우리의
내적 통합이며
공동체의 조화와
창조 질서의
회복까지 포함하는
총체적 구원입니다.
평화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어떤 제도나
정치, 율법이 아니라
평화이신
바로 예수님
자체이십니다.
참된 평화는
방법이 아니라
인격이며,
계획이 아니라
은총이며,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앞에 오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장 위험한
우리의 교만이
다름 아닌
참된 평화를
언제나
가로막습니다.
우리의 교만은
이기적인
분주함과
은총의
무감각으로
드러납니다.
평화는 복잡한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하느님을 바라보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평화는 당면한
문제 해결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신뢰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거부하는
우리들입니다.
평화를
외면하지 않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평화는 오늘,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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