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6: 1-2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가 처한 환경도 또 신자의 거룩성도 그 훼손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경건성이 보존되고 유지되며 우리 안에 진리가 보존되고 유지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생명을 담보하는 심각한 전투가 신자들의 생활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유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 1절은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입니다.
1) 모세는 지금까지 순서대로 하나님을 순수하게 섬기고 있는 열 족장들을 말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가족들도 부패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설은 노아의 500년의 기간보다 그 이전의 기간을 더듬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홍수의 역사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서론에서 모든 세상이 철저하게 부패했다는 사실과 그 결과로 인해 거의 아무 것도 하나님께 속한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이 모두가 팽배되어 있는 변절에 말려 있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다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서는 다음의 원리를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즉, 그 당시 세상은 마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것과 같았습니다. 셋의 가족들은 하나님을 순수하고 정당하게 섬기는 것을 무척 애를 써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머지 사람들은 그 생활에서 떨어져서 타락해 버렸습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목적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가 어느 곳에서든지 팽창하고 통치되어야 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자체를 배신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멸시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락한 미신들과 야합하여 간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권을 택해 놓으신 작은 부분이 반드시 타락한 자들과는 구별되게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들, 즉 셈의 후손들이 가인의 자녀들과 혼합되며 다른 망령된 인종들과 혼합되는 것은 그들로서는 가장 근본적인 배은망덕의 처사였습니다. 그들이 자진해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박탈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질서를 그릇되게 하며 혼란시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그들 가운데서 아름다운 자를 골라서 아내로 삼았다고 해서 그토록 가혹하게 정죄했다는 것은 얼핏보면 너무 심한 것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첫 번째로, 알아야 될 것은 여호와께서 확립해 놓으신 구별을 범하는 것이 결코 작은 범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다른 가증스런 민족들과 구별되는 것은 엄격하게 준수되었어야 할 신성한 제도이었습니다. 그 제도는 하나님의 교회를 이 지상 위에 존립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세째로, 영육간의 혼합이라고 하는 그 질병은 정말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치유책을 받지 않고 배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여기서 그 사실을 가장 극도의 무질서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특이하고 감추어진 보화로서 그분 자신에게 속하도록 구별해 놓으신 경건한 자들의 아들들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에 그런 극도의 무질서가 빚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2) 천사들과 여자들이 서로 성관계를 한 것에 관하여 고대의 꾸며낸 이야기는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모호성으로 인하여 여지없이 반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식한 사람들이 그처럼 황당무계하고 엄청난 헛소리로 터놓고 떠들어대는 말에 매료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또한 갈대아의 역학가는 귀족의 아들들과 하층 계급의 딸들과의 사이에 무질서한 결혼이 정죄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과의 차이를 시사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은 각각 전혀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기원 역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분이 자신을 위하여 대대로 뽑으신 양자(養子)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나머지 사람들은 원래의 상태대로 남아 있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 반론을 제기하여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신앙과 순종을 배반한 수치스런 자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쉽습니다.
영예는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 때때로 그들이 영원한 선택과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합법적인 상속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양우리 안에 많은 늑대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외적인 부르심과도 관련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사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지만 그래도 주께서 그들을 부인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이름을 취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들에게 그토록 명예로운 이름을 주면서도 모세는 그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을 버림받은 자들로서 비하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2. 2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입니다.
모세는 아내를 고르는 면에서 아름다움에 관심을 쏟아야 했던 사실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할 수밖에 없다고 못박아 단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결혼 문제를 오직 정욕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던 사실을 모세께서는 정죄의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결혼은 하나님께서 내신 제도로써 참으로 신성하기 때문에 절대로 안목의 정욕에만 사로잡혀 결정하여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연합은 모든 생활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불가불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도 보았지만 여자는 남자를 도와주는 자가 되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적인 매력에 지나치게 탐닉하다가 정신을 빼앗겨서 중요한 점을 생각하지 않고 잃어버린 때에 우리의 성욕은 야수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보다 분명하게 그들의 정욕의 난폭한 격렬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세께서는 그것에 대하여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로 삼고” 라고 표현함으로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들이 지니고 있는 필수적인 재능으로 자기들의 선택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정욕의 지시만을 따라서 맹종하며 무작정 방황하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귀한 사실을 교훈 받고 있습니다. 절제는 거룩한 결혼 생활에서 사용되어야 하는 귀중한 덕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독하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경범죄가 아니라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여기서 성도들의 아들에게 정죄 되고 있는 것은 간음이 아니라 자기들이 직접 아내들을 골라내는 데에 너무나도 지나치게 방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지나치게 탐닉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진정하게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불신자들과 같은 멍에를 매게 될 때 자연히 그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밖에 다른 결과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발람의 극단적인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저주하는 능력이 그에게 취해졌을 때에 그는 미디안 사람들에게 여자들을 은밀하게 보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여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신앙의 결점을 갖게 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처럼 지금 모세가 언급하고 있는 족장들의 아들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려주신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그 자체가 비통한 죄악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신성한 결혼을 자기들의 정욕대로 좇아서 추구하고 불법적인 결혼을 하는 한 언제나 그 비통한 죄악은 벗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 더 사악한 것은 자신들을 사악한 자들과 뒤범벅이 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모독했을 때에 그들의 신앙에서는 멀리 떨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부패성이 전자의 뒤를 따라 다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환경이 보존되면서 발전과 향상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우리 안에 경건이 보존되고 진리가 보존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중에 참 자유를 누리는 것이요, 이것이 성숙 곧 성황의 지름길입니다. 경건과 진리는 홀로라도 보존되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를 이루는 일에서도 이것이 변치 않고 유지되며 발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