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는 많은 문제에 해답을 주었지만 삶의 여러 단계와 양상에 대한 통찰을 주었고 더욱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전체적인 안목을 주었다.
바바를 통한 인도 철학에 와서야 비로소 나는 전체적으로, 우주적으로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God에서 G는 generator(창조자) O는 operater(유지자) d는 destructor(파괴자)라고 한다.
기독교에서 나는 주님을 오직 ’창조자‘로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왜 이렇게 파괴와 어둠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이나 인간의 삶이나 파괴와 그에 따른 고통이 늘 있었다. 나는 예민하고 감성적인 터라 그런 파괴와 고통이 늘 두렵고 아파서 신에게 물었다. ”당신이 신이라면, 사랑이라면 이 파괴와 고통은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만약 인도철학에서 파괴자로서 신의 속성을 알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도 근원적인 괴로움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이제 샨티는 노년으로 몸이 파괴의 과정에 가까이 있다.
어쩔 때 거울을 보면 나도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주름지고 늙어 있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간다. 다들 그러하니까
그러나 이기적이고 욕심을 부리면서 살아온 모습이 약간 추하게 각인되어 있어 부끄럽고 민망하다,
그러다 다시 인도철학으로 돌아온다.
이 우주의 진화는 모두 수축과 팽창을 하면서 나선형으로 상승한다고 바바는 말씀하셨다. 창조, 유지, 파괴는 일종의 파동이라는 것, 말하자면 수축과 팽창의 운동이다.
이 우주는 끝없는 수축과 팽창의 운동이라는 진동 속에 있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늘 변하면서 흐르는 진동에 불과하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찰라적으로 변하는 진동의 춤이다.
아직 이기적인 수축의 기운이 샨티의 얼굴에 남아있는 것도 ’소위 나의 마음과 몸이라고 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옷이 좀 더럽다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바잔에
”You are the grey sea.(당신은 잿빛 바다) In a dress of broken lace(다 떨어진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은)...“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처럼 참나인 내가 떨어진 옷을 입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 만물, 모든 인간이 다 동등하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나 예수님이나 근원에 있어 동등하나 유다는 아직 무지력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늘 ”깨어나라“고 하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라는 군중의 무리에게 ”저들이 모르옵나이다. 용서하소서“라고 했던 것이다. 바바도 새벽의 노래 1번에서 ”무기력한 잠에서 깨워주세요“라고 했다.
우리가 수행을 해야하는 이유는 더러운 옷을 빠는 것과 같다.
샨티도 게을러서 옷을 잘 안 빨아서 더러울 뿐이니 올드마르기 사는 모양새가 별로라고 흉보지 말아주길! 옷을 벗으면 어느 누구나 동등하다.
이 나이까지 살고보니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살아온 삶을 보아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때를 지나가면 반드시 편한 때가 온다. 마치 만물이 수축하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이 세상 만물은 무엇이나 거기서 벗어난 예란 없다.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은 반드시 그만큼 추락하게 되어 있고 지금 힘든 사람은 삶이 펴지는 시기가 온다. 성경의 전도서에서도 ”무엇이나 돌아간다. 세상만물 저마다 때가 있느니...태어날 때와 죽을 때가 있고...너를 품에 안을 때가 있고 품에서 내칠 때가 있다...“고 쓰여 있다.
살아오면서 주변 사람들을 보니 그 부모 때에 고생을 하면 자식 때에 좀 펴지고 부모 때에 떵떵거리면 자식 때에 고생을 하는 수가 많다. 개인적으로 나도 젊어 심하게 고생을 했더니 나이 먹어 좀 나아졌다.
지금 고생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아지게 되어 있다. 다만 진동의 주기는 모든 만물이 다 다르다. 느리고 얕은 진동, 빠르고 높은 진동,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르다. 샨티도 아들과 딸의 진동의 주기가 몹시 다르다.
국가적으로 우리나라도 그동안 주변강국의 틈새에서 분단국가로 쫄고 힘들게 살았으니 이제는 펴지는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요사이 통일의 기운이 감돌고 트럼프나 김정은같은 만화적인 캐릭터들이 나와서 생각지도 않은 역할들을 하지 않은가.
길게 보아서는 이생에서 고생을 하면 다음 생에서 펴지고 하지 않을까
우주의 큰 주기에 의하면 지금 지구별은 파괴의 때(요가에서 깔리유가라고 함, 증산교같은 데서도 비슷한 말을 하는 듯함)가 지나고 새로운 창조의 때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 바바는 이 시대를 ’새벽‘이라 하셨다. 필연인지 바바의 이름 ’프라밧 라인잔 사카르‘에서 프라밧이 새벽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프라밧 상키타가 ’새벽의 노래‘이다.
빛이 나타날 즈음 어둠이 극심한 법, 힘들고 때로 어지럽기도 할 것이다. 힘들면 쭈그리고 그때가 지나가게 두라(샨티 스타일). 바바는 무조건 ’어둠에 굴복하지 말고 나아가라‘하셨다
이제 창조의 때를 맞아 새벽의 노래를 부르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시소놀이를 하면서 해를 즐기자
첫댓글 삶의 경험이 진하게 녹아있는 글이 힘을 주네요...샨티지 사랑해요..우리 같이 빨래 열심히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