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와 나
이 드라마는 농촌을 무대로 했을 뿐이지 결코 농촌 드라마가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래서 그리워하는 인간의 심성을 다룬 휴먼 드라마입니다.
나는 이 드라마를 하면서 사람 사는 도리와 인간다움을 배웠으며,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롭게 사는 일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인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교과서 같은 드라마였습니다.
한 회에 한 편의 이야기로 끝이 나지만 보는 이의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재미있어서, 가슴이 찡해서, 입싸고 욕잘하는, 그리고 은근히 회장님을 좋아하는
일용 엄마의 주책이 귀여워서, 그리고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날 때 가만히 계시던
회장님의 한마디가 너무 옳아서.......
시어머니 모시고, 남편 섬기고, 자식 시중 들고, 며느리 거느리고 살면서도
어디다 자기의 가슴을 열어보이지 못하는 어머니가 아주 가끔 속상할 때면
광에 앉아 남편이 먹다 남긴 소주을 마시며 넋두리하는 것을 가여워서......
저것이 우리나라 여자들의 삶이구나 싶어서.
큰 아들은 시인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만년 군청 과장입니다.
그래서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시골길을 자건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그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짓는데, 정직하고 땅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농사짓는 사람으로서 비애와 설움을 이기지 못해 서울 가서 막노동이라도 할까
생각하는, 하지만 생각뿐인 농부입니다.
큰며느리는 남편을 사랑해 서울의 좋은 대학을 나오고도 이 집에 시집 와 가끔은
자신의 열정이 옳았던가 생각하지만 집안을 평화롭게 만드는 지혜로운 여성입니다.
둘째며느리는 이기적이고 얌체이지만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는 미워할 수 없는
며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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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는 해외에 있는 교포들에게 조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드라마였고,
시청자들에게 저렇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구나라는.
저렇게 정답게 살고 싶다는 감정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드라마가 시작되고 10년 동안 나는 정말 자부심을 갖고 어머니 역을 연기했습니다.
김회장 댁에 처음 전화 놓던 날, 친정이 없는 이 엄마는 식구들이 다 잠들었을때 이불
속에서 돌아가신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참으로 비현실적인 연기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연출자에게 부탁해 꼭 필요한 스탭 말고는 다 나가게 하고 정말 그 심정이 되어
연기했고, 방송이 나가고 한참 동안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며느리가 이 집 식구된 지 오래 됐으니까 어머니가 '곳간 열쇠'를 물려주는 이야기를 다룬,
2부에 걸쳐 방송된 '곳간 열쇠'는 당시 정치 상황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권좌에서 내려올 때를 아는 어머니, 하지만 섭섭함을 감출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혼신을 다해 연기했습니다.
이 드라마는 특별히 누가 주인공이랄 수 없었습니다. 그때그때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주인공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출연 인물 전부가 다 주인공인 드라마였습니다.
실제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요.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 아닌가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작가가 더 이상 쓸 소재가 없다고 집필을 거부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쓸 소재가 없다고 집필을 거부했습니다.
연습할 때부터 슬퍼서 울고, 재미있어서 웃고, 정말 옳은 얘기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그런 내용을 끝없이 창조해내라고 요구할 순 없는 일이었습니다.
방영 20년이 가까워오면서부터는 이렇게 방송을 질질 끌고 가는 것은 처음의 감동을
하루하루 부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흰머리 가발을 쓰고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전혀 창조적인 연기가 필요하지 않은
박제된 인형이었습니다. 옛날의 지혜롭던 어머니는 간 곳 없고 며느리들과 말다툼이나
하는 그런 엄마로 변해 있있습니다.
밤새워 어떤 인물을 창조해내고 숨소리조차 조절해가며 연기하던 나의 열정을 이렇게
낭비해버리는 것은 연기자로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단 한 번의 작품에 출연할지라도, 아니 그런 기회가 디신 오지 않을지라도, 흰 가발을 뒤집어
쓰고 거기 그렇게 바보처럼 앉아 있긴 싫었습니다. 하지만 널리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연기자는 그 자리에서 그냥 주저앉아 있는 것이 참으로 괴롭다는 것을.
그냥 흰 가발만 쓰고 앉아 있어도 출연료 받으니까 참 편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죽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어느덧 나의 대표작이 되어버린 전원일기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모든 다른 드라마가 그렇듯이. 그리고 이 인생이라는 드라마가 그렇듯이.
사람들은 내게 묻습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난한 아이들 찾아가는 일은 언제까지 할 건가요?
몇 년 채우고 그만둘 건가요?" 그러면 나는 대답합니다.
"그 일은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할 거예요. 왜냐하면 그건 드라마가 아니니까요.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중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체험하고 생각한 가난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아름답기조차 한 가난이었는지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우리에게 가난의 구체적 본질을 일깨우고 가르친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복되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김혜자씨를 통해 만난 아이들은 오히려
인간이기 때문에 참혹하다. 서로를 안아주라고 신은 우리에게 두 팔을 주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두 팔이 세상의 가난한 아이들을 껴안아 줄 수 있게 되기를.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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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누구도 함부로 감당하시기 힘든 훌륭한 삶을 살아 가시는 김혜자님에게 진심으로 격려와 박수를보내며,세상이 부르는 그날까지 건강 하시를 기도 합니다.
자신의 못남을, 나약함을 비난하시는 분들이여! 나의 삶에 내가 주인공입니다. 훌륭한 주인공이 되어 보십시요.
그의 인간성의 깊이와 사랑의 힘에경의를 표한다 ---- 박완서 소설가
한 사람의 고통을 위로할 수 있다면 우리는 헛되이 산 것이 아니다. 아무리 못나고 모자란 사람이라도,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엄하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선선히 내놓고, 그들의 어머니가 되어준 김혜자씨에게 감사드린다-------김수환 추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