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지휘자>라는 타이틀로 음반 4종이 출시되었습니다. 발터, 토스카니니, 푸르트뱅글러, 클렘페러 등 거장들이 남긴 교향곡과 관현악곡을 3-for-1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는 안동림 저 <불멸의 지휘자>라는 책에 기초하고 있고 내지도 책의 내용을 발췌하여 수록하고 있습니다.
다음 달 리뷰로 이 CD 넉 종의 원고청탁을 받았는데 안동림 선생님이 쓴 내지를 좀 읽어보다 눈에 익은 구절들이 많이 들어와 찾아보니 역시나 베끼기, 약간의 말과 배열을 바꾼 짜집기가 대단하여 좀 알려드리고자 이렇게 글을 하나 올려봅니다.
예를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1-1. <불멸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 편 (안동림, 2009)
브루노 발터를 흔히 로맨티스트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로맨티시즘은 결코 세기말적인 데까당스(허무, 퇴폐적인 예술 경향)와는 상관없으며 오히려 인간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성격의 하나로서의 로맨티시즘, 곧 인간성 그 자체였다. 그의 저서 ‘주제와 변주’에서 발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쟁이나 혁명 또는 정치적인 개조가 있었음에도 제1차 세계대전 불구하고 당시의 세계는 여전히 문학과 음악, 학문과 인간성이 스스로의 지위를 주장하고 십계명과 인간의 양심이 천년에 걸친 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우리의 음악이 생겨난 세계이며 인간정신의 위대한 업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세계였다.' 발터 예술의 본질이 낙천적이며 멜랑콜리한 그늘을 지니지 않는 것은 위와 같은 세계관, 음악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1-2 <클래식의 거장들> 브루노 발터 편 (열린 책들, 1996, 51~52p)
이런 경력이 보여주듯이 발터는 로맨티시즘의 체험자였다... (중략)... 다만 그의 로맨티시즘은 세기말적인 퇴폐 풍조와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인간이 본래 가진 성격의 하나로서 로맨티시즘, 말을 바꾸면 인간성 자체였다. 그것은 ‘주제와 변주’에서 뮌헨 시대를 회상하는 그의 말에 잘 표현되고 있다. <전쟁이나 혁명이나 정치적인 개조가 있었으나 그래도 세계는 변함없이 문학과 음악, 학문과 인간성이 스스로 획득한 지위를 주장하고 있었고 십계와 인간적인 양심은 천년에 걸쳐 그 지배권을 행사해왔다. 그 세계에서 우리의 음악이 탄생했고 또한 인간 정신의 위대한 업적이 만들어 낸 세계가 바로 음악이었다> 발터 예술의 본질이 낙천적이고 우수에 잠긴 분위기가 있긴 해도 페시미즘의 그늘이 없는 것은 이런 세계관, 음악관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2-1. <불멸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 편 (2009, 안동림)
그는 음악이란 정서와 결부될 때 비로소 인간의 영혼에 호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음악의 주제는 모든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으며 이 두 요소를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때에 ‘언제나 노래하기 쉽게 하는’ 성격을 쉽사리 연주에 부여할 수 있다고 한다. 발터의 연주는 강인한 의지에서 생겨난 명석함을 지니면서도 언제나 노래하는 듯한 유연한 흐름을 잃지 않은 채 서정성과 극적 성격을 그 속에 잘 조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음악관은 지난 날 유럽의 낭만적인 시대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는 고귀한 정신, 우아한 정감, 세련된 감각이 예술의 원천으로 샘솟고 있다. 모든 예술이 오랜 세월에 걸쳐 그렇듯이 축적된 결과로 생겨났다.
2-2. <클래식의 거장들> 브루노 발터 편 (열린 책들, 1996, 52p)
그는 음악이 정서와 결합할 때 비로소 인간의 혼과 대화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음악의 주제는 모두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을 동시게 갖고 있고 그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때 연주는 ‘늘 노래하기 쉽게끔’ 하는 성격을 띠게 된다고 말한다. 발터의 연주가 강인한 의지에서 나온 명석함과 항상 노래하는 듯한 흐름이 있고 그런 가운데 서정성과 극적인 성격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러한 음악관은 좋았던 옛 시대의 유럽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거기서는 고귀한 정신, 우아한 정감, 세련된 감각이 예술의 원천이고 모든 예술은 긴 세월을 걸쳐 축적된 성과로 생겨난 것이다.
3-1.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객석, 2006년 1월호, 안동림)
(멩겔베르크, 토스카니니 언급 후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이 시대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움’에 있음을 강조하며) 푸르트뱅글러는 자기의 연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강물은 차례로 변화하는 전원 풍경 속을 흘러간다. 방향도 속도도 항시 변한다. 좁은 계곡을 콸콸 흐르다가 다시 강폭을 넓혀 유유히 흐른다. 즉 물의 흐름에는 생명이 있어야 하고 중심 세력은 끝까지 계속 되어야 하며 멋대로 바꾸거나 중단하거나 억지로 막아서는 안 된다.” -> 주지하다시피 <불멸의 지휘자>라는 책은 객석 연재를 모아 낸 것입니다.
3-2. <클래식의 거장들> 푸르트뱅글러 편 (1996, 열린 책들, 127p)
(역시 멩겔베르크, 토스카니니 언급 후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이 시대를 초월하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움’에 있음을 강조하며) 푸르트뱅글러는 연주 행위를 강물의 흐름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물은 변화해 가는 자연 풍경 속을 흘러간다. 방향도 빠르기도 늘 바뀐다. 좁은 협곡을 와글거리며 흐르는가 하면 이번에는 강폭을 넓혀 유유히 흐른다. 즉 물의 흐름은 생명이 있는데 중심이 되는 힘은 마지막까지 지속되고, 결코 제멋대로 바뀌거나 중단되거나 거꾸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
4-1. <불멸의 지휘자> 후르트벵글러 편 (2009, 안동림)
수많은 후르트벵글러의 연주에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베토벤이다. 그는 베토벤과 함께 고뇌하고 외치고 싸우며 기뻐하고 그 속 깊이 침잠했다. 이것을 후르트벵글러는 ‘추체험’이라 부르고 있다. 따라서 “재현이 아니라 재창조이다”라고 그 스스로 강조했듯이 베토벤의 작품을 다시 창조한 것이다.
4-2. <클래식의 거장들> 푸르트뱅글러 편 (1996, 열린 책들, 128p)
... 푸르트뱅글러가 가장 자신있게 연주한 것은 베토벤이었다... 그는 이 대작곡가와 함께 괴로워하고 절규하고 싸우고 환희를 느끼고 깊은 내성 속으로 잠긴다. 그것을 그는 <추체험>이라 부른다... <재현이 아니라 재창조다> 하고 그 자신이 말했듯...
* 열린 책들에서 펴낸 <클래식의 거장들>은 일본에서 1990년 발매된 책을 번역한 것입니다.
5-1.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녹음 내지 (2007년 발매, 안동림)
마르찌가 활약한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1959-60년대가 전성기이다. 이 시대는 각기 질은 다르지만 리얼하고 확고한 양식성을 존중하는 연주로 세계를 이끌어간 시게티와 하이훼츠라는 두 거장의 전성기였다. 당시의 젊은 연주자들은 낭만주의적인 연주에 등을 돌리고 두 거장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마르찌도 충분히 노래하면서 단정한 조형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었다. 마르찌의 개성적인 매력은 여성다운 유연함과 따뜻하게 다가오는 친밀감, 가슴에 넘치는 청결감, 약동적인 감성을 내포한 분위기에 있다.
5-2.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녹음 내지 (2001년 발매, 나카무라 미모루?)
마르치가 활약했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40, 50년대가 그녀의 전성기였는데 이 시기는 알다시피 각각 이질적이면서 확고한 양식성을 존중하는 연주로 세계를 리드하고 있던 시게티와 하이페츠라고 하는 두 거장의 최전성기였다. 당시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낭만주의적인 연주에 등을 돌리고 이 두 거장의 영향을 받았다... 마르치도 또한 충분히 노래하면서도 지적인 콘트롤이 담긴 하이페츠 식의 단정한 조형성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마르치에게는 또다른 면, 즉 완고하게 개성적으로 노래하는 그녀만의 매력이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개성미가 강한 그녀의 연주는 오리털과 같이 세밀하면서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톤으로 친밀함이 깊은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6-1.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녹음 내지 (2007년 발매, 안동림)
마르찌는 EMI와 DG에 13매의 레코드 밖에 남기지 않았다. 그녀의 레퍼토리는 바하에서 시마노프스키, 라벨까지 꽤 길다. 하지만 후기 낭만파의 탐미적인 곡이나 곡예를 하듯 재주를 피워야하는 곡은 피했다. 즐겨 연주한 곡은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이나 그 중 슈베르트를 선호했고 그 밖에는 멘델스존, 브람스, 그리고 드보르자크와 근데 라틴계의 소품들이었다.
6-2.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녹음 내지 (2001년 발매, 나카무라 미모루?)
마르치는 EMI와 도이치 그라모폰에 13장의 레코드 밖에 남기고 있지 않다. 그녀의 레퍼토리는 바흐에서 시마노프스키, 라벨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다. 그러나 후기 낭만파의 탐미적인 곡이나 기교 위주의 곡은 피하고 있다. 즐겨 연주했던 곡에는 바흐, 모차르트, 특히 슈베르트, 멘델스존, 브람스 거기에 드보르작과 근대 라틴계의 소품 등이 있었다.
* 약력 소개는 길어서 옮기지 않겠지만 연도, 지명, 인물 등이 거의 똑같습니다. 어떻게 베낄 자료가 없어서 기존 발매된 CD의 내지를... (모르겠습니다. 2001년 CD보다 이 한 장의 명반이란 책에 이 내용이 먼저 출판되었다면 제가 잘못한 것이겠죠.)
이 정도만 하렵니다. 전 평상시에도 음반 선정에 대한 기준, 읽기 불편한 외래어의 한글 표기 등과는 별개로 안동림 선생님의 현학적인 표현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건 비전문인이 음악을 평가할 때 문학적 용어를 남발함으로서 드러내는 한계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 역시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곳곳에서 발견되는 표절, 베낌의 흔적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짧게 옮긴 것이 저 정도일 뿐입니다. <불멸의 지휘자>라는 책을 구입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거기에 출처를 정확히 밝혔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그대로 베끼고 출처라도 속 시원하게 밝히면 더 낫겠네요. 대부분 원본 쪽이 앞뒤로 읽을거리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표절(?)이 상당한 안동림 선생님의 책은 베스트셀러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클래식 관련 서적의 한계입니다. 과거 음악동아, 레코드리뷰, CD가이드, 개편된 월간음악, 레코드 포럼 등 당시의 질 높은 음악 잡지와의 비교는 말할 것도 없고 음악 관련 서적들의 수준이 어떻게 80년대, 90년대보다도 더 못한지 모르겠습니다. 또 이를 토대로 재발매나 짜깁기에 열중하고 있는 클래식 음반계를 포함, 점점 죽어가고 있는 클래식 관련 사업의 현주소가 보이는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습니다.
* 마지막으로 안동림 선생님의 글을 통해 음악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찾아내신 분들께는 이 글을 통해 제 과격한 견해를 지나치게 강조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의 비판은 결코 그러한 분들께 있는 것이 아니오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참으로 할 말 많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책과 이 책의 영향력에 대하여 저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의 결론(저가 생각하는)은 음악을 좋아하되 듣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이들 때문이다. 그러니 열심히 듣고 듣는 이들 모두가 각자의 취향과 음악의 이해력을 통하여 청자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담아야만 본인의 기준에 의한 호불호를 가릴 수 있다고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참으로 지당하시고 적절한 말씀입니다.
본문 중에 옮길까 하다 참았는데 지휘자들의 약력은 1978년 진현서관에서 발간된 <세계명곡해설대전집>의 4,5권의 내용과 대동소이합니다. 비교해서 읽으면 냉소가 제대로 피어오릅니다.
이건 뭐.. 그냥 문장만 다듬은 수준이네요..ㅡㅡ;;
윗 댓글에 소개한 1978년 판 책과 비교해 보면 더 재밌습니다. 일화야 좀 가져다쓴다 하더라도 지휘자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베끼고 있으니... 솔직히 말이 안 나옵니다. ㅋ 이렇게 옮겨써도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하는 생각은 곧 독자를 무시하는 셈이지요.
추천 음반 자체는 좋은 음반들이고 저도 상당히 좋아하지만.. 글의 표현이나 내용은 정말 좀 아니네요...;;
글을 읽다보면 엇 어디서 많이 본 문장같네.. 그래서 뒤져보면 여지 없습니다. ㅎㅎ 그나저나 형석님 요즘은 음반 추천 안 해주시나요? 형석님 글 기다린지 꽤 됐습니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