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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9일 [한가위]
루카 12,15-21
한가위는 탐욕의 종말인 성체성사의 재현
오늘은 한가위 명절입니다.
추수가 시작되는 이때는 풍요의 절기입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보릿고개와 같은 시절을 보내야 하지만, 적어도 한가위 때는 함께 가진 것을 나눠야 한다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절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로 시작합니다.
사람은 다 행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을 볼 때 더 커집니다.
그래서 나누고 싶지만, 또한 보릿고개가 걱정됩니다.
이 때문에 갈등합니다.
결국 지금 나누어도 또 채워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나눌 줄 알게 되고 관계에서 오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아이가 가난한 이와 잘 나눌 줄 안다면 그만큼 사이가 좋고 열심히 일하며 사랑 가득한 부모가 있음을 증명해줍니다.
반면 나눌 줄 모르고 자기 욕심만 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부모로부터 받은 게 없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됩니다.
탐욕은 부모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이고,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께 화살을 돌리는 것입니다.
영화 ‘블루 재스민’은 전 뉴욕의 부유한 사교계 명사 재스민의 이야기입니다.
뉴욕에서 재스민은 부유한 남편 할과 함께 초상류층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할이 결국 금융 사기 혐의로 체포되고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빈털터리가 된 재스민은 유일한 가족인 여동생 진저와 함께 살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옵니다.
진저는 언제나 언니를 부러워하였습니다.
이혼은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 중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재스민은 자신의 부와 지위를 잃은 문제와 씨름하며 새로운 삶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녀는 과거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점점 더 불안정해집니다.
그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접수원으로 일하고 컴퓨터 수업에 등록하면서 자신의 삶을 재건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드와이트라는 부유한 남자를 만나며 그와 관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전 결혼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자녀도 없다고 거짓말을 시킵니다.
청혼받고 결혼 준비를 하던 중 재스민의 거짓말이 폭로됩니다. 그리고 드와이트에게 버려집니다.
그녀는 집을 나간 아들이 악기점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엄마가 알고 아버지를 FBI에 신고하여 아버지가 죽게 된 것을 알고 엄마를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재스민은 자신보다 항상 열등했던 진저가 수수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을 보고는
질투가 나서 자신은 드와이트와 결혼한다고 거짓말하고 집을 나와버립니다.
그렇게 길거리 노숙자가 됩니다.
재스민은 왜 그리 탐욕적일까요? 얼굴도 예쁘고 돈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남편은 절대 바람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남편도 죽게 만들고 아들에게도 버려졌습니다.
또 동생이 자신보다 더 행복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숙자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사실 재스민과 진저는 둘 다 입양된 자녀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양부모가 사랑을 해 주어도 자녀들은 ‘피해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더 가져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다 받은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항상 덜 받은 사람이기에 더 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피해의식이 탐욕을 부르고 그 탐욕이 삶을 망가뜨립니다.
이미 다 받은 사람만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탐욕은 부모나 하느님을 향해 활을 당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재산을 쌓아놓으려는 부자가 바로 오늘 죽는다는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라고
일깨워줍니다.
생명도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하느님을 알게 된 것만 해도
충분한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 받았음을 깨닫고 느끼기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저는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으로부터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조금이나마 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감을 느낍니다.
우리에게 추석은 커다란 성체를 영하는 때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주심을 느낌은 성체를 영하면서 느끼는 것이나 풍요를 누리며 느끼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가위는 성체를 영할 때처럼 하느님께서 다 주심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그것으로 탐욕이 사라질 때 그 삶 자체가 주님을 찬미하는 삶이 됩니다.
덜 받았다고 믿기 때문에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다 받았다는 자존감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 때 삶이 변화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9일 [한가위]
루카 12,15-21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자신만의 왕국을 포기해야 합니다!
작년 여름 홀로 한달 간에 걸쳐 국내 성지순례를 떠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순간이었지만, 숙소 문제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날은 고마운 지인 댁에서 신세를 졌습니다.
어떤 날은 텐트를 치고 잤습니다.
어떤 날은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아주 좋은 장소가 눈에 띄어, 텐트를 치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주인이라는 분이 나타나셔서, 당장 나가라시더군요.
한밤 중에 주섬주섬 텐트를 걷는데 기분이 참 그렇더군요.
당시 나만의 공간이 따로 마련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그 작은 공간 마저 포기하라시니, 너무하신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안정된 주거 조건 속에서 복음 선포활동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이 떠돌아다니셨습니다.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카파르나움에서 베타니아로, 베타니아에서 예리코로, 예리코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렇게 떠돌고 계시던 예수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나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 복음 9장 57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주 특별한 말씀, 무척이나 알쏭달쏭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씀, 꽤나 슬픈 말씀을 건네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루카 복음 9장 58절)
공생활 기간 내내 펼쳐진 예수님의 행적을 뒤따라가보니, 예수님 말씀은 정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오래 머무신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꼭 붙들 때 마다, 나는 다른 고을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시며, 결연히 팔을 뿌리치며,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곰곰히 따지고 보니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유다 광야의 여우 한 마리, 갈릴래아 호숫가 나무 위에 깃들며 살던 하늘의 새 한 마리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이었더라면, 경치 좋고 기후도 좋은 갈릴래아 호숫가에 커다란 대저택 하나를 짓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고통받은 백성들을 당신의 발로 직접 찾아다니셨습니다.
당신 치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하는 환자들을 일일이 방문하셨습니다.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는 양떼를 찾아가기 위해 떠돌이 생활,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 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놀랍게도 공생활 여정의 마지막 순간에도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당신 사명의 종착지인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의미심장한 예언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통상 임종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방에서, 그게 아니라면 병원 침대 위에서 머리를 바닥에 대고 세상을 뜹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공중에서, 그 어디에도, 그 존귀한 당신의 머리를 대지 못한 채, 그렇게 운명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 내내는 물론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놀라운 청빈과 겸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추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부단히 자신만의 왕국, 자신만의 안락한 공간을 포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언제든 어디로든 기꺼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9월29일 [한가위]
복음: 루카 12,15-21: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일 년 동안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생명의 길을 가도록 신앙을 전해주시고, 이 땅을 물려주신 조상들의, 또 친지들의 영혼들을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다. 우리 조상들은 오늘 추석을 지내면서 일 년 동안 제때 비를 주시고, 태양을 비추어주시어 오곡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주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또 조상들의 은덕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지낸 분들이다. 그리하여 이날은 모두가 넉넉한 마음으로 술과 음식을 서로 나누며 지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고향을 찾아 부모님께로 많은 분이 가기도 했지만, 또한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이때를 기해서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그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 더욱 가족들 간에 화목한 사랑의 성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이렇게 서로 가족들이 만나는 것은 기쁘고도 감사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감사드리며 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하루 동안의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 한 주간을 마치면서 주일미사를 봉헌하면서 감사드리고, 한 달을 감사하면서 지난날 모두를 감사드릴 수 있는, 그래서 오늘 추석,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더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드리면서 우리는 우리 선조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형제들, 은인들과 친척들 모두를 기억해 드릴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신앙 안에 우리의 모든 형제였던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모든 일에 있어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기로 하여야 하겠다.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인도해 주신 하느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그분께 찬미와 영광을 바칠 수 있을 때, 우리는 보다 적극적인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서도 먼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도록 하면서 그 외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더불어 주실 것을 믿으며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모두 우리가 가진 바를 이웃과 나누며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다짐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쁨이 넘치는 한가위가 되도록 하자.
오늘 복음에서 이 부자가 왜 어리석은 자가 되었는가? 세상의 재물이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이다. 자기의 재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 그 순간에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 영적으로 파산을 했다고 하셨으며, 하느님의 눈에는 그가 전혀 부자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큰 비극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재산은 무엇이건 좋은 것이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옛 성인은 재물이란 것이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지, 소유하는 데 있지 않다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주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과 부모 형제 친척 은인들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하시도록 기도하자. 또한, 지난 1년간의 모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지금 우리와 함께 제사를 봉헌하지 못하며, 이 기쁨의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면 잠깐 머리 숙여 눈을 감고,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각자 기도드리면 좋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