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2009년 11월 10일 KBS 아침마당에 출연한 조선왕조 왕손중 마지막 왕녀(王女)인 이해경 여사의 대담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해경 여사는 조선왕조 왕손중 마지막 왕녀(王女)다
50년 전에 경제적으로 어려워 성악 공부하러 마국에 갔다
지금 입고 있는 한복은 궁중에서 어머님의 마지막 옷이라 생각하고 만들었다
요즘에는 저고리와 치마 고름이 없지만 이 옷이 궁중의 정식 한복이다.
아버지인 의친왕은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의 이복(異腹)동생이다.
의친왕비외에 후궁을 많이 두어 왕자13명 왕녀9명 등 22명의 왕손을 두었다.
순종왕도 자식이 없었고, 영친왕도 아들(이구) 하나만 있었다.
형제가 22명이지만 이름을 다 기억하는데 “아명(兒名)”으로 기억한다.
궁에서는 아명으로 불렀다. 용길 성길등 “길”자 돌림이다.
의친왕의 아명은 “평길”이다.
요즘 TV의 드라마에서는 말씨나 옷 등 여러 가지가 틀리게 나오므로 어떤 때는 화도 났지만 상업드라마를 이해하였다.
고종할아버지는 순종 큰아버지 아버지 의친왕 덕혜옹주 고모를 두었다.
노래하는 이석은 10번째 아들이며 나의 동생이다
이석(아명 명길)은 5살 어렸을 때 보고 50년 후에 처음 만나다
이석(아명 명길)은 5살 때 같이 살았는데 예쁘고 귀여워하였다
사동궁에서 살았다
(사동궁(寺洞宮)은 한성 중부 관훈동 196번지에 있던 궁으로 의친왕의 사저(私邸)이자 친왕부(親王府)이다.)
의친왕은 일본으로 볼모로 갔는데 갈 때에 일본의 강요로 한국으로 안돌아 온다는 각서를 썼는데 그래도 돌아왔다.
사동궁(寺洞宮)에서는 명절이면 22명 형제들이 다 모였다.
미국에 간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해방 후 6.25때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텍사스에서 장학금을 받고 음악공부(성악) 전공하였다
한국 이화여대에 있을 때는 피아노를 쳤다
카네기홀에서 독창을 한번하고 음악을 포기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 궁에서 살기 싫었다.
어머니(의친왕비-생모가 아님)는 매우 엄했다
먹는 것도 맛있는 것을 먹으면 안되었다
궁에서는 유모(乳母)를 “손님” 이라 불렀다
내가 학교다닐때만해도 세상이 많이 변했다
학교 갈 때는 유모와 손을 잡고 갔다.
때로는 자동차로 가기도 했다
점심은 학교 숙직실에서 조용히 먹었다
어머니(의친왕비)는 엄격한 훈계를 하셨다
“절대로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놀지 말고 왕녀의 태를 내지 말라”
사극에는 궁중생활이 화려하게 나오지만 실제 궁중생활은 매우 검소했다.
내가 살 때 특별한 일이 있어 창덕궁에 갈 때는 당의(唐衣)와 화관(花冠)을 썼다
궁중에는 과부가 많았다
과부가 되면 색(色)이 있는 옷을 못 입었다
생모인 어머니는 남치마 옥색 저고리를 입었다
저고리 끝동에는 국기(國忌)일에는 금박(金箔)을 못하게 하였다.
집에서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많이 못했다
아버지 앞에서 말을 하면 “아이들은 참여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물으시면 대답만 했다
나는 후궁인 생모와 같이 살지를 못하고 의친왕비와 같이 살면서 어머니라 부르고 살았다.
어머니 의친왕비와 겸상을 하고 밥을 먹을 때는 밥한 알도 흘리어서는 안된다
밥알을 흘리면 어머니는 “백성이 얼마나 고생하여 지은 곡식인데” 하시면서 쌀 한 톨도 하수구에 버려서는 안되었다.
밥 먹을 때 절대로 반찬 탓을 해서는 안 되고 남겨서도 안 된다
언젠가 조개젓이 상이 올랐는데 “나는 조개젓이 이상하게 생겨서 먹지 못하니까” 어머니가 조개젓 먹을 때 까지 다른 반찬을 못 먹게 하셨다.
(사동궁(寺洞宮)의 생활과 음식은 매우 검소했다
정조대왕이 사치를 못하게 법을 만드셨다
어머니는 “너희들은 절대로 사치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아라”고 엄격히 훈계하셨다
의친왕은 아침에 좁쌀죽과 암치(생선 말린것)을 조금 먹었다
좁쌀죽의 찌꺼기에 김치를 썰어 넣고 참기름을 넣어 비벼서 먹으면 맛이 있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어떻게 어울려 놀아야 할지 어려웠다
대비마마 앞에서 춤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사동궁이나 창덕궁에서 노래를 하면 과자를 상으로 주었다
불란서 인형도 주었다.
그때 부른 노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피아노를 칩니다. 붕아 붕붕----” 등의 노래였다
유모는 나를 예쁘지도 않는데 “단발 미인” 이라 불렀다
나의 생모(후궁)는 신식 여성이었다
보육학교를 졸업하고 보모로 궁에 들어 왔는데 후궁이 되어 나를 낳았다.
나를 낳고 3살이 되어도 아버지 의친왕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생모 어머니는 성질이 있는 분이라 아버지 의친왕을 찾아가서 대어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 의친왕은 (사동궁(寺洞宮)의 뒷문(출입문)을 닫으라 명하시고 생모어머니를 못 다니시게 하였다. 나는 출입이 허락되었다.
그것이 아버지 의친왕과 생모어머니의 이별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재혼을 하였다.
미국에서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에서 일을 하였는데 도서관에서 아버지 의친왕의 책을 읽었다.
아버지는 비록 후궁을 많이 두셨지만 독립운동등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버지의 묘는 서소문밖에 버려진 채로 있었는데 내가 수습하여 홍유릉밖에 어머니와 합장을 하였다.
나는 16세 때 부모가 정한 정혼자가 있었는데 그때 생각으로 “결혼은 생각을 좀더 해보자” 하는 것이 지금까지 혼자 있게 되었다.
지금 우리 형제 22명중 죽은 사람도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운현궁이나 창덕궁에 양자로 간 형제도 있다
이제는 좀 정리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