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김병우(구름)
제목이 같은 ‘길’이라는 우리나라 영화와 외국 영화를 보름 간격으로 시내 중심가에 있는 그레이스 실버영화관에서 관람했다.
우리 지역에 이런 영화관이 있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으나 한번 가본다는 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실버영화관은 오갈 데 없는 노인네들의 집합장소라는 생각이 컸다. 혼자 가기가 무엇해서 아내보고 같이 가자고 했다가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벌써 노인네 행세를 하려고 그런 데를 가느냐고 면박만 당했다.
실버영화관은 예상한 대로 복고풍이 물씬 풍기는 칠십 년대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이 찾았던 그런 분위기의 오래된 영화관이었다. 단지 관람객만 노인네들로 바뀌어 있었다. 비록 나이는 먹었으나 마음은 청춘이라고 연인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아 있는 모습이 로맨틱해 보였으며, 나처럼 외톨이 어르신들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이탈리아 영화 ‘길’은 안소니 퀸이 주연한 1954년 작으로 볼품없는 길거리 쇼를 연출하면서 도시에서 도시로 떠도는 가련한 젊은 남녀의 이야기다. 당시 암울했던 시대상을 잘 묘사하였는데, 우리네 어릴 적 동네방네 떠돌며 개구쟁이들을 졸졸 따라오게 했었던 각설이 풍경과 흡사해서 보는 내내 낯설지가 않고 정겨웠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고 했던가. 여주인공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 역시 그런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딸이 많은 가난한 집 맏딸로서 입하나 덜기 위해 어머니가 잠파노(안소니 퀸)에게 돈을 받고 딸을 판다. 팔려간 젤소미나는 짐승 같은 곡예사 잠파노에게 순결을 잃고 회초리를 맞으면서 북 치는 기예를 배운다. 고물 트럭 안에서 잠을 자면서 길거리 음식으로 연명하는 떠돌이 신세로 말이다.
그녀는 천사같이 마음씨가 고왔지만 어딘지 좀 모자랐는데, 잠파노의 친구 나자레노가 “하잘것없이 길에 버려진 돌멩이도 나름대로 다 쓸모가 있다”는 말에 용기를 얻어 자기 일에 긍지를 갖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잠파노가 나자레노와 싸우다가 그만 그를 죽이게 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젤소미나가 정신이 이상해져 잠파노의 흥행에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되자 잠파노는 잠든 젤소미나를 버리고 도망친다. 얼마 후 젤소미나는 병들어 죽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잠파노는 파도치는 바닷가에 쓰러져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막이 내린다.
그에 비하여 우리 영화 ‘길’은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제각기 사연을 가진 세 노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60년 전 세라복의 여학생과 까까머리 남학생의 풋풋한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노년의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주인공들의 애절함이 짠하게 전해져온다.
자녀들과 교류가 없어 늘 외로운 순애(김혜자)는 “늙으면 쓸데없어지는 게 죽는 것보다 두렵다”는 독백을 쏟아 놓으며 인터넷을 뒤져서 ‘가전제품 고장 내기’에 몰입한다. 냉장고. TV, 세탁기…. 멀쩡한 물건들을 돌아가며 일부러 고장을 낸다. 그렇게 불러들인 수리공을 통하여 사람냄새를 맡는다. 잘난 자식들은 하나같이 바빠서 자신의 생일마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그런 자식들에게 보라는 듯이, 생일 케이크와 잘 차려진 음식을 수리공과 마주하며 먹는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의 공허감은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아내와 일찍 헤어진 후 홀로 손녀를 키우며 베이커리를 개업한 상범(송재호) 역시 매장을 찾아와서 현장실습과 판매 전략을 꼼꼼하게 설명하는 손녀 같은 코디에게 직접 내린 모닝커피를 매일 아침 권한다. 그녀를 통해서 반세기가 훨씬 넘은 고교 때를 떠올려본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디엔가 살고 있을 첫사랑 순애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환청을 듣는다. “당신은 잘 할 수 있어요. 힘내세요!” 고장 난 보청기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얼굴이 기쁨에 넘친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혼자 사는 수미(허진)는 교통사고로 죽은 외아들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늘 괴로워한다. 급기야 자기도 죽으려고 약국을 돌아다니며 모아둔 수면제를 들고 강원도로 죽음의 여행을 떠난다. 산간오지 선술집에서 동병상련의 청년 둘을 만난다. 그들을 보면서 아들 생각에 잠긴다. 젊은이들을 그냥 죽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오히려 그들을 설득하여 같이 죽음을 면하게 된다.
노인의 외로움, 사랑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울림을 준 우리 영화 ‘길’은 외로운 노년을 맞은 세 명의 주인공이 운명처럼 하나의 인연으로 연결되는 가슴 따뜻한 옴니버스 휴먼드라마다. 가족 간의 소통에 대해 던지고 있는 영화 속 메시지가 극장을 나와서도 계속 잔상으로 남는다.
‘길’이라는 제목의 두 영화를 통해서 사람은 누구나 각기 다른 길을 가더라도 언젠가는 결국 종착점에 이른다. 끝이 없는 길은 없다는 평범한 깨달음을 얻었다.
얼마 전 고인이 된 최희준의 ‘길’을 목청껏 불러본다.
‘세월 따라 걸어온 길… 돌아보니 자국마다 사연도 많았다오.……’
(2018.10. 2)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길을 걸어가지만 종착역은 한 길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속 주인공들이 펼치는 사유의 세계가 많은 생각으 하게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직접 관람하는 기분으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천 갈래 만갈래 헤아릴수없는 수 많은 길이 있지만, 그 끝은 결국 한길이 되는것이 인생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영화같은 인생길, 아름다운 한편의 영화같은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될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길이란 두 영화를 감상하고 느낀 진솔한 감정과 작가의 철학이 담긴 의미있고 재미있는 수필 잘 보고 갑니다.
말로만 듣던 실버영화관에 앉아서 두편의 명화를 실제 보는듯이 감상을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딤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출발점이 같아도 살아 가다 만나게 되는 두갈래 세갈래... 수없이 많은 갈래길을 만나게 되고 다른 길을 걸어 가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종착역은 한 갈래 길로 통하는 그 곳을 향해 다양한 모습으로 달려 갑니다, 언제 종착역에 다다를지 알 수 없는 길, 하루 하루를 후회없도록 행복한 마음으로 걸어가야 할까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화 줄거리를 통해 삶의 다양한 길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우리 삶에는 내가 선택하는 길도 있지만 어쩔수없이 가야만하는 길도 있는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람이 걸어가는 길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외국영화의 주인공은 자기가 처한 운명을 받아들여 실아가고 우리나라의 길의 주인공은 인생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길'이라는 두 편의 영화가 간격을 두고 상영되었는데도 꼼꼼하게 챙겨보시고 영화감상문을 멋진 수필로 다듬어주셨습니다. 좋은 영화 2편을 방금 본 느낌입니다. 길은 인생이고 그 길 위에 후회없는 사랑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좋은 영화가 많이 상영된다는 실버영화관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기 다른 길을 가더라도 언젠가는 결국 종착점에 이른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진솔한 감정이 담긴글 잘 읽고 갑니다.
인생의 '길'에 대한 두편의 영화에서 진정한 삶(인생 길)이 무었이란 것을 웅변하는 진한 메세지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저도 꼭 반번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의 글에서 줄거리와 메세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젊은 세대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 인것 같습니다.
김선생님 글 반갑습니다. 세번이나 읽어봅니다. 이제 더욱 정진하시기 부탁드리며, 산악회는 그동안 잘 운영하고있습니다. 담달부터 제가 일찍 조치하여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문우로 활동하여 봅시다. 잘 읽었습니다.
인생은 다양한 나그네 길입니다. 우린 그길에 아름다운 꽃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동서양의 '길'이란 영화 각 1편씩을 대비시켜 참신하고 큰 울림을 주는 글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감동적인 글 음미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