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의불교(格義佛敎)
중국은 역사가 오래고 많은 사상가가 배출 되었고 인구가 많고 긴 문화를 이어왔기에 토착 종교와 사상이 이미 뿌리 깊게 민중을 지배하고 있었다. 다만 교주를 위주로 하는 절대 신앙이 없었기에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진 않았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가면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 심한 저항을 받았는데 이미 오랜 세월에 뿌리 내린 저들 나름의 사상과 종교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저들은 지금이나 그때나 자기들이 사는 땅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과 세계 역사의 중심이라는 자존감이 강했다. 그래서 남의 나라에서 생겨난 종교를 싫어하는 거부감이 매우 깊었다.
서기 67년 후한 ‘명제’ 때의 ‘후한서’에 불교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때 이미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세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염려한 도교와 유교인들이 여러 방해 공작을 벌리는데 도교와 불교의 겨루기인(비법분경 非法焚經)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불교를 박해는 초유의 사건인 ‘삼무일종의 폐불’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떤 종교나 다른 나라에 들어갈 때 아무 저항 없이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크던 작던 일단의 저항은 있기 마련이다. 고려나 백제의 경우는 기록상 들어나지 않지만 전혀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 때 그 백성들에게도 이미 전해 내려온 토착 신앙이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불교사에서 격의 불교란 말이 매우 중요하게 인식 되는데 격의불교(格義佛敎)란 어떤 격식을 의지한 불교라는 말이다. 소유가 늘어날수록 행복해진다는 생각에 매달리는 일반에게 비울수록 행복해진다는 석가의 가르침을 전달하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불교 사상의 핵심이라 할 반야는 비움인 공(空)을 바탕으로 한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청정하게 비워진 맑은 정신이 세상 제일의 지혜가 되고 걸림 없는 자유가 되어 삶을 평화로 인도한다는 가르침이다.
초기 경전 번역가들은 쉽지 않은 이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해 기존의 도교학과 유교학을 빌렸다. 그들의 말과 그들의 설명법을 빌렸다. 이런 일은 한참이나 이어졌고 결국 불교를 도교나 유교 사상과 혼동하게 하는 오류를 일으키기도 한다.
석가의 제자들은 성을 석씨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던 도안(道安 312~385) 스님은 격의불교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원전을 읽고 직역하는 일에 심혈을 기우렸던 분이다. 순수 불교로 회귀를 이끈 선도자였다.
격의 불교에서 벗어나서 석가님 가르치심을 직접 접하고 가르침의 본질에 합류하기 위한 움직임은 점점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인도 순례를 나섰다. 당시의 인도 순례(여행)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난이 있고 위험이 덤벼드는 험난한 길이었다.
가르치심을 보다 깊게 깨닫고, 보다 바르게 깨닫기 위해 죽음을 무릎 쓰고 나선 그들이었기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열 명에 한 둘에 불과했다. 그렇게 그들은 길에서 숨을 거두고 골짜기에서 목숨을 잃고, 짐승에게 잡아먹히고 풍토병에 죽어갔다.
위험을 알고 나선 걸음이었기에 길에서, 절벽에서, 짐승에게서, 독사에게 죽어가는 순간이 절망이 아니었고 고통이 아니었다. 목숨을 버리면서 지켜내는 소중한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중한 하나를 지키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없는 영광이었다.
송나라 즈음에 ‘한역장경’(漢譯藏經)이 이루어지는데 이 즈음까지 인도를 목숨 걸고 구법순례한 사람들은 130 여 명으로 기록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십분 일에 해당하는 열 세 명 정도가 거론되고 있다. 물론 ‘왕오천축전’의 해초도 포함 된다.
자기를 소신 있게 관리하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남을 의지해 자기를 들내는 것은 언제가 자기 본질을 잃게 된다. 당장은 이로운 듯 하지만 결국은 정체성을 잃어 자기 가치를 잃게 된다.
남을 의지해 성장을 꾀하는 일이 당장은 도움이 되는 듯하지만 결국은 자기 정체성으로 돌아가는 데 더 많은 시간과 힘을 낭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