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 매봉 교회 뒤쪽이 매봉산
유관순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작은 마을에서
유중권씨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아버지로부터 유교적 전통과 충효정신을 깨우치고, 일찍이 기독교에
입문한 가족들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신문화를 접하면서 교육에
대한 꿈과 민족정신을 키웠다.
유관순은 1915년 봄 기독교 감리교 충청도 교구 본부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인
샤프여사의 주선으로 교비장학생으로 이화학당에 수학하게 되었다.
학교근처에 있는 정동교회에 다니며 신앙심을 키우고 틈나는 대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이처럼 깊은 유관순의 신앙심은 훗날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순국할 수 있었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유관순은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만류하는 프라이 교장선생님 등을 뿌리치고 학교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나가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유관순과 5인 결사대는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도 참여했다.
이날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지금의 남산에 있었던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
외국선교사들이 아이들을 내 놓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자 국제여론을 일으킬 수 있는
외국인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유관순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향으로 내려온 유관순 열사는 동지를 규합했다. 유관순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주머니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니면서 병천(竝川), 목천(木川), 천안(天安),
안성(安城), 진천(鎭川), 청주(淸州)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음력 3월 1일에 총 궐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종용하여 약속을 얻어냈다.
드디어 거사일로 정한 음력 3월 1일의 하루 전인 2월 그믐날 저녁, 용두리 뒷산인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렸다. 이 횃불이 내일의 거사 신호이며 밀약된
동지들과의 연락 신호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3,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자주 독립
쟁취를 위한 연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이 동하여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했고
감격에 휩싸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고 이 소식을 듣고 온 일본
헌병들은 평화로운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다.
이날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총공격에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죄없는
주민 3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유관순도 체포되었다.구금되었다. 목숨을 빼앗겼다.
독립기념관에서 친구부부들을 정오에 만나기로 했으니 조금 일찍 출발하여 오전에
유관순기념관을 한번 가보자고 그가 말했을 때 당연히 그래야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내 가슴에 들끓어 올랐다. 아래의 논란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았던 까닭일 것이다
현행 한국 교과서 8종중 4종에서 3.1운동을 서술하면서 유관순 열사를 제외시켰다.
이유는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기 때문이라는 주장.
전공 연구자들은 이에 반박했다. 유관순의 항일 행적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를 폄회하는 일은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라고 주장.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과정에 유관순의 전기문을 싣도록 긴급 수정.
유관순 열사의 생가를 먼저 방문하였다. 집 앞에 세워진 웅장하게 자란 두 그루
메티쉐콰이어가 먼저 우리를 맞이하였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자 흰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그녀가 방안에서 다른 동지들과 독립만세를 결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체취와 숨결이 내게로 와 닿았는가. 마치 태극기라도 흔들며 만세를 외치던
그 물결에 휩싸인 듯 가슴이 움찔거렸다.
봉화를 올렸던 매봉산과 그녀가 다녔던 매봉교회를,그리고 기념관으로 부터 생가까지
연결된 유관순길을 만났다.촌로 두명의 아귀다툼 소리가 어디에선가 잠깐 들려왔고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저 목소리속에 깃들어 있는 강하고 질기고 억척같은 근성이야말로
유관순같은 열사를 품은 이 동네만의 기질이 아니었을까.
다행이었다. 다행이었다. 유관순 기념관은 우리가 우려한 것처럼 옹색하거나
외면당한 것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만세를 외쳤던 십팔세 소녀를
향한 우리의 존경심이 추락한 것은 아니었다.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그 소녀의
만세소리는 아직도 들려오고 있었다. 추모각으로 올라가는 길에 그를 세워두고
사진을 찍으면서도 나는 만세를 외쳐보라고 주문을 하였다. 그건 그 뿐만 아니라
나의 만세소리였으며 함께 오지 못한 다른이들의 만세소리였다. 세상 어디에도
내놔도 번듯해진 '한국인'들의 우렁찬 만세소리였다.
독립만세를 외치던 그 당시의 사진을 모형으로 만들어놓고 기념관을 방문한
사람의 얼굴을 집어넣어 사진을 찍어보도록 되어 있었다. 독립만세를 외치던
그 사람들의 피끓는 진지한 표정이 당연히 어울리건만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딱서니 아이처럼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날의 그 함성과 아픔을 아는가 모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