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20일
모슬포 쪽을 지나다 보면 다른 오름들과는 사뭇 다른 바위산을 보게 된다. 멀리서 바라보면 빼어난 곡선미, 가까이 다가서면 위압적인 수직의 벼랑, 온통 바위로 둘러싸여 제주의 오름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풍기는 오름이다. 이 오름이 바굼지오름인데, 여기서 바굼지란 ‘바구니’의 제주어라고도 하고 박쥐를 고어로 ‘바구미’라고 해서 박쥐를 닮은 모양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를 한자로 표기해서 簞(대광주리 단)山, 또는 이두식 표현으로 ‘破軍山’이라고도 한다.
10월 20일은 날씨가 아주 좋았다. 그야말로 ‘빛나는 가을 날씨’라고 해도 좋음직하다. 그날 덕수초등학교 정문에 모인 친구들은 모두 열다섯 명이었다. 특이한 일은 지금까지 우리 모임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김립이 오늘 빠졌다. 전 근무학교에서 연구공개를 하는데 특별 초대를 받아 할 수 없이 빠졌다. 아마 그 친구 하루종일 마음은 콩밭에서 맴돌았을 것이다. 대신 3주 동안 결석을 했던 은치가 우리의 환호를 받으며 나타났다. 더구나 더욱 반가운 일은 오래전부터 오름 산행을 준비해온 우리의 친구 공숙이가 처음으로 참가한 것이다. 그 동안의 노력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날씬한 몸매에 처음 나온 사람치고는 날렵한 솜씨로 앞장서서 산을 오르고 우리를 안내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건강해진 그에게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계속 오름등반에 참석하기를 바란다. 또 한사람 반가운 친구가 있다. 왕이메 등반 이후 보이지 않던 창관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참석했다. 건강한 그의 모습을 보니 반갑다.
은치와 공숙을 따라 마늘과 가을감자 제배에 바쁜 들판을 달려 산방산에서 사계리 쪽으로 향했다. 경지정리가 반듯한 드넓은 들판에는 가을 가뭄으로 스프링클러가 신나게 돌며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대정향교 표지판에서 꺾어 들어가니 바로 바굼지 오름 앞에 제주교수아카데미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주변 경치가 우리를 압도한다. 산방산의 둥근 원추형과 단산의 날카로운 삼각형의 조화, 산과 바다, 그리고 들판의 어울림, 단산 앞에 있는 대정향교(제주유형문화재 제4호)의 정원 소나무와 산과의 조화가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런 주변경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대정향교를 둘러보았다. 향교는 제주시내에 있는 것보다 규모는 작으나 명륜당, 대성전 등 있을 건 다 있고 아담하고 아름다웠다.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와 해송과는 다른 수백 년 된 소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향교 뒤쪽으로 난 등반로를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서 향기로운 꽃향기가 우리를 반긴다. 낮은 봉우리까지는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나무그늘에 앉아 땀을 식혔다. 여기서 단연 ‘은치표 감귤주스’가 주목을 끌었다. 금방 두 통이 바닥날 정도로 너도나도 컵을 내민다. 지금까지 우리는 은치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올 주스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이다. 다른 날은 쉬는 시간이면 으레 “술이 있어요.” “계란 있어요.”하던 잡상인들이 ‘은치표 주스’앞에 싹 꼬리를 감추었다.
잠시 쉰 우리는 제법 가파른 등반로를 조심하며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옛날 초가집을 이는데 사용했던 ‘새’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바위틈에 자라는 들풀들은 가을 가뭄에 축 늘어진 애처로운 모습으로 서있다. 잠시 후 정점표시가 있는 정상에 도착했다.
좋은 날씨 덕분에 정상에서 보는 전망이 그만이다. 북에서 동쪽으로 모슬봉, 정물오름, 도너리 너머 한라산이 정겹고, 우뚝한 산방산을 보며 남쪽으로 도니 용머리와 형제섬, 가파도, 마라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반듯한 기하학적인 무늬가 아름다운 들판 너머 태평양이 하얗게 빛난다. 북동쪽을 굽어보니 100m 가까운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어지럽다. 자료에 의하면 이 오름은 제주에서 최고의 연륜에 속하는 기생화산으로 오랜 세월 바람과 비 그리고 파도에 의하여 침식되어 지금은 골격단계에 이른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동쪽 끝에 있는 뾰족한 봉우리를 향했다. 그러나 조금 가다가 그 바위 절벽을 오른다는 것이 우리 일행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일임을 알았다. 우리의 앞장이 있었으면 강행했을 법도 하지만 우리는 무모한 모험을 포기하기로 했다. 우리는 경사가 매우 급한 동남쪽 등성이를 따라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뒷장부부가 길이 헷갈려 동쪽 바위산을 한참 진행하는 아찔한 일도 있었다. 긴장한 탓에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가을 날씨 치고는 너무 덥다. 우리는 교수아카데미 뒤쪽을 따라 내려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간이 열두시가 조금 넘었다. 당초 오늘 송악산까지 오를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늦어 포기했다. 모슬포 항구식당에 점심 예약을 하고 출발하려는데 일이 발생했다. 우리를 태우고 온 차 다섯 대 중 한 대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시동모터는 잘 도는데 엔진이 걸리지 않는다. 여기저기 연락하고 모두들 자기 일인 양 차를 밀기도 하고 별짓을 다해도 소용이 없다. 가까스로 카센터에 연락이 되서 30분 정도 지체하게 되었다. 여기서 차 가진 친구들은 차 안에 필히 보험증서와 보험사 연락처를 가지고 다니도록 하는 교훈을 얻었다. 1년에 두 번 무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주차장 바닥은 즐거운 회식장소로 변했다. ‘은치표 주스’에 밀려 내지도 못했던 술이며 과일이 순식간에 동나고 ‘사순표 깔개’를 깔고 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소주와 포도주 양주까지 마시며 주로 자동차에 관련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기대했던 은치의 교재연구 발표는 컨디션 관계로 다음 기회로 미뤘다.
카센터가 도착하고 우리는 항구식당에 가서 회덮밥으로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오늘 이렇게 행복한 하루가 가는구나.
첫댓글 다음 주 오를 오름은 송당리 높은 오름입니다. 만날 장소는 대천동 네거리, 앞장께서 안내 부탁합니다. 한라산은 다수결로 11월로 연기했습니다.
주차장에 편하게 자리잡고, 배낭 속 술과 안주를 탈탈 털어 마시는 술 맛이 그만이었다. 늦게 먹는 점심도 좋았고.. 오늘의 특별한 2락은 단연 그 '레간자' 덕분이었네, 너무 타박 말게!
레간자 차주가 뉘이신고? 차도 잘 맥여 다음엔 耐强自로 맹길도록 함이...... 세상의 차주들이여. 명심 또 맹심할지어다. 그 덕분에 길거리 잔치가 벌어졌다니 참가 못힌게 한이로고....
다음에 오를 기회가 있으면 동쪽 봉우리도 올라봤으면 한다.
맞아, 부담되는 사람은 잠시 쉬고 일부 만이라도 모험이 필요하다.
단산이야말로 마운틴 오르가슴을 시험하는 바위산 도장인걸, 어째 그 영험함을 못 느꼈는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