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여러 사역과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많은 모습이 있습니다. 가장 친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그의 나라에 백성(양)을 치시는 선하신 목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일줄 아는 순하고 정결한 양의 모습이 되길 소망합니다.
1. 석원태 목사 예수의 매력 - 선한 목자 예수 요한복음 10:7-15
2. 이동원 목사 선한 목자로 오실 메시아 : 스가랴 스가랴 10:1-12
3. 박정근 목사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편 23:1-6
4. 강창순 목사 목자의 음성 요한복음 10:22-28
5. 박정근 목사 나의 목자 여호와 시편 23:1-6
예수의 매력 - 선한 목자 예수
요한복음 10:7-15
석원태 목사(경향 교회)
우리는 계속해서 '매력'이라고 하는 말을 기억하며 새기는 중에 있습니다. 특별히 신약성경에서는 이 매력이라고 하는 말이 두 가지 경우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선' 혹은 '좋은'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아가도스'( )입니다. 이 말은 실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좋을(선함)뿐 아니라 눈에도 아름답고 즐거운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좋은 소식'(롬 10:15), '선한 사람'(마 5:45), '선한 양심'(딤전 1:5, 19), '선한(착한) 일'(빌 1:6) 등의 경우를 뜻합니다. 그럼에도 주로 정신적이요 내면적인 것에 중심을 둡니다. 이 말은 도덕적인 의식에 치중합니다.
또 하나는 '칼로스'( )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0) 하신 경우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말은 선함이나 아름다움, 사랑스러운 것, 우아함, 명예스러운 것들과 관계하면서 주로 눈(eye)에 호소하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기에 아름답고 또 생김새가 좋은 모습이나 잘 생겨 멋을 나타내는 사물의 경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신약성경에 이 매력이라고 하는 단어 칼로스( )가 가장 빛나게 사용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의 선언 중에 하나였던 「나는 선한 목자라」( )(요 10:11, 14)고 한 사실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그 목자', '그 선한 자'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의 목자성(牧者性)을 아름다운 자태를 눈에 호소하고 있는 칼로스( )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했습니다. 이는 그의 목자됨이 정신적이요 내면적인 사랑에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행동적으로 나타나는 가시적 모습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의 목자됨은 양된 우리에게 매력적인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그의 매력적인 목자성이 무엇일까? 선한 목자성이 무엇일까?
Ⅰ. 먼저 이 말은 거짓 목자와 대조해서 사용하신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외에는 선한 목자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짓 목자를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절에 저들은 '절도'요 '강도'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5절에 저들은 '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저들은 양을 모르고, 양도 저들의 음성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저들은 '도적'이라고 하였습니다. 12절에는 '삯꾼'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양의 우리 안에 가만히 들어와 양을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양도 제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달아나는 것은 삯꾼인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0:13). 그러므로 저들은 목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0:12). 저들에게는 목자로서의 매력(칼로스)이 전혀 없다는 뜻이 됩니다.
Ⅱ. 예수 자신만이 선한 목자, 곧 매력있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목자적 매력이 무엇일까?
1. 자기 양을 '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4∼15절에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안다'는 말 기노스코( )는 전부를 안다는 뜻입니다. 독점적인 앎, 구체적인 앎, 시종을 아는 앎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마치 성부가 성자를 알고 성자가 성부를 앎같이,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다 아는 것 같은 앎을 가리킵니다.
양의 각각의 이름도 압니다(요 10:3). 음성도 압니다(요 10:3, 4, 27). 수도 압니다(눅 15:4). 이리나 도적이나 삯꾼 앞에 약한 것도 압니다(요 10:12). 목자를 치면 양떼들이 흩어짐도 압니다(슥 13:7). 내 양, 곧 자기 양을 압니다(요 10:27). 양도 목자를 압니다. 음성을 알고 따른다고 하였습니다(요 10:3, 5, 27).
바로 이것이 그의 선함입니다. 곧 매력입니다. 예수는 자기 양을 압니다. 개인 개인을 압니다. 마음도 압니다. 몸도 압니다. 시작도, 진행도, 마침도 다 압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선함, 곧 매력입니다.
2.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17절에도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고 하였습니다. 18절 중에는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매력(칼로스)이라는 말입니다.
성경기록 시대의 팔레스타인의 유목민들에게 있어 목자와 양의 관계는 실로 생명적 결탁의 관계였습니다. 목자와 양, 우리, 목장, 곧 초원과 시내는 불가분리의 관계였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였습니다. 서로를 알기 때문에 생명적 결탁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양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동시에는 목자와 양이 함께 들판에서 야숙을 하는 임시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니면 천연적인 동굴을 이용하여 영구적인 양들의 우리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경우는 돌을 가지고 벽을 쌓아 양들을 보호하는 요새를 만들고,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지붕을 덮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밖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아치형의 문도 만들었습니다. 바깥쪽에는 넓은 울타리를 하나 더 세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도나 절도나 다른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날카로운 가시덤불을 세우고 덮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목자는 그 양들과 사실상 삶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그 꼴을 찾아 밖으로 나갈 때 목자는 문곁에 서서 그 양의 수를 헤아려 점검하고, 어두운 밤이 되어 우리로 들어올 때도 목자는 문 곁에 서서 양의 수를 한 마리, 한 마리 확인합니다. 어떤 경우 그 수가 모자랐을 때, 목자는 길을 잃은 양을 찾아 찾도록 찾아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눅 15:3∼7). 이런 경우를 총칭하여 '인도'라고 하였습니다. 앞서가는 인도, 솔선하는 인도입니다(요 10:3, 16).
이럴 때 목자는 결코 단순하고 냉정한 직업의식만 가지고 그 양들을 돌보지 아니합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양들을 사랑해 버립니다. 그래서 희생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게 됩니다. 그 양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도, 자신의 위험이나 고통 따위는 아랑곳없습니다. 그의 의식에는 오직 아픈 양, 병든 양, 잃어버린 양만이 있을 뿐입니다. 저들은 양들을 위하여 하루에 몇 시간을 돌본다거나, 일주일에 며칠씩 목장에 간다거나 아니면 자기 노동의 대가를 계산하지 아니합니다. 목자에게 있어서는 매일 매일의 낮과 밤이 그리고 그의 전 삶의 재능과 힘이 양의 우리에 있고, 양의 목장에 있게 됩니다. 그는 양의 문이기 때문에(요 10:7, 9) 그 자신이 양 우리의 문에 가로누워 있게 됩니다.
이런 경우 그 목자에게는 삯 이전에 양이고, 자기 사랑 이전에 양을 사랑함이고, 양을 위한 희생이 목자의 목자 된 전부가 되고 맙니다. 바로 여기에 목자된 자신의 존재의미와 내용과 목적과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목자적 삶을 가리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목자가 바로 선한 목자, 좋은 목자, 매력 있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십자가의 자기희생이 매력의 전체란 말입니다.
3. 이러한 선한 목자는 오직 예수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고 하였습니다.
나만이 매력있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선', '그 매력'의 정체가 무엇인가? 바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창세 이래로 인생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은 자가 있는가? 부다인가? 소크라테스였던가? 모하메드였던가? 아니면 공자, 맹자였던가? 아니면 저 헬라와 로마의 궁중철학자였던가? 아니면 세기적인 역사의 영웅이었던가? 호걸이었던가? 가인이었던가? 재사였던가? 누가 감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말할 수 있었던가? 그리고 행동하였던가? 예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그래서 예수님이 '나만이 선한 목자이다.'라고 단호하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만이 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설교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칼로스( )의 기본 개념은 '매력적인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칼로스라고 하는 단어를 아름다움, 좋음, 선함, 관용, 우아함, 매력… 등 문자적으로 그 뜻을 다 나타내기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사실상 이 매력(선함, 좋음…)이란 단어 칼로스는 하나님의 자기 사랑 아가페( )의 지배를 받고 있는 마음을 가진 자의 행위에서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성격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람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신 예수에게서만이 참 선한 것, 좋은 것, 매력적인 것, 아름다운 것, 우아한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행동으로 폭발되었을 때, 비로소 선한 것이 무엇이고 매력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는 정말 서로의 매력에 이끌리어 행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혈통적인 뜨거움이 그 사랑을 나타내는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손자에게 있는 그 이상한 매력, 손자에게 나타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그 이상한 매력은 알고 보면 사랑관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하신 것입니다.
매력(선함) 즉 칼로스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희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희생의 정체는 바로 십자가가 아닌가! 종교는 참으로 많고 또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예수의 자기 희생, 십자가 대속의 죽음입니다. 양초는 남을 밝게 해주면서 자신은 소비됩니다. 그것이 양초의 매력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야말로 칼로스의 뭉치입니다. 매력(선)의 총체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자의 영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예수께서 인자됨의 영광은 행동하는 희생,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죽고자 행동하였을 때 다시 사는, 다시 얻는 생명! 그것이 매력의 본체입니다.
- 아 멘 -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2년 4월 28일
선한 목자로 오실 메시아 : 스가랴
스가랴 10:1-12
이동원 목사(지구촌 교회)
오늘 우리 스가랴서 10장을 함께 공부할 시간입니다. 스가랴서 10장이 되겠습니다.
우리는 스가랴서 연구를 시작하면서 이 스가랴서가 네개의 구조로 나누어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네 개의 구조 가운데 첫번째 부분은 서론이고, 둘째는 여덟개의 환상, 이상 둘로 이루어져 있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두개의 메시지, 두개의 메시지가 서론은 1장이고, 1장 7절부터 8개의 비전이 시작됩니다. 두개의 메시지는 7장과8장, 이 두개의 메시지의 내용은 금식과 회복의 메시지 였습니다. 그 다음에9장부터 시작해서 14장까지 두개의 예언, 녜.
서론, 여덟 개의 이상, 두개의 메시지, 두개의 예언, 이 두개의 예언, 9장부터14장까지 도달하는 부분이 바로 두개의 예언부분 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9장부터 14장까지를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 9장부터11장까지가 첫 번째 예언, 그 다음에12장부터14장까지가 두 번째 예언이 되겠습니다.
첫 예언은 한마디로 말하면 뭐예요? 이방인에 대한 심판. 또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두 번째는. 그러나 단순히 심판에 메시지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판의 밑바탕에 흐르고있는 중요한 희망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희망은 어떤 희망입니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그래서 9장부터11장까지는 예수님의 초림이 아~ 그 중요한 예언의 초점이라고 할 수가 있고 12장부터14장까지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첫 번째 부분에서 10장과11장, 오늘 그 중에서 10장을 같이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이 10장과11장은 선한 목자로 오실 그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로 오실 메시아.
성경이 그 지도자들에 대해서 사용하는 아주 아름다운 그 표현, 명칭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목자라는 표현입니다 목자. 지도자라는 말보다도 목자라는 표현을 많이 써죠? 다시 말하면 목자와 양의 관계가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지도자의 그 따르는 자, 추종자들의 관계를 가장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목자와 양의 관계로 지도자와 따르는 자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에 최대의 문제가 있다면 저는 그것이 바로 지도자의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도자를 잃어버렸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비극, 최대의 비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리더십을 연구하고있는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난 가장 커다란 현대인들의 그 의식의 변화는 지도자를 그들의 의식 속에서 추방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를 잃어버렸다. 그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를 그는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봅니다. 신문이 나오고, 또 TV가 나오고 이런 매스미디어가 발달되면서 사람들은 지도자들에 관한 모든 것을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 알고 보니까 지도자가 별 것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이런 매스미디어의 발달 때문에 지도자의 신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그 지도자가 옛날 시대에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뭐냐하면 그건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잘 몰라서. 그러니까 모르니까 굉장히, 모르면 그 신비성이 있어요. 모르면 신비성이 있고, 그리고 굉장히 뭐가 있는 것 같고, 그것이 지도자가 옛날시대는 쉽게 등장할 수 있었든 배경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이런 매스미디어의 발달, 또 민주주의 발달, 이런 것들이 지도자의 모든 것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클린턴 대통령이 100년 전에만 나왔어도 위대한 사람으로 아마 존경을 받았을 거예요. 몰랐으니까 하하~~ 몰랐으니까.
그러나 그 지도자의 심지어 침실에서 일어난 일까지도, 한 사람과 나눈 사소한 대화까지도, 딕테이션이 되어서 글자 하나 틀림없이 다 공개되는 시대를 살면서 사람들은 소위 지도자의 미스, 신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 지도자라는 사람들도 다 별 것이 없더라, 네. 이것이 시대의 특성이에요. 그러나 뭐 그까짓, 괜찮을지 모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는 필요하단 말이지요. 공동체는 여전히 지도자를 필요로 해요. 그런데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하는 시대 속에서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는 그런 딜레마 속에 오늘 이 시대를 살고있는 현대인들이 살고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20세기에 들어오는 초 입구에서 하버드의, 하버드대학에 총장을 지낸 한 분이 이런 말로 잘 표현을 했어요. 오늘 우리가 살고있는 20세기 이 시대를 가리켜서, 오늘 우리는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잃어버렸다. 흔들 수 있는 깃발을 잃어버렸다,
세 번째로 믿을 수 있는 신조를 상실했다,
네 번째로 따라갈 수 있는 지도자를 잃어버렸다. 이런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잃어버리고, 흔들 수 있는 깃발을 잃어버렸고, 믿을 수 있는 신조를 상실했고, 따라갈 수 있는 지도자를 우리는 잃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비극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또, 어떤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공부하고 있는 이 스가랴가 살고 있었던 시대,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그들은 새로운 꿈을 안고, 이스라엘 땅으로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돌아왔는데 거기서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겠는데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리드가 없는 거예요 리드가 없었어요. 물론 자천 타천에 여러 지도자를 자청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에게 일시적인 기대도 가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포로 귀환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위 아~자칭 지도자를 통해서 많은 상처를 경험했습니다. 그 지도자를 통해서 계속 배신을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경험들을 가졌단 말이지요. 그래서 가짜 지도자들이 기성을 부리고 있었던 시대, 소위 악한 목자 나쁜 목자들이 있었던 시대, 이런 시대 속에서 상처 받고있는 이스라엘 민중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이 스가랴 선지자를 오늘 불러서 그에게 메시지를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0장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 하십시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가 오시고 있습니다. 바로 그 지도자는 누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10장의 핵심이에요. 네, 지도자를 잃어버린 세대, 그러나 아직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지도자가 있다라는 사실, 그 분은 바로 우리의 구주요, 주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할렐루야! 바로 그 메시야가 지도자가 되신다. 이것이 바로 10장의 초점,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우리는 10장을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10장1절로부터 3절까지는 목자의 필요성, 목자가 왜 필요한가, 지도자가 왜 필요한가?
두 번째로 이 4절 말씀에서는 목자의 약속, 그 목자가 오신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그 다음에 5절부터12절까지는 그 목자의 미션, 그 목자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라는 목자의 임무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10장1절부터3절까지 목자의 필요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우리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10장1절부터3절까지,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한 목소리로 시작,
1절: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 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2절: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3절: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네, 한마디로 말하면 무슨 얘기입니까? 참된 목자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방황하고 있다 고통 당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10장 첫부분의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2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백성이 뭐같이 유리하고? "양 같이 유리하고" 그랬습니다.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고 그랬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떼의 모습, 이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오지요? 우리 복음서에도 예수께서 그 불쌍한 그 시대의 사람들을 보시면서 뭐라고 그랬어요?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고 방황하고 있다"라는 말로 설명하셨습니다.
여러분 양의 특성이 어떤 특성일까요? 저는 뭐 동물, 식물 이런 것 모르는데 양에 대해서는 조금 알아요. 왜냐하면 제가 목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0살 때까지 제 이름이 목동 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팔자지요, 목사가 되는 것이 하하~~ 네, 바로 멀지 않은 수원에 화산 목장이라고 있어요. 거기서 바로 제가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이 목장 관리인으로 계셨기 때문에 태어났고 어렸을 때는 제 별명으로 저를 불렀어요. 우리 식구들이, 그래서 목동아 목동아, 그래서 우리 아버님이 한잔하고 들어오시면 꼭 아 목동아를 불렀습니다 하하하~~
오 데니 보이. 네, 그래서 제가 미국 갔을 때 영어이름을 쓰야 되는데 뭐라고 붙일까 그러다가 우리 아빠가 밤낮 오 데니보이 대니 보이 그래서 데니 리로 부르자 이렇게, 제 이름도 부른 그 추억이 있습니다마는 어렸을 때 양이라든지 소, 뭐 우유, 소의 우유 젖도 짜보고 또 양떼들과도 놀았든 그런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양의 그 현저한 특성가운데는 3가지의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방향감각이 없어요 방향감각, 우리가 소도 말도 바깥에 같다 놓으면 반드시 제집을 찾아오지요? 그런데 양은 못 찾아 와요.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어디를 가는지를 몰라요.
또 두 번째는 양은 아주 쉽게 더럽힘을 탑니다. 아주 깨끗한 것 같지만 양은 매일 씻겨 주어야 되요. 조금만 한눈을 팔면 뭘 묻히고 아주 더럽힘을 탑니다.
세 번째로 양은 아주 약한 동물입니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어떤 자구책, 보호책을 가지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동물들을 보다가 보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어떤 비장의 무기나 전략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 자연의 색깔과 자기 몸의 색깔을 비슷한 색깔, 무슨 색이라고 그래요? 보호색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자기를 공격해오는 것들에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연의 색깔과 자기가 같은 색깔을 갖는다든지, 혹은 신체의 한 부분을 예리한 무기로 사용한다든지, 그래서 무기를 갖고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그럴 수 있는 아무런 자구책이나 보호책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이 인간을 설명할 때 자주 나오는 유명한 표현, 마치 이사야서의 표현처럼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어디를 가는지 몰라요. 여러분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한번 옆에 있는 사람보고 물어보세요.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하하~~
내 인생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서 가고있는지? 우리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미로를 헤매는 인생처럼 살고있습니다. 너무나 쉽게 오염을 탑니다. 세상의 영향, 세속적인 것들에 관한 영향을 너무나 쉽게 받습니다. 네, 쉽게 오염 당하고 그리고 쉽게 두려워하고 네, 언제 어떻게 시작될지 모르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위험, 우리는 다 양과 같다.
양에게는 그래서 리드가 필요한 거예요. 목자가 필요한 거죠. 지도자가 필요한 거죠. 그러나 아~그래서 오늘 2절에 보시면 백성이 양같이 유리하며, 뭐가 없으므로?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참된 목자가 없을 때는 사람들은 가짜 목자라도 만들어 놓아야 위로를 받아요, 마음에.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반드시 대용품 신을 갖습니다. 이것이 도스도예프스키가 한 유명한 말이에요. 신이 없는 인생은 반드시 대용품 신을 구한다. 가짜 신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가짜 신. 그래서 사람들이 우상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은 엄격하게 완전히 종교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종교가 있어요. 다 자기의 종교가 있단 말이죠. 참된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고 소유하지 못한 인생은 반드시 우상을 찾도록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면서도 조금만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면 어디를 달려가요? 우상으로 달려가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상이 매력을 갖는 것은 우상은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상은 보여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영이시고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우상은 구체적으로 눈에 보입니다. 시각적입니다.
오늘 10장2절 첫 부분에 보시면 뭐가 나와요? 대저 뭐는?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드라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아요? 드라빔? 네, 창세기에 나오죠? 누구 사건? 네, 야곱과 라헬, 이 부부가 그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갔다가 라반에게서 뭘? 그 드라빔을 라헬이 훔쳐 가지고 나오죠? 네, 도적질하는 장면이 있어요. 창세기 31장 일꺼에요. 창세기 31장19절에 보시면 라헬이 이 드라빔을 도적질합니다. 라반의 집을 떠나가면서 드라빔을, 이 드라빔이란 것은 일종의 가정에 대한 수호신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한 가정을 지키는, 가족을 지키는 수호신. 그것을 가지고 나옵니다.
그런데 라헬이 하나님 믿는 사람이에요. 하나님도 믿으면서도 뭐냐하면 불안해져 가지고 두려워해 가지고 혹시 이 우상신이 있으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종종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면서도 너무나 급박해지고 마음이 절실하고 두려워지면 가끔 가서 뭘 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것이 비슷한 생리예요. 비슷한 생리.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답답은 하고 좀 보였으면 좋겠고,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고,그래서 이 드라빔 같은 눈에 보이는 우상 신을 의존하고자 했든 그런 슬픈 역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대저,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드라빔들은 뭘 말한다? 허탄한 것을 말한다, 헛된 것이다 이 말이에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사실은. 또 복술자는, 점치는 사람,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다. 뭐 가끔 맞을 수도 있어요 가끔 맞아요.그게 미혹이죠. 가끔 맞아요. 가끔 한번 맞는 것 가지고 뭐 신통하게 맞는다 그래 갖고 사명대사가 임했다 그래 갖고 하하하~ 뭐 찾아다니고, 또 아무것도 아닌 여자를 우상처럼 만드는 매스미디어 역할을 볼 수가 있습니다. 틀린 것은 하나도 얘기 안하고, 한 10개쯤 틀리다가 하나쯤 맞으면 굉장한 것처럼 뭐 얘기하고, 거기서 위로를 구하는 인생들. 이런 헛된 우상에게서 위로를 구하고 있었든 그 시대의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장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0장1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다같이 시작,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무슨 얘기입니까? 우상에게 구하지 말고 누구에게 구하라? 하나님께 구하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봄비 때에 하나님께 번개를 구하라 그랬어요. 봄비 때에.
아~, 팔레스타인 땅에는 비가 두 번 옵니다. 첫 비가 언제 오느냐하면 가을에 와요. 10월 11월, 10월 11월에 첫 번째 비가 옵니다. 그리고 이 봄비라는 것은 아~ 3월4월쯤 오는데 그 비를 늦은 비라고 부릅니다 늦은 비, 네, 늦은 비예요. 그 얘기는 뭐냐하면, "봄비 때에 하나님께 구하라"라는 말은 늦게라도 이제라도 구하라, 좀 늦은 것 같지만 이제라도 우상을 포기하고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 인생에 응답이신 하나님, 소망이신 하나님, 진리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 이제라도 구하라! 이 말입니다. 이제라도 구하라,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그래 하나님을 번개를 내시는 하나님, 번개. 번개는 뭐가 오기 전에? 비가 오기 전에 먼저, 그것은 비의 징후입니다. 싸인입니다. 이제 곧 비가 내릴 것입니다. 소낙비를 내리시는 하나님, 겨우 가까스로 비를 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풍성한 비를 주신 하나님. 이토록 풍성한 것을 예비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하나님께 나와 구하시기 바랍니다. 늦게라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2절은 불행히도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제쳐놓고 어디를 달려가요? 드라빔, 이 드라빔은 조그마한 거예요. 아주 조그마한 우상 신입니다.
지난번 그 다윗의 유물 전시전, 예술의 전당에서 할 때 저도 가보았습니다만 거기 가 보신 분들이 있어요? 한번 손들어 봐요. 네, 그때 그 우상 보았어요? 우상 구경했어요? 조그마한 거예요. 손바닥만한 우상들, 네, 가지고 다니는, 이렇게 갖고 다닐 수 있는, 가끔 뭐 부처도 보면은 큰부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것도 있어요. 네, 그런 식으로 작은, 작은 한 가정의 우상 신 이런 것들을 갖고 다니면서 거기다가 의지를 한단 말이지요. 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연약한 존재 에요. 그래서 그게 눈에 보인다고, 보인다고 시각적이라고 그래서 그것이 또 도움이 될 줄로 착각하는 인생들.
그리고 헛된 것을 말하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거기에서 도움과 위로를 구하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이 뭐냐? 이것이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그래서 3절에는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그러니까 백성들이 이 지경이 되도록 지도자들은 뭘 하고 있었느냐 말이지요 그러니까 진정한 이 땅에서의 영적 지도자들의 책임은 이 참되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그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임이겠죠. 그러니까 지도자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니까 사람들이 우상으로 달려가도 있었던 것입니다.
3절을 다시 한번 읽어요. 다같이 3절 다같이 시작,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네,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왜 숫염소가 나오는가? 염소 떼가 다닐 때 항상 앞에 리드가 앞장섭니다. 그것이 숫염소예요. 다시 말하면 이것은 리드에 대한 상징입니다. 리드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말이죠. 내가 그들에게 분노한다. 그래서 백성들이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쫓고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비극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도자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기에 우리시대는 참된 지도자를 필요로 하는 줄로 믿습니다. 여기 지도자의 필요성을 목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10장의 메시지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두 번째로 그 목자가 약속됩니다. 그러나 이제 이 유리하고 곤고하고 방황하고 있었든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목자를 약속하시는 장면이에요.
우리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모퉁잇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로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로서 나와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에게서" 이 말입니다. 그에게서, 모퉁이 돌이 그분에게서 나온다. 즉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참된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에게로서 나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이 계속 뭐예요? "그에게서" 그에게로서 그에게서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에게로부터 주어지는 지도자, 목자, 메시야, 메시야 메시야.
그 메시야 상을, 여기 4절에 보시면 그 메시야 상을 몇가지 상징적인 표현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어떤 표현들이 등장합니까?
첫째 "모통이돌" 여러분 예수님은 모퉁이돌 이십니다. 믿으십니까? 모퉁이 돌이 되신다 Corner Stone이 되신다. 모퉁이돌.
건물을 지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모퉁이돌이죠. 그것이 기초예요 기초. 또 두개의 벽을 연결할 때, 그 중동지방의 건축법은 모퉁잇돌이 항상 가운데 있습니다. 부챗살처럼 되어있어요. 중동지방의 모퉁잇돌은 이 부채꼴 살로 되어있는데 가운데 쫙 그것의 중심으로 두개의 벽이 연결이 되어요. 딱 연결이 되어요. 녜,
건물의 기초, 가장 중요한 파운데이션,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인생의 기초는 예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모통이돌이 되신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아. 내 인생의 진정한 지도자 내 삶에 기초가 되어주신 분 나의 인생의 Corner Stone, 나의 모퉁이돌이 되시는 주님, 그는 모퉁이돌 이십니다.
또 두 번째는 뭐라고 그랬어요? 네? 네? "말뚝" 예수님은 또한 말뚝이십니다. 하하~~ 아 이런 표현도 나와요. 예수님은 말뚝이십니다. 그건 별로 우리가 평소에 안 쓰는 표현인데 그렇죠? 기도할 때 가끔 말뚝 되신 주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하~~ 이렇게 한번 해보세요 하하~~
이 말뚝이라는 한국말의 이미지가 좀 이상하지만 진짜 그는 말뚝, 말뚝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말뚝이, 네, 이건 특별히 여기 말뚝이라고 한 것은 이 텐트를 칠 때 그 텐트를 흔들리지 않토록 연결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말뚝이죠. 견고하게 하는 것, 그래서 장막을 견고하게 만듭니다. 말뚝이 있으므로 해서 이 장막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말뚝 되신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므로 내 인생 흔들리지 않을 줄 믿습니다. 네, 그러니까 주님에게서 시선을 떼면 내 인생이 뭐에요? 흔들려요. 왜냐하면 말뚝을 망각했기 때문에, 녜 말뚝.
또 어떤 표현이 등장합니까? 그 다음에는? "싸우는 활" 전사에게 있어서 활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활, 이 활이 없이는 전투할 수 없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화살이 되십니다. 그가 우리의 무기가 되신 줄로 믿습니다. 싸우는 활이신 바로 그 분.
그 다음에 또 어떤 이미지가 나와요? "권세 잡은 자" 권세 잡은 자에게 여기에선 힘이 있다 이 말인데 막강한 힘이 있는 분. 여러분 내가 활을 가지고 있어도 활을 당길 힘이 없다면 활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런데 이 활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활이 되어주시고 또 활을 당길 수 있는 힘도 되어주시는 예수님. 그분은 진정 나의 능력 나의 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바로 오실 메시아. 우리의 목자 메시아. 우리의 지도자 메시아.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오늘 우리시대에도 동일하게 우리의 힘이시고, 우리의 무기이시고, 우리의 말뚝이시고 내 인생의 기초인 것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목자의 약속이 바로 이 4절에 나온 것이에요. 그 다음 5절부터12절까지, 목자의 미션, 의무. 목자는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 목자의 의무.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해볼 수가 있습니다. 목자의 의무.
5절, 함께 하신다 따라서 하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신다" 목자가 함께 하신다, 그럼 끝난 것 아니에요? 목자가 함께 하신다.
자, 저가 양의 특성을 말하면서 세 가지, 양의 특성은 세 가지라고 그랬어요.
첫째로, 뭐 다른 특성도 있지마는, 세가지 특성. 첫째 양은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요. 방황해요. 그런데 목자가 있어주면 어떻게 돼요? 목자가 방향을 잡아줍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어디로 가느냐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주님과 함께 있으면 됩니다. 그가 나를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마땅히 가야할 그 방향으로 그 목표를 향해서 나를 인도해 가실 그분,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로 그리고 아버지의 영원한 집을 향해서 나를 인도할 그분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또 양의 특성 두 번째는 뭐예요? 쉽게 더럽힘을 탄다 그러나 목자만 함께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목자가 씻어주어요. 늘 깨끗하게 보호합니다. 그 주님을 떠나서는 깨끗함이 없어요. 거룩은 주와 함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룩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바로 거룩이에요. 함께 있으면 그분과의 교제가 상실되면 우리가 더럽힘을 타요.
여러분 큐티 며칠 안 해보세요. 마음이 벌써 끈끈하고 더럽힘을 당하고, 네? 그런데 계속 안 했는데 편안하다 하하~~. 큐티 안 했는데 몇 달 안 했는데 계속 편안하다, 마비증이 찾아오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제 마비상태에 들어간 거예요. 그건 완전히 마비상태, 네. 함께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이에요.
자, 양의 또 하나의 특성이 뭐라고 그랬어요 양은? 자구책이 없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목자와 함께 있으면? 목자가 우리의 보호가 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며, 주님이 나의 보호예요. 주님이. 주님이 나의 보호예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며, 그런데 그 주님을 생각 안하고 골프 치러 간 사람들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며 하하하~~ 주님이 우리의 보호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5절, 다시 한번 읽어요 5절 다같이 시작,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대적을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 즉 그들이 싸워 말 탄자들로 부끄러워하게 하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전장에 한 복판에 우리가 던짐을 받아도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 하신 하나님 그분이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목자는 양떼들과 늘 함께 해 주셔요. 내가 때로는 내가 목자를 피하고 싶어도 나를 추적하시는 목자 되신 하나님 그가 우리의 승리의 원인인 것을 확인하십시다. 함께 하십니다.
두 번째로 6절과7절에 보시면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구원하십니다" 첫째는 뭐 한다고 그랬어요? 함께 하시고 둘째로 우리를 구출하셔요. 구원해 주셔요.
6절 다같이 읽어요. 시작,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그들을 긍휼이 여겨주신다. 그래서 구원해 주신다. 구원하신 다음에 그들을 견고하게 하신다 그래서 버림받은 적이 없었든 것처럼 그들을 구원하시겠다. 믿습니까 여러분?
내가 위험 앞에 처할 때 나를 다시 구출하시는 그분. 구출하시는 그분. 함께 하시고 내가 위험에 처할 때, 내가 슬럼프에 처할 때 내가 구덩이에 던지움을 받을 때 빠져 나올 길 없는 인생의 사면초과, 그 딜레마 속에 빠질 때 나를 건져내시는 주님. 그분이 우리의 변화 없는 목자이신 것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구출하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다같이 "회복시키신다"
첫째는 함께 하십니다. 둘째는 구원하십니다. 세 번째는 회복을 시켜 주셔요. 네, 8절 이하 11절까지, 어떻게 회복시키는가? 우리 8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8절 다같이 시작,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같이 번성하리라"
네, 목자가 휘파람을 불면 양떼들이 어떻게 합니까? 다 모여요. 여기서 말한 휘파람은 아마 목자가 입으로 부는 그런 휘파람이 아니고 아~ 일종의 그 갈대 파이프 같은 것 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대로 만든 파이프를 그 목동들이 목자들이 결정해서 그래서 파이프를 탁 불면 다 모여요. 목자의 음성을 목자의 부르는 소리인 줄을 알고 일제히 집합을 합니다.
자,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징계에 의해서 바벨로니아 앗시리아 전 세계 흩어졌던 그들을 다시 모아주십니다. 모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다시 모여 또 한번 번성하리라. 회복이에요. 온전한 회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다시 번성하리라.
그리고 9절, 9절 다같이 읽어요. 시작,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지라"
다시 돌아온다 회복의 약속입니다. 다 돌아온다.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돌아오며 앗수르에서 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풍성하게 회복시키신다.
11절,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돌아오는 길에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신다 이 말입니다.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그들을 포로로 잡았든 앗시리아를 패망시키시고 애굽을 치시고 그래서 그 백성을 다시 온전히 돌아와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 그는 회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때로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하고 우리가 잃어버리고, 우리의 소유를 잃어버리고, 사랑했든 사람을 잃어버리고 우리의 삶이 깊은 고통과 어둠 속에 빠져있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다시 그 주님을 의뢰하고 바라볼 때 주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회복은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 약속은 뭐냐하면 견고케 하신다. 회복시킨 다음에 그들을 아주 견고하게 해주신다.
12절입니다. 마지막 12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자, 12절,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어떻게 하신다고 그랬어요? "견고케 하리니" 견고하게 해주십니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도록, 다시는 우리가 이 고통을 당하게 하지 않도록 우리를 견고케 하실 하나님.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어요. 견고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 견고한 것은 우리 자신이 뭐 어떤 견고할 수 있는 아~ 그 소스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견고는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하나님을 의지하십시다. 그 하나님을 의지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견고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견고하시는 하나님, 나의 망대가 되시는 하나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의지할수록 우리의 인생이 견고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이거예요. 얼마나 우리가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느냐? 정말 바라보고 사느냐?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리드라면, 참된 지도자라면 그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 그분이 우리의 인도자라면, 그렇습니다 인도자가 없는 세상, 지도자를 잃어버린 세상,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지도자 상실의 시대에서 염려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완전하신 지도자, 맘놓고 의지할 수 있는 지도자, 그 지도자는 이동원이 아니에요.
저는 여러분을 얼마든지 실망시킬 가능성이 있어요. 자꾸 저를 째려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하~~ 주님을 째려보시기 바랍니다. 네, 주님. 그 분은 우리의 완전한 지도자, 흔들림이 없는 지도자,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의 초점을 그리스도에게 맞출수록 하나님을 바라볼수록 그만큼 내 인생은 견고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지도자로 삼은 행복을 고백 하십시오.
하나님이 나의 지도자가 되셨다 예수가 나의 지도자가 되셨다. 예수님이 나의 리드이시다. 그분이 진정한 나의 리드이시다.
저와 여러분들이 지도자가 될 수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궁극적인 그 주님을 따라가는 행복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우리의 궁극적 지도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우리는 소개하는 작은 안내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작은 지도자라고는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의 책임은 초점을 자기에게 모으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다 인간성은 연약함이 있고, 우리는 다 흔들릴 수가 있고, 우리는 다 오류를 저질을 가능성이 사람에게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지도자의 특성은 뭐냐하면 끊임없이 누구를 가리키는 거예요? 하나님 바라보세요. 예수님 바라보세요. 성령님 바라보세요. 잘못된 지도자는 어떤 지도자입니까? 네, 나를 바라보라고 하는 사람. 그건 잘못된 지도자예요. 진정한 지도자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는 사람, 그렇습니다. 그 주님만이 오늘도 우리의 소망인 것을 확인하십시다. 그 주님을 바라보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을 신실하게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이 한 주간도 그분이 우리의 승리의 원인인 것을, 이유인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이 오늘 말씀을 받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모든 삶의 장에 권능과 평안으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1년 6월 24일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편 23:1-6
박정근 목사(영안 교회)
부모가 자식이 항상 곁에 있어서 늘 눈앞에 있고, 그 음성을 들려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여호와의 목전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또 기도와 찬송으로 주님께 대화하는 여러분들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원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음성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편 23편은 우리가 어릴 때에 찬송으로도 부르고 또 성경을 암송할 때에 가장 많이 애용하는 구절로서 다윗의 신앙고백이라고도 볼 수 있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안에 행복이 넘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신앙의 기도와 시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절실히 필요한 것을 양의 생리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양은 순진하고 저항력도 없고 분별력도 없습니다. 방향감각도 없습니다. 사나운 짐승들이 잡아먹기 위해서 곁에 다가와도 눈만 껌뻑껌뻑하며 쳐다보고만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잠시도 양에게서 눈을 다른 데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항상 양 곁에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순진하고 철없는 그런 연약한 인생임을 아시고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셔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0:14,15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이 확실히 믿고 살아간다면 절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외롭다, 고독하다, 쓸쓸하다, 적적하다, 따분하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는 어떤 목자이신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여기에서 '부족'이란 말은 히브리어에 보면 '모자란다, 궁핍하다, 빈곤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어주시면 빈곤도, 부족함도, 모자람도 주님이 다 채워주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부족함이 없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①푸른 초장에 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2절상) '푸른 초장'이란 원어에 보면 '부드러운 초목, 비젼, 생명'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이 약동하는, 비젼이 있는 그런 부드러운 좋은 초장으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때를 따라 풍성히 공급해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에게 쉼을 얻게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②쉴 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2절하) '쉴 만하다'는 것은 '평화로운 물가'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소개하시기를 "나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예수를 똑바로 믿는 사람은 마음에서부터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자기 마음에 화평이 있을 때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자기 마음에 화평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 마음의 화평을 다른 사람에게 접목시켜주고, 분쟁과 분열의 상황에서 일치를 이루는 역사를 나타낼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평화는 인류 최대의 이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평화가 깨뜨려지면 무서운 전쟁마당과 같습니다. 평화가 있는 곳은 바로 잔잔한 물가와 같습니다. 쉴 만한 물가와 같습니다. 휘트만은 '평화는 아름다운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목자를 잘 따름으로 안전과 평안이 보장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소생시키시는 목자이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3절상) '소생시키다'는 말은 '새롭게 한다, 회복시킨다, 전환시킨다, 부흥케 한다'는 이런 의미입니다. 쇠하여진 자, 병든 자, 실패한 자, 좌절과 절망에 처한 자에게는 반드시 회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죽어가는 영혼을 회개시켜 새롭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부흥케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이라는 말이 '소생'이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목자가 되심으로 다 새로워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내 힘이 역부족으로 좌절하게 될 때가 있고, 우리가 기억을 다 못해서 안타까워할 때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마음에 원하는 욕구와 욕망은 있지만 안되는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요. 이것을 바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의미로 소생케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이 순간에 여러분 육체도 건강하게 회복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의 능력으로 이런 소생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슬픔과 괴로움, 고통과 절망, 낙심과 모든 한숨은 다 성령의 바람으로 소멸시켜주시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쳐주시고, 오늘 모두가 이 말씀과 함께 소생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함이 없으십니다.
셋째,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3절하) 여기에서 '의의 길'이란 '죄악된 생활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정직하게 사는 길'을 의미합니다. 정직한 사람은 손해도 보고 기회를 놓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은 시편 84:11에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시편 11:7에도 보면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태양이 하늘에서 작렬하게 비취지만 먹구름이 가리우면 금방 캄캄해집니다. 사이판은 참 이상합니다. 작렬한 햇빛이 비취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몇 차례 내리다가 금방 개곤 합니다. 그런데 갑자가 먹구름이 하늘을 덮으면 이게 저녁때인가 할 정도입니다.
죄악의 먹구름이 우리에게 가로막히면 아무리 주님의 영광이 우리를 조명해도 어두움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아 기도가 막히고 영적으로 무기력해집니다. 하나님의 복을 죄악이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즐거움을 죄악이 막아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쳐 인도하십니다. 성도가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짐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성도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양떼와 같은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복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고전 10:31).
넷째, 최후의 승리로 이끌어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여기에서 '원수의 목전에서 베푼 상'이란 전쟁에서 포로되어 온 대적들 앞에서 전쟁의 승리자를 위하여 베푸는 승전 축하 잔칫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싸우면서 살아가는데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걱정, 근심, 불안, 공포 속에서 매일 살아가게 되면 마음이 쇠약해지고 뼈와 육체도 쇠약해지고 나중에는 용기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플라톤은 '인생의 최대의 승리는 나를 이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공자는 시련을 극복할 줄 아는 사람, 반대자도 이용할 줄 아는 사람, 비젼을 안고 과감하게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또한 세상과의 싸움에서,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반드시 승리해서 하나님 앞에 큰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는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목자,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목자,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 최후의 승리로 이끌어주시는 목자이십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자이심을 감사하면서 귀하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1년 10월 14일
목자의 음성
요한복음 10:22-28
강창순 목사(그리스도 사랑의 교회)
양과 목자의 관계 속에서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서는 양이 스스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물이라고 하면 우리나라는 물이 흔하기 때문에 골짜기가 있고 저수지도 있고 논밭에도 물이 있지만 유대사회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오죽해야 모세가 애굽을 떠나서 미다안 광야에 갔을 때에 물이 없어서 여러 가지로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는데 어려움을 볼 때에 모세가 도움을 주어서 그 삶의 살아가는 수단이 되었던 것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은 어떤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시는가 하면 수전절에 솔로몬 행각을 다닙니다. 수전절이란 어떤 절기가 수전절인가 하면 이스라엘은 수리아 사람의 통치에 성전이 패망해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 속에 있을 때에 유다의 마카비아가 그 성전을 회복해서 다시 헐었던 것을 보수해서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복원한 것을 기념해서 이스라엘은 수전절을 지켜 왔습니다. 이 수전절에는 어떤 행사를 했는가 하면 등을 환히 밝힙니다. 등을 밝히면서 이렇게 절기를 지키는 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우리가 성전을 잃어 버렸던 것을 성전을 회복해서 어두운 악의 세력은 물러가고 광명한 빛의 세계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가 비춰 진다고 하는 신앙적인 의미에서 등불을 밝혔던 것이 수전절에 그들이 행하는 행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절기가 있습니다. 가장 큰 절기가 여러분이 잘 아는 오순절입니다. 오순절 절기를 가장 큰 절기로 삼았던 것을 봅니다.
이제 오늘 예수님께서 이 수전절에 솔로몬의 행각을 다닐 때에 유대인들이 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는 당신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고 왜 우리의 의구심을 풀어주지 아니하느냐? 라고 하는 이런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묻는 요구는 당신이 참으로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자이면 우리에게 구원자임을 보여 주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하는 이러한 의식에서 물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앉은뱅이를 고치시고 장님을 눈 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려내고 사람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베풀면서 저들에게 말씀으로 당신이 오신 구원자임을 설명하시면서 증거 하시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말씀하는 예수님을 이들은 지금도 의구심이 있어서 그가 구원자임을 알지 못하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우지 못하고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적 지식으로는 예수는 구원자가 아니라고 하는 이러한 의식구조가 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능력을 행해 보여도 권능을 행해 보여도 뿐만 아니라 말씀을 하면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시키는 데에도 저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알지 못한 것은 저희의 눈은 가리웠고 저희의 귀은 막혀 있었습니다. 저희의 눈은 가리웠고 저희의 귀는 막힌 것은 육신의 안목이 가리웠고 육신의 귀가 막힌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는 관점이 틀렸기 때문에 잘못 된 관점으로 예수를 바라볼 때에 아무리 보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자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참으로 안타깝고 가련한 신세가 되었던 것이 당대의 종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은 이렇다고 하고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각각 다른 얼굴의 형태를 하고 이 예배당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한 말씀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나는 아니겠지요.’ 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바로 믿고 있고 바로 알고 있고 나만큼은 참으로 알고 있다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신앙생활 합니다.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참이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참이라 할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내 신앙이 내 믿음이 잘못 되었을 때에는 돌이키는 것이 회개하는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교만과 겸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만과 겸손과 다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잘난 체 하고 뻣뻣하고 남을 무시하고 이것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하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교만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알고 있고 잘못 믿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아멘하고 자기 자신의 모순을 회개하고 교정하는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미련한 것을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그 미련은 절구통에 놓아서 그 미련을 찧는다 할지라도 그 미련이 벗겨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람이 한번 구부러진 사람 이것은 육신적으로 구부러진 사고가 아니라 영적으로 구부러진 것은 펼 수가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됩니다. 우리의 목자가 누구입니까? 강단에서 설교하는 제가 목자입니까? 저는 결코 목자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자인 것입니다. 참 목자는 양에게 꼴을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양에게 꼴을 줄 수 없는 것은 목자가 아닙니다. 혹 양의 꼴이 무엇이냐? 말씀을 주어서 먹게 하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여러분 말씀을 먹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는 꼴은 영원한 생명이요 성령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은혜는 목사가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목자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목자입니다. 그러면 이제 목자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그 목자인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윤리와 도덕의 규범을 말씀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 많은 능력과 기사와 권능을 보이셨고 뿐만 아니라 친히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고 장사 한지 삼일만에 부활 하셔서 오백여 문도에게 나타나 보이시면서 우리의 부활을 약속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오셔서 역사 하시고 말씀하시고 지금도 성령으로 여기 오셔서 우리에게 역사하고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하고 사람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느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무엇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까? 우리의 육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고난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 시간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마실 것도 입을 것도 아닙니다. 진작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의 아버지의 나라에 갈 때에 반드시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받지 않고서는 아버지의 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받는 것은 내 스스로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어서 영원한 생명을 내가 받을 때만이 아버지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는 목적이 분명해야 됩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분명하지 아니한 것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과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고 우리로서는 해결 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어떻게 참여하느냐?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나를 따르려거든", "예수를 따르려거든" 우리는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을 부인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는 주요 나는 나요 주와 나와 따로 따로가 아닌 나는 주께 예속된 주님과 나는 주 종의 관계가 되는 것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것도 여러분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초보적인 신앙입니다. 점점 신앙이 깊어지고 믿음으로 온전히 돌아선 사람의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이제 나는 주의 종이오니 어찌 종의 뜻대로 내가 살기를 원하나이까? 주여 나를 주의 도구로 사용해 주옵소서! 오직 주님이 영광 받는 것이 나의 기쁨이요 주님이 모든 것 이루시는 것이 오직 나의 바램입니다. 라고 하는 이러한 자기 부인하는 신앙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 말씀합니다. "각기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오늘 현대 사회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한 예수 믿는 생활을 원합니다. ‘개척교회는 부담스럽다!’ 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부담을 갖는 것이 정석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왜? 부담을 가져야 됩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가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또 여러분의 고난을 통해서 함께 고난을 나누었다 한들 여러분에게 어떤 효험이 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당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이 복음의 사역을 위한 부담을 반드시 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담스럽고 약간 어려움이 오면 뒤로 물러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의 뜻대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 소년 다윗을 보십시다. 다윗이 돌팔매질을 잘 했기 때문에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믿음의 결과로 골리앗을 넘어뜨리게 만든 것입니다. 골리앗과 싸워 다윗이 이길 수 있었습니까?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골리앗을 대항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체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오늘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자꾸 나타나는 현상과 상황만 놓고 어느 때까지 우리를 의심나게 하려 하십니까? 라는 이러한 물음을 묻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은 믿음의 물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때 변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참고 묵묵하고 주님 가신 그 발자국을 나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면서 주님 그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신앙으로 승화 되어 갈 수 있는 이러한 마음의 자세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나를 인하여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요 제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 고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그 모든 의식구조와는 정 반대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말하는 생명은 우리가 아는 목숨, 쉼 쉬는 이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지막 주님으로부터 입어야 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목자의 음성은 어떤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이 되십시다. 예수님의 양이 되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그 놀라운 은혜의 말씀에 아멘하고 그 말씀이 믿어지고 그 말씀대로 행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이성으로 아는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적으로 아는 것은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어서 목자의 음성을 들을 때에 우리에게는 믿음대로 행함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다하나 행함이 없는 것은 그 믿음 자체가 인간의 이성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적으로 아는 것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도대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선지자 혹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그럼 도대체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라고 아느냐?" 라고 할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고 베드로는 아주 명료하게 대답을 합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대답하고 알았던 것은 믿음으로 안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총을 입어 안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앎이란 것입니다. 이성적인 앎, 인지적인 앎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어려운 상황이 올 때는 반드시 믿음으로 서 있지 않고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듣고 십자가에 고난당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주여! 그리하지 마시옵소서! 주님에게는 그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대화 속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결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이성적인 앎이라고 하는 것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목자를 아는 것은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도 믿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알 때는 그 믿음에는 반드시 따르는 행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편안하기를 원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것에 감사하고 십자가가 오히려 내게 큰 은혜가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영원한 생명의 오묘한 진리의 이치가 십자가의 도에 있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항상 감사하고 그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현대 용어로 말하면 이것이 올바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교사가 되는 이 직임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어 있는가? 라고 하는 이 자체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되어지지 않다면 목사가 된 들 장로가 된 들 집사가 된 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 말씀한 말씀대로 나 마지막 날 도무지 너희를 모른다 하리란 그 부류에 속한 불행한 사람에 속한 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합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 우리에게 약속한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영생은 우리가 숨을 쉬는 이러한 생명이 아닙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나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목자와 양의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한 말씀에 내 양은 나의 음성을 알고 나의 음성을 들으므로 또한 주님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주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시간도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치를 아십니까? 이 영원한 생명의 소중성을 아십니까? 이 영원한 생명의 소중성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 주께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는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영원한 생명의 가치와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모르고 있사오니 주여 내게 은총을 내리시어 영원한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바로 깨닫게 하시어서 내가 주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사랑한 것처럼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질 때 주님의 십자가는 고난의 십자가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게 은혜의 십자가요, 감사의 십자가요, 생명의 십자가로 바꾸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에 주는 주요 나는 나가 아니라 주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루어 주님 말씀한 말씀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지켜 그 사랑 안에 거한 것처럼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그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우리의 관계 속에서 사랑이 아니라 오직 이 영원한 생명을 주님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 믿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일서 2장 25절에 보면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 우리에게 말씀한 목자의 음성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이 시간도 우리에게 말씀주시고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기시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C3TV 설교방송 2003년 2월 9일
나의 목자 여호와
시편 23:1-6
박정근 목사(영안 교회)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성경 전체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구절이 있다면, 아마 시편 23편일 것입니다. 글을 모르는 유치원 아이도 이것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노년층에게도 시편 23편은 많은 사랑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요즘 많은 한글 성경 번역판들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번역판은 개역판이라고 합니다. 공동 번역이 나왔고, 새번역, 표준 새번역, 개역개정판 등 참 많은 것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23편은 모든 번역판에 각각 실렸을 뿐 아니라, 성경에서는 유일하게 지방(地方)번역본을 가지고 있는 장입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시편 23편 전라도 버전, 충청도 버전, 경상도 버전 등. 홈페이지에 어떤 형제가 시편 23편 경상도 버전과 전라도 버전을 올려놓아서 읽어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아직 이북 버전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원래 번역본이란 것은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 자신의 말로 된 것을 읽어야 합니다. 저는 처음에 지방 버전을 읽으면서 누가 장난으로 만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개역판 성경보다 어떤 부분은 더 정확하게 표현했어요. 아마 시편 23편을 굉장히 많이 묵상한 사람이 지방 번역본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원래 경상도 사람이 읽어야 하는데, 다행히도 제가 완벽하게 2개 도(道)의 말을 구사하는 사람 아닙니까? 저는 경상도에서 태어났지만 유치원부터 서울에서 다녔습니다. 고향에 오면 경상도 말을 하고 서울 가면 서울말을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시편 23편 경상도 버전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내사 마 답답을끼 없데이
시이프른 풀구디 내 디비지고 쪼메 쉿다갈 또랑가로 델꼬가신다.
내 정신 챙기시사 올케 살아라 카심은 다 저 양반 체면 때문이라 카네.
내 죽울 뻔한 골짜구디 껌껌한데서도 간띠가 부가 잘 댕기는 것은
그 빽이 여사가 아인기라. 주의 몽디와 짝대기가 내를 지키시고
내 직일 놈 문디 앞에서 내 기 세아 주신다 아이가.
사는기 아무리 복잡다 케사도 저 양반이 맨날 지키주신다카이께내
내사 우짜든지 그 옆에 딱 붙어가 죽어도 안 떠날란다"
마음에 확 와 닿으십니까? 누가 시편 23편을 모르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 모두가 다 외울 것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이것은 다윗이 지은 시(詩)입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양을 쳤기 때문에 양과 목자의 관계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그의 소년시절에 쓰여졌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짧은 시(詩) 속에는 인생의 깊은 고민과 위험을 지난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아마 이 시편은 다윗이 상당한 고난을 겪은 후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인생에서 맛본 다음에 기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지만, 그 만큼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장인인 사울의 추격에 끊임없이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왕이 된 이후에도 아들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하는 바람에, 자기의 목숨을 구하고자 아들을 피해서 도망 다녀야만 했습니다. 그의 고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얼마나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겠습니까?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자기 목숨을 노리고 자기를 쫓아다닙니다.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신하들이 다 같이 자기 아들 편을 들어서 자기를 죽이고자 쫓아 다녀서, 그는 수개월 동안 사막으로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 모든 고난을 겪은 다음에, 평화로이 우리 가슴에 다가오는 이 짧은 시편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인생의 고난이 무엇인지 아는 자의 것입니다. 단순히 조잘거리는 유치원생들이 외울 수 있는 얕은 시편이 아닙니다.
오늘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 가운데서도 자녀의 반항을 경험해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힘과 권력이 없어서 그렇지, 힘만 많았다면 이 아버지인 저와 여러분을 꼼짝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혹은 가족들의 불화로 가정이 흔들리는 체험을 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거친 풍파로 삶 전체가 흔들려 본 사람들! 건강을 잃어서 좌절해서 무릎 꿇었던 분들이 이 자리에도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감, 삶의 풍파를 겪어보았다면 바로 이 시편은 당신의 것입니다. 편안하게 왕자로 태어나서 왕이 되었다가, 한 일생을 평화롭게 마친 사람이 쓴 시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과 같이 고난을 당한 자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다윗의 고백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 이 고백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도와주십시오. 나도 다윗과 같이 삶의 고난 가운데서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이것이 이 시편을 대하는 저와 여러분의 기도이기를 소원합니다.
다윗은 망설이지 않고 시편 23편 1절에서 자신의 중심생각을 말하며 시작합니다. 주제가 먼저 시작됩니다. 주제가 나타난 1절을 외워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찬송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부분이 있어요.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가지임을 아십니까? "엘로힘"의 하나님이 있고 "여호와"의 하나님이 있습니다. 엘로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여호와는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것을 상징하며 하나님을 부를 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나의 곁에 계신 하나님! 나의 옆에서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늘 건강하고,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부도를 안 당하고, 자동차 사고를 안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이러한 잘못된 신학들이 설교되어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그의 양이기 때문에 불행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야 돼요.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나는 병중에서도, 혼란 속에서도, 사고를 만나고 인생의 풍파 가운데서도 나는 전혀 부족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이 여러분의 고백이십니까?
저는 어느 날, 이 시편 23편 1절 말씀을 읽다가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그렇게 많이 외운 말씀인데, 그 날 시편 23편 1절은 제게 다른 말씀으로 다가왔어요. 아주 간단한 진리가 깨달아졌어요.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면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겁니다. 반대로 내가 현재 부족감을 느끼고 있다면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그것이 제게 충격이었어요. 만일 내 마음속에 공허함이 있고, 불안함이 있고, 갈망이 있고, 절망과 외로움, 좌절이 있다면, 만족감이 없다면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내 환경이 어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어느 날 저는 그 사실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저는 제 환경 탓을 했고, 하나님을 탓했습니다. 제 마음에 왜 곤고함이 있는가? 왜 부족감이 있는가? 그 이유를 하나님은 가르쳐 주셨어요. 환경 때문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 있지 않기에 제게 부족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우리를 인도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 땅에서 만족감이 없을 거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의 직업이 우리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일하며 쉬지 못하는 일 중독자가 될 겁니다. 만일 우리의 교육이 우리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늘 만족감이 없을 거예요. 왜요? 배움에는 끝이 없으니까요. 유학생활 10년 동안 저는 그렇게 공부해 봤어요. 공부에는 끝이 없어요. 만족감이 없어요. 만일 우리의 재물이 우리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늘 불안할 것입니다. 재물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이 재물이 날아가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감을 끊을 수 없을 거예요. 부족감이 있을 겁니다. 만일 다른 어떤 사람이 우리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늘 실망할 겁니다. 목사라 할지라도.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우리를 늘 실망시키니까요. 이것이 다윗의 말씀이에요. 그는 이 주제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라면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게 부족한 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혀 부족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그가 나의 목자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2절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실 때 왜 부족함이 없는가? 이 주제에 대해서 2,3,4절에서 자세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저는 특별한 Out Line을 사용하는 대신 한 줄 한 줄 공부하기를 원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면 우리가 전혀 부족감을 느끼지 않을까요? 그 이유를 2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우신다
두 가지 말로 비유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잘 다가오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양을 길러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이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 거예요.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 또 하나는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신다"라고 표현되어 있어요. 경상도 버전에서는 "도랑으로"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 말이 더 맞습니다. 흐르는 도랑이에요. 큰 물가가 아니에요.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보통 양들은 겁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이에나 같은 짐승은 얼마나 담대하냐 하면 사자를 상대해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자에게 시비를 거는 짐승은 하이에나입니다. 개를 닮은 하이에나 아시죠? 어떤 음식을 먹다가 사자가 나타나면 겁이 많은 짐승은 도망을 가지만 하이에나는 절대로 도망가지 않아요. 눈으로 보면서 먹을 것 다 먹어요. 그러다가 사자가 어느 정도 위험 거리에 들어오면 그때서야 포기하고 도망갑니다.
반면에 양들은 겁이 너무 많아요. 풀을 먹다가 옆에서 다른 양이 펄쩍 뛰기만 해도 주위에 사자가 있는가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볼 것도 없이 뜁니다. 옆에 있는 놈이 뛰면 또 같이 뛰어요. 그래서 떼를 지어 종일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다 지쳐서 다 누워요. 겁이 그렇게 많아요. 누군가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음식조차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겁이 많은 동물이 양이에요. 양의 특징 가운데 또 하나는 배가 부르기 전에는 절대 눕지 않습니다. 모든 짐승이 다 그렇지만 배가 잔뜩 불러야 누워서 되새김질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 눈에 익숙한 소의 모습이 있죠? 봄날 햇빛이 내리쪼이는 곳에 소가 여물을 잔뜩 먹고 햇빛을 받으며 졸고 있습니다. 졸면서 다시 되새김질하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을 거예요. 이처럼 짐승들은 배가 불러야 눕는 거예요.
여기서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의 공급을 묘사했는가 하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고 했습니다. 푸른 초장에 누워 있는 겁니다. 왜요? 배가 이미 너무 부르기 때문에 앞에 푸른 초장이 있어도 더 먹을 수가 없습니다. 속이 꽉 찼어요. 포만감으로 이제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서 그 음식 위에 쭉 누워있는 양의 모습!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잔잔한 물가, 작은 개울가로 인도하십니다. 양은 겁이 많아서 콸콸 솟아나는 물이나 흐르는 시냇물에서 절대 물을 먹지 못합니다. 자기의 양털이 물에 젖어서 빨려들어 갈까봐 두려워서 그러는지 아무리 목이 말라도 보고만 있을 뿐, 세게 흐르는 물에서는 물을 못 먹고 왔다갔다하며 당황해하기만 해요. 세차게 흐르는 물 -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물이 잔잔하게 흐를 때가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비가 갑자기 한꺼번에 쏟아지니까, 그 사막에 비가 쏟아지면 도랑을 만들고 물이 콸콸 흘러가는 겁니다. 양은 겁이 나서 이런 센물을 먹지 못합니다. 그때 목자는 팔을 걷어 부치고, 바지를 걷고 큰돌을 옮겨 댐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 흐르는 물이 잔잔하게 흐를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면 양들이 와서 안심하고 물을 먹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 하시는도다
무엇을 얘기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당신의 필요를 채우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쉬지 못하고 힘들어하며,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불안에 사로잡혀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시편은 잘 외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것이 누구인가? 나입니다. 내 자식의 학비를 대는 것이 누구인가? 나입니다.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누구인가? 나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아파트를 유지하는 것이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자가용을 유지하는 것이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사업을 유지하는 거예요. 삶의 모든 짐을 나 자신이 지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이렇게 초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마 11:28)
그러나 이 사실을 잘 믿지 않습니다. 다윗은 말년에 이것을 깨달았어요. 그는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왕궁에 들어가면 음식이 쌓였어요. 재물이 쌓였어요. 그래서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줄 알았을 거예요. 자신 때문에 수많은 부하들이 먹고사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어느 날 압살롬이 반역해서, 그는 광야에 쫓겨나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음식을 갖다주지 않으면 굶어야 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아무 것도, 쌀 한 톨도 만들 수 없었어요. 거기서 다윗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내가 내 목숨을 위해 양식을 공급한 것이 아니구나! 내가 내 가족, 내 부하들을 먹여 살린 것이 아니로구나!" "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셨습니다. 당신이 나를 지금까지 잔잔한 물가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지금까지 먹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앞길에 모든 필요를 친히 채우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먹고 살 문제가 아니다. 꼴이 아니다. 물이 아니야. 내가 그것은 너희에게 공급할거야. 너희는 하늘 나라를 신경 써라. 어떻게 옳게 살며, 하나님 앞에 영광되게 살 것을 고민하라. 그리하면 나머지는 내가 너희를 다 먹이마."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의 양식만 공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병이어로 우리를 마음껏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에 남은 그 모든 물고기와 보리떡을 열두 제자들에게 나눠주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제가 여러분에게 양식을 먹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8월에 안식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고 있는데 안식년에 다른 곳에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못 가십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갈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것을 정말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이시면 왜 부족함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3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신가? 그분이 나의 삶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인도하신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한 가지는 소생시키시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왜 "소생"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왔습니까? Resuscitation, Restore! 왜 하나님은 우리를 소생시키셔야 합니까?
양의 습성 중 하나는 길을 잘 잃어버리는 거예요.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이사야 53장 6절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씀합니다. 양은 자꾸 우리를 떠나요. 풀을 쫓아서 먹다보면 어느새 멀리 떨어져 집을 찾지 못해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양의 비유를 든 것입니다.
그 당시 한 목자가 양을 100마리 정도 관리했어요. 목자는 그 100마리 양의 이름을 전부 다 알아요. 우리는 그놈이 그놈 같지만 목자는 다 알고 있어요. 목자가 그 양의 이름을 부르면 알아요. 저녁에 와서 출석 체크를 해 보니 한 마리가 없어요. 똘똘이가 사라졌어요. 목자는 어떻게 합니까? 나머지 양을 우리에 두고 찾아 나서는 겁니다. 양은 풀을 먹다가 정신 없이 멀리 갑니다. 저녁이 되면 겁이 많은 양은 드디어 깨닫습니다. 동료들이 아무도 없고 목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양은 웁니다. 울면서 방황하며 뛰어 다닙니다.해는 지고 겁에 질려 돌아다니다 보면 가시덤불에 찢기고 웅덩이에 빠집니다. 사나운 짐승이 곧 그를 덮칠 것입니다. 그때 목자가 이름을 부르며 찾아 나섭니다. "똘똘아~~"
가시덤불에 찢기고 지쳐 쓰러진 양을 발견하고 목자는 먼저 가죽 주머니의 물을 먹입니다. 그리고 감람유 주머니에서 기름을 꺼내 그 상처 난 곳에 발라줍니다. 이것을 "소생"으로 표현했어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아세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방황하다가 저절로 돌아온 것 같습니까? 목사님이 여러분을 돌아오게 한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아내가 여러분을 하나님 곁으로 돌아오게 한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여러분을 찾아가 소생시키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생시키세요. 때로 우리가 낙심했을 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닦아주시고, 와서 기름을 바르시며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갈한 우리의 목을 채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만 우리를 소생시키지 않으세요.
팔레스타인의 양을 기르는 법을 읽어보면 참 재미가 있고 성경 말씀이 더 잘 이해됩니다.
때로 어떤 양은 습관적으로 목자를 떠나는 양이 있어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자주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목자는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자는 양을 찾아 나섭니다. 포기하지 않아요. 끝까지 찾아 나서요. 그런데 참다 참다가 마지막으로 안되겠다 싶을 때, 그 가시덤불에 걸려있는 양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가 한 기구를 꺼내어 양의 다리를 붙들고 우지끈하고 부러뜨립니다. 양은 아파서 소리를 칩니다. 목자는 그 다리를 다시 깁스를 해 줍니다. 그 양은 그 날부터 절름발이가 됩니다. 목자가 왜 그렇게 하겠어요? 그의 옆에 두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양이 살기 때문이죠. 성한 다리 가지고 또 방황하다가 목자가 찾지 못하면 죽으니까, 발을 절더라도 목자 옆에 두어야 안전할 것을 목자는 알기에 사정없이 다리를 부러뜨려 버립니다. 여러분, 이것도 "소생"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생시키십니다. 때로 우리에게 와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 물을 먹이시는 하나님, 꼴을 먹이시는 하나님, 그러나 그것만이 소생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방황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드디어 회초리를 드십니다. 그러나 그 회초리를 맞을 때, 여러분의 다리가 부러질 때 낙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대로, 어찌 자식을 경책하지 않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사랑의 마음으로 당신(하나님) 옆에 두시기 위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채찍을 드시는 줄 믿습니다. 양들을 소생시키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그 소생시키신 양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더 이상 옆길로 가지 않도록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광야! 언젠가 성지 순례 가보면 다 아시겠습니다만 그곳은 길이 굉장히 많아요. 그것을 Trail이라고 해요. 오늘날도 "Trail"이라고 써 놓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에요. 일부러 길을 닦아 놓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꾸 밟아서 생긴 산길 같은 것을 Trail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의 길"이란 것은 바로 이 길입니다. 짐승이 밟았든, 사람이 많이 밟았든, 거기에는 수많은 길이 있어요. 그런데 어떤 길들은 사나운 짐승이 밟아서 생긴 잘 닦여진 길이에요. 그 길로 가면 양은 죽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좋은 길을 한번은 알았다고 해도 사막에 모래바람이 불고 나면 그 길이 금방 다 숨어져 버려요. 어디가 길인지 아무 것도 몰라요. 그러나 목자는 압니다. 그러나 양은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몰라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데 가장 괴로운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가장 부담이 되고 괴로운 것은 바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느 길이 옳은지 알아야 가지요.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가? 직장을 가질 것인가, 사업을 할 것인가? 사업을 한다면 어떤 사업을 해야 하는가? 이렇게 해야 되는가, 저렇게 해야 되는가? 이런 문제로 고민해 보셨습니까?
요즘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저와 함께 하는 코너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글은 주로 선택에 관한 상담이에요. 방송 설교를 듣고 나서 저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하고, 자기의 사정을 쭉 적어요. "목사님, 저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목사님 조언해 주십시오" 제가 교회 홈페이지에는 점잖게 씁니다만, 개인 E-Mail로는 "당신의 짐을 남에게 지우려고 생각하지 마시오. 내가 왜 당신의 짐을 져야 됩니까? 당신이 결정하시오"라고 대답합니다.
이렇듯 어떤 상황에서 무언가 결정한다는 것이 어려워요. 이 고민, 얼마나 어려웠으면 유행가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서 갈까~" 다 아시죠? 오죽했으면 우리가 그 노래를 좋아하겠어요? 우리의 심령에 맞으니까요. 무엇이 옳은 줄 압니까? 어느 길이 옳은 길인지 몰라요. 겉으로 보기에는 환한 길이고, 대로(大路) 같지만 결국에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를 누가 인도한다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사실, 주님의 뒤만 따라가면 돼요.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해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95%는 이미 나타나 있어요.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상담하고 고민합니다.
"목사님, 5년 전 우리 시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핍박했는데 내가 이 시어머니에 대한 한(恨)을 풀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여러분, 그것은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 주님의 인도를 구할 필요가 없어요. 어떤 분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목사님, 누가 와서 봉투를 하나 슬쩍 찔러 줬는데 눈감아 달라고 합니다. 봉투를 열어보니까 몇 백만 원이 들었습니다. 이 돈을 제가 받아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이런 것은 주의 인도를 받을 필요가 없어요. 왜요? 이미 주님은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니까요. 주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 길은 안전하고 옳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뒤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잠언 3장 5,6절을 보십시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나님을 인정하기만 하면, 나의 유익과 욕심에 가리워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저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당신을 좇겠습니다. 주여,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항상 뚜렷한 길을 지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해야 할 일은 하나입니다. 목자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거예요. "당신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당신은 목자고 나는 양입니다. 가르쳐 주시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 절벽으로 인도하시면 절벽을 기어올라가겠습니다. 신작로와 거친 길이 있는데, 하나님이 거친 길로 가라하시면 제가 당신의 뒤를 좇아 그 길을 주저 없이 선택하겠습니다!" 이러한 목자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삶이 우리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십니까?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이 왜 우리의 목자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
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나누어집니다. 우기가 끝나고 나면 산 위에 눈이 녹아 있어요. 팔레스타인은 여름과 겨울이 바뀌어서 비가 오거든요. 우기 때는 풀이 저 밑에까지 있습니다. 건기가 찾아오면 풀을 찾아서 산 위로 가야 됩니다. "메싸"라고 하는 평지를 찾아가야 돼요. 건기가 되면 목자는 양떼를 그 평지로 인도합니다. 그 산 위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깊은 골짜기를 지나야 되는 겁니다. 때로 그 골짜기는 너무 거칠어 보입니다. 너무 위험해 보입니다. 햇빛하나 들지 않는 깜깜한 골짜기예요. 다윗은 이것을 알았기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수많은 고통과 삶의 풍파를 겪은 사람이에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뉘라서 평지만을 달리겠습니까? 뉘라서 환한 신작로만 펼쳐지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 다 평안해 보여도, 상담을 해보면 그 마음속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남몰래 경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남몰래 눈물 흘립니다. 남몰래 괴로워합니다. 누구하나 나를 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절망감 속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요,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로 이 사망의 골짜기가 우리의 질병일수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일수도 있어요. 사업이 무너지는 일일수도 있어요. 그런 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간 것 같은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요. 왜냐하면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막대기"라는 단어는 경상도 버전에 잘 번역했어요. "몽디"라고 했는데, 바로 몽둥이죠. 70센티미터쯤 되는 몽둥인데, 그 앞에는 쇠가 박혀 있어요. 그것으로 뭘 하죠?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베드로에게 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해석하기를 "내 양을 치라"고 하신 말씀을, 목사의 할 일은 양을 먹이기도 하지만, 말 안 들으면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야한다고 설교하고 목회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전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몽둥이는 치긴 치는데 누구를 칩니까? 양을 공격하는 짐승을 치는 거예요. 이리, 늑대 등을 칩니다. 때로 그 목자는 몽둥이를 던집니다. 앞에 쇠가 박혀 있으니까 맹수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위급할 때, 몽둥이를 던져서 맹수들을 치는 거예요.
지팡이는 끝이 구부러져 있는 거예요. 우리가 쓰는 지팡이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약간 더 큰 것입니다. 목자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다가 어떻게 하는가? 지팡이 허리가 구부러져서 목자가 짚기 위해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 들어서 사용해요. 양이 다른 길로 갈 때 목을 걸어서 똑바른 길로 가라고 인도해 줍니다. 그 다음엔 양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려고 할 때나 구덩이에 빠졌을 때, 지팡이로 양의 목을 걸어서 끌어올립니다. 구원의 방패입니다.
양을 칠 때 다윗이 이 일을 해 보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통해 자기를 구원하시고 자기의 적들을 물리쳐 주시는 것을 다윗은 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길 때 스스로 대항하지 않았어요. 사울을 죽일 찬스가 왔을 때 그를 죽이지 않고 겉옷만 살짝 베었어요. 그리고 자기의 자식이 반역을 할 때 다윗은 그냥 도망 다녔어요. 아들과 전쟁하지 않았어요. 이 모든 문제를 누가 해결해 주었는가? 하나님이 막대기와 지팡이로 다윗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보호해 주신 줄 믿습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풍파를 당해 보셨습니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풍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질병,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가정의 문제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한 손에는 막대기를 드시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드시며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우리로 지나가게 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건기에 초원을 향해서 축복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갔듯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들어가야 합니다. 때로는 목자가 그곳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허락하시려고 시험을 주실 때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눈동자같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공급하는 분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갑자기 장면이 바뀝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편은 해석하기 쉬운 책이 아닙니다. 논란이 많은 책입니다. 무엇 때문에 논란이 많은가? 5절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목자와 양의 비유를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23편은 하나의 비유를 사용했는가? 두 개의 비유를 사용했는가? 이것 때문에 신학자들의 의견이 갈라져 있어요. 많은 사람이 두 개의 비유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5절 말씀 때문에, 목자와 양과의 관계가 아니거든요. 그 당시의 문화를 연구하던 사람들은 목자와 양의 비유뿐만 아니라, 주인의 잔치 비유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만약 어떤 사람이 죽을 짓을 했어요. 어떤 사람이 내 동생을 죽였어요. 그 형이 그 사람을 죽이려고 뛰어 옵니다. 그러면 베두인 광야에서는 도망가던 사람이 어떤 사람의 장막에 들어가 버려요. 법칙에 의해서 그 장막 주인이 그 사람을 내주기 전까지는 그 사람에게 손을 못 댑니다. 원수가 그 사람을 죽이려고 밖에서 낫을 들고 있어요. 그런데 그 주인이 그 사람의 사정을 듣더니 그를 내주지 않고 잔칫상을 배설해서 그 사람을 먹이는 거예요. 저도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두 가지 비유가 사용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며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 가운데, 찰스 슬레밍의 "팔레스타인 목동들의 습관"이란 책을 읽고 아주 감명을 받았어요. 이것은 목자의 비유라는 겁니다. 잘 들어보세요.
건기가 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저 산 위에 눈이 녹아 내리는 풀을 향해 목자는 올라가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금정산에 올라가 봐도 알잖아요?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면 환한 평지가 있고 동네가 나오는 것, 경험하셨죠? 그것을 "메싸"라고 해요.
드디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메싸를 향해 목자는 양을 이끌고 절벽을 올라갑니다. 올라가다 보니, 눈이 녹아 내려 물이 풍부해서 그런지 초원이 펼쳐지는 거예요. 양들이 달려가서 막 먹으려고 하면 목자가 못 먹게 합니다. 왜요? 그 메싸에는 독사가 많거든요. 갈색의 짧은 독사, 이스라엘에만 있는 이 독사가 굴속에 있다가 양들이 풀을 먹을 때, 솟아 올라와서 양의 코를 뭅니다. 뱀에게 물린 그 양은 죽어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목자는 양을 정지시키고, 지팡이를 가지고 조사를 합니다. 목자는 경험이 많아서 독사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압니다. 독사가 있는 구멍을 발견하면 그 구멍에 기름을 부어요. 왜냐 하면 뱀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기름이에요. 뱀은 몸으로 기어다니기 때문에 몸에 기름이 묻는 그 순간, 미끌미끌해서 제대로 행진을 못합니다. 그래서 기름과 기름냄새를 싫어해요. 구멍에 기름을 붓고 그것도 안심이 안되어 모든 양의 입과 코 주위에 기름을 발라줍니다. 이 기름 냄새를 맡고 독사가 피해가도록 하는 겁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기름으로 바르셨어요. 원수가 있는 곳에 푸른 초장을 배설하신 거예요. 어떤 해석이든 상관없어요. 요점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들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사탄 마귀가 공격하는 그 속에서도, 우리를 능히 보호하실 수 있고 저와 여러분을 축복하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 하나님을 믿고 난 다음에 다윗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를 것입니다. 때로 원수가 나를 이기는 것 같습니다. 악한 질병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우리 머리에 부으십니다. 잔이 넘칠 정도로 우리를 축복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동안 영원토록 따를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결심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전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미국에서 한 어린 소년이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6살에 암에 걸려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이 아이를 두고 어머니는 너무 당혹해 합니다.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기도하는 가운데 어머니는 어느 날, 우리가 읽었던 이 시편 23편을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외우도록 했습니다. 시편 23편을 날마다 아이에게 강의해 주었어요. 특별히 1절의 말씀을 강조했는데, 영어로 다섯 단어입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 어머니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꼽을 때마다 그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야. 너의 주인이 되셔. 여호와 하나님이야"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my Shepherd, 이것을 더욱 더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너의 목자야. 네가 병으로 이 땅에서 오래 살수 없을 것 같아. 엄마와 잠시 헤어져야 돼. 그러나 걱정하지마. 하나님이 너의 목자이기 때문이야. 네가 이 땅을 떠나는 날, 하나님이 엄마대신 너를 꼭 안아 주실 거야!"
어느 날, 이 소년의 어머니가 잠시 집에 들렀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요. 급하게 가보니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6살 난 죽은 아이의 시체를 두고 엄마는 통곡합니다. 그 마음을 읽어보셨어요? 한참을 통곡하고 어느 정도 진정해서 그 아이를 바라봤는데, 아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 아이의 모습이 약간 이상했거든요. 얇은 천으로 아이를 덮어 놨는데 볼록하게 나온 부분이 있어서 천을 걷어 보니까, 두 손을 꼭 잡고 가슴에 얹었는데, 이 6살 난 아이가 왼손의 네 번째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꼭 쥔 채 죽은 거예요. 엄마가 그렇게 설명했던 My Shepherd! 그 어린 마음에도 주님이 자신의 목자 되심을 믿었던 겁니다. 행복하게 이 땅을 떠났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편은 다윗만의 시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시편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고백해야 할 The Lord is my Shepherd!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당신의 목자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