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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 김제시, 완주군 사이에 걸쳐있는 모악산(母岳山; 793m)은 산 정상 부근에 어른 키의 50배나 되는 ‘쉰길 바위’가 마치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서 모악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하는데, 모악산의 김제시 쪽 산중턱에 천년고찰 금산사(金山寺)가 있다.
백제 법왕(559~600) 원년 임금의 원찰로 창건될 당시에는 자복사(自福寺)라고 했지만, 법왕이 2년 만에 죽어서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 후 200여년이 지난 통일신라 혜공왕 2년(766) 진표(眞表; 718~?) 율사가 이곳에서 신라 5교 중 하나인 법상종(法相宗)을 개창할 때, 크게 중창되면서 금산사로 개칭하고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의 전라도 김제 지방인 완산주 만경현 나산촌 대정리에서 아버지 정진내말(井眞乃末)과 어머니 길보랑(吉寶娘) 사이에서 태어난 진표 율사는 12세 때부터 자복사에서 10여 년간 수행하다가 23세 때 순제(順濟)법사에게서 사미계를 받고, 그 후에도 4년 동안 부안군 변산의 불사의암에서 불법을 연구했으나 득도하지 못하자 다시 금강산에서 7년 동안 공부했다.
금강산에서 미륵보살을 만나 점찰법(占察法) 2권과 간자(簡子) 189개를 받고 돌아온 뒤, 대중은 물론 물고기와 자라들에게까지 불법을 전하니 왕이 그 소식을 듣고 곡식 7만 7000석을 시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사찰은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타고 지금의 건물은 인조 13년(1635) 수문(守文)대사가 지은 것이다.
개화문 , 심원암 3층석탑 , 심원암 (시계방향으로) |
미륵전(국보 제62호)을 비롯하여 금강계단 앞에 6각다층 석탑(보물 제27호), 왼편 대장전 앞의 석등(보물 제828호), 노주(보물 제22호), 석련대(보물 제23호) 등 국보 1점과 보물 10점을 간직하고 있는 문화재의 보고인 미륵사는 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데, 금산사를 찾아가는 길은 호남고속도로 금산사나들목에서 712번 지방도로를 따라 약4㎞쯤 가면 된다.
전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금산사행 79번 시내버스로 약50분쯤 혹은 호남선 김제역에서 금산사행 5번 시내버스를 타고 약40분쯤 가면 금산사 입구고, 주차비는 무료, 입장료는 어른 3000원, 어린이는 1000원씩이다.
미륵전(국보 제62호) |
매표소를 지나면 여느 사찰과 달리 일주문보다 성문처럼 높은 홍예문이 먼저 방문객을 맞는데, 이것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을 아들 신검이 금산사에 가두고 감시하기 위하여 금산산성과 함께 쌓은 성문으로서 석성문 또는 견훤문이라고 한다. 개화문이라는 편액이 걸린 성문을 지나면, 일주문 그리고 계곡을 건너면 금강문, 천왕문이 있는데, 그 옆에 새로 난 길이 넓어서인지 이런 문들이 왠지 옹색하게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머물던 보제루를 지나면 계곡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광장이 펼쳐지는데, 정면 가장 높은 단 위에 5층 석탑(보물 제25호)과 종 모양의 부도탑이 있다(보물 제26호).
당간지주 |
오른쪽에는 미륵부처를 주존으로 하는 국내 유일의 3층 불전인 미륵전이 북향으로, 5층 석탑 왼편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있다.
이처럼 여느 사찰과 달리 주전을 모신 불전 앞에 석탑을 세우지 않고 송대(松臺)라고 하는 금강계단 맨 위에 석탑과 사리장엄구를 세운 것은 법상종의 사리신앙을 보여주는데, 금강계단은 수계법회를 거행할 때 중앙에 수계단을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사부대중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 일종의 법회 장소다. 1971년 11월 5층 석탑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석탑중창기와 금동관음상 등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모악산의 산세가 연꽃 모양의 배가 중생을 가득 싣고 서방정토로 떠나는 형세라 하여 예부터 미륵신앙의 성지로 알려진 곳에 미륵부처를 모신 미륵전은 1층에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린 팔작지붕 3층 건물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단층건물이다. 그 안에 높이 12m의 미륵불이 있는데, 비록 조선시대에 중창했지만 1400년 전 건축술을 되살린 것이 놀랍기만 하다.
본래 미륵이란 범어 'Maitreya'를 음역한 말로서 ‘미래에 오실 부처님’을 의미하는데, 미륵신앙은 상생신앙과 하생신앙으로 나누기도 한다. 상생신앙은 아직 보살 신분인 미륵이 도솔천을 이상세계로 여기고 사후에 다시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도솔천에서 미륵이 하생할 때 지상으로 따라와 참회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의 길로 인도받는다는 것이다.
또, 하생신앙은 중생들이 자비와 평화의 불국토를 만들어 대자대비의 세상이 되었으나, 미처 깨닫지 못하는 중생을 위하여 미륵부처가 하생하여 참회설법으로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인데, 이처럼 미륵신앙은 중생에게 희망과 안락을 주며 중생이 핍박받고 괴로움에 처했을 때 미륵부처가 나타나서 중생을 구제하고 사회를 변혁한다는 신앙이지만,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혹세무민하는 자들이 미륵을 자처하며 민중들에게 정신적 혼란을 초래케 하는 일이 많았다.
모악산 정상을 향해 약200m쯤 올라가면 직진하면 청룡사, 왼편으로는 심원암으로 가는 갈림길에 부도탑들이 있다. 나말여초 선종(禪宗)이 수입된 이후 라마교의 영향으로 둥근 석조물 안에 승려들의 사리를 모시고 그 위에 연꽃 모양의 석등을 만드는 부도탑이 석탑보다 유행했는데, 이곳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혜덕왕사 탑비다(보물 제24호).
고려 정종 4년(1038)에 태어나서 11세에 승려가 되고, 1079년 금산사 주지가 된 혜덕이 입적하자 숙종은 그에게 "혜덕"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는데, 머리가 작고 몸통이 큰 거북을 새긴 받침돌 위에 새긴 비문이 둥근 부도탑들 속에서 두드러지게 이색적이다. 지금은 머릿돌이 없어지고, 비문은 심하게 닳아서 읽기도 힘들다.
이곳에서 800m쯤 산길을 올라가면 진표율사가 법상종을 개창하기 전의 수도처로 알려진 심원암이 있는데, 심원암도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현재의 암자는 1636년(인조 14) 수문대사가 중건한 것이다.
심원암 뒤로 2층 기단 위에 세운 3층 석탑은 몸돌 네 면의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몸돌을 덮고 있는 3개의 널찍한 지붕돌은 경사를 급하게 처리하고, 처마의 양끝에서의 들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서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데(보물 제29호), 예부터 심원암 3층 석탑에서 탑돌이를 하면 반드시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많은 불자들이 찾았다.
한편, 금산사는 신라 진성여왕 6년(892) 농민출신 장군 견훤은 신라로부터 멀어진 민심을 바탕으로 완산주(전북 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웠으나, 아들의 쿠데다로 왕위를 빼앗기고 갇힌 장소이기도 하다.
견훤은 후삼국 중 가장 강성하고, 많은 부인과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935년 3월(경순왕 9년) 장남 신검이 두 동생과 함께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뒤 왕위에 오른 것이다.
금산사에서 3개월 동안 갇혔던 견훤은 사위 박영규의 도움으로 그 해 6월 금성(나주)으로 탈출했다가 고려 태조에게 투항했는데, 이듬해인 936년 9월 박영규의 내홍을 받아 후백제 공략에 나선 왕건이 완산을 공격하니 후백제는 45년 만에 망했다.
삼국사기는 견훤은 태조가 자기를 가둔 신검 형제를 관대하게 용서해주는 것을 보고, 울화병이 도져서 같은 해 9월 8일 70세의 나이로 황산(지금의 충남 연산)의 절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걷는 미륵사를 돌아보는 것도 좋은 힐링이다.
5층석탑 |
첫댓글 힐링했습니다 오늘 밤은 좋은 꿈 꿀 것 같습니다 ㅎ
마음이 부처님처럼 고운 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