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스키타이-알타이 문화 들어가는 말 신라의 문화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독자적인 양상을 보여주는데 스키타이-알타이의 북방유목민적 요소를 많이 보입니다. 이는 신라 지배층이 흑해-중앙아시아-몽골고원으로 이어지는 초원의 길을 통해서 이주한 이들로서 그 경로를 통해 서양문명세계와 무역을 했다는 것을 추정케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신라인이 외래 종족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라시아북방유목민이 우리 민족으로 초원길을 따라 이동해 갔고 후에 여러 정치적 변화에 의해 이들이 다시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래 글에서는 스키타이 세계와 그 문화를 살펴보고 신라와의 문화적 유사성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래 글은 개인 연구가 아니라 여러 자료에서 관련 부분들을 모아 정리한 것입니다. 1. 스키타이 1. 스키타이 명칭 SKYTAI는 SKYTHIA지방에 살고있는 주민을 말한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BC 5세기경 흑해지방을 답사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을 ‘스키트인’이라고 기록하였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인은 이란어를 쓰는 유목민으로 BC 8세기 흑해북안에 이주해온 사람들로서 페르시아인들은 이들을 사카라 부르고 있어 대개 총칭하여 스키타이, 사카족이라 불린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이었던 스키타이인(人) 중에서 남하하여 인도에 정주한 한 종족 사카족(Saka)이라고도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난 종족 이름인 샤카(?kya)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석가란 샤카를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2. 스키타이 활동지역 스키타이 문화는 BC 7세기~BC 3세기에 흑해북쪽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성립된 기마유목민족문화를 말하며 드네프르강 하류 니콜폴 근방이 스키타이 왕국의 정치, 경제 중심지였다. 그러나 스키타이의 특징적인 문화요소들이 흑해북안,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분지, 알타이, 북방오르도스 지역까지 북방유라시아 거의 전역에 걸쳐 확인되고 있어 이 지역을 ‘스키타이 세계, 先흉노-스키타이 세계’라 부른다. 스키타이 세계에는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문화, 볼가-우랄강 유역의 사브라마트 문화, 중아아시아의 사카문화,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분지의 타가르 문화, 알타이 파지릭 문화, 서몽고의 울람곰 문화, 오르도스의 모경구 문화 등이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스키타이 문화 요소를 지니는 고고학문화들이 삼림지대와 산악지대를 따라 다수 알려져 있다.
3. 스키타이 종족 구성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대체로 네 개 종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다. 이들이 농경스키타이, 농업스키타이, 유목스키타이, 왕족스키타이들이다. 농경스키타이와 농업스키타이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순수한 스키타이가 아니고, 스키타이에 의해 정복된 원주민인 것 같다고 한다. 스키타이는 유목스키타이라고 해야 하나 그 중에서 지배적 지위였던 것이 왕족스키타이로 그들은 가장 용감하고 수도 많고 타의 스키타이를 자기의 노예로 간주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들을 스키타이라 부른다 해도 네 집단이 동일 인종에 속하고 공동기원을 갖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종합해보면 그리스 관점에서 그리스 밖의 유목지역 - 왕족스키타이의 지배 아래 있던 지역을 통칭해서 스키타이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키타이가 인도 유럽어족인 이란계 인종이라 말할 때 이들은 흑해주변 지역의 원래의 토착민(동쪽에서 이주해온 스키타이에 의해 정복된 이들)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4. 스키타이의 기원 스키타이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기원 문제는 남러시아토착민설과 아시아에서 침입해왔다는 외래기원설이 있다. 헤로도토스 자신도 『역사』저서 속에서 가장 믿고 싶다고 한 것은 스키타이는 기원전 7세기 말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침입해 왔다는 설이다. “스키타이인은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유목민이었으나 맛사게티아인과의 싸움에 져서 압박을 받아, 볼가강 건너 긴메리아人 나라로 향하여 퇴거한 것이다. 스키타이인이 몰려움에 긴메리아인은 왕족과 민중의 의견이 분열되었다. 즉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왕족의 견해와 퇴거해야 한다는 민중의 견해가 있었으나, 긴메리아인은 결국 싸우지 않고 스키타이에 땅을 넘겨주었다.” “지금도 스키타이에는 긴메리아 성벽, 긴메리아 나루터, 긴메리아라는 지방도 있고, 긴메리아 해협도 있다. 또 스키타이인이 그들을 추적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메디아 영토에 침입한 일도 확인할 수 있다…….” 스키타이에 대한 앗시리아왕 연대기의 기록, 이란 서북부 지베의 발굴자료, Caucasus 우랄왕국 발굴자료 등을 통해서도 아시아 진출설은 신빙성이 있는 언급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스키타이 종족 중 서쪽의 흑해지방의 농업에 적합한 지역의 스키타이는 농업문화 속에서 생활하였고 분묘도 토장묘임에 비하여 동쪽의 초원지대의 스키타이는 유목문화 속에서 생활하였고 적석묘를 남겼다. 이들은 분명히 그 기원을 달리 한다고 보아야 하며 유목스키타이는 중앙아시아쪽으로부터 이동해온 우랄-알타이 어족인 것이다. 스키타이 네 종족 중 왕족 스키타이가 동쪽에 위치해 있고 지배적인 지위였다는 것이야말로 많은 학자들의 아시아 기원설을 뒷받침해 준다. 알타이 주민인 Agrippaioi가 동유럽으로 분리해와 왕족스키타이를 세웠다는 헤로도트스의 기사도 있다. 토착민설에 대해서는 문헌사료가 제시될 수 없는 실정이다.
5. 스키타이의 역사적 흐름
Ⅱ. 스키타이세계 문화
1. 스키타이세계-유목기마민족문화
2. 스키타이 체제 스키타이가 남러시아, 북Caucasus초원지대를 중심으로 강대한 유목국가를 형성하여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기원전6세기의 일이다. 스키타이왕국은 그 영토를 네 개의 주로 나누어 각 주는 몇 개의 구역으로 세분되고, 각각 반독립의 통치자를 갖고 있었다. 그들 반독립의 귀족들과 스키타이왕은 군사적, 정치적 연결로 맺어져 있었다. 왕이나 귀족 밑에는 유목스키타이가 전사계급을 구성하여 군사활동에 종사했으며, 평시에는 각각 영지내에 살며, 유목에 종사했으나 그들의 경제적 기초는 주로 피지배 민족에서의 약탈과, 그리스植民市와의 교역에 있었다. 한편 농경, 농업 스키타이는 집락을 형성하여 정주하며, 곡물, 파, 콩 등을 재배했으며 대소의 有角獸나, 말, 닭 등을 사육했다고 한다. 스키타이 내에서는 계급분화가 진행되어 빈부의 차이가 심했다. 그것은 분묘의 부장품에서 확인된다.
스키타이의 역사는 대개 3기로 편성된다.
3. 스키타이세계의 공통요소 기원전 7~6세기 스키타이문화는 동유럽남부나 흑해연안 뿐 아니라, 알타이산지에 걸치는 유라시아 초원 및 반사막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문화는 그 다양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단일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마구의 세부장식 -남자의 카후탄의 머리장식, 신발류 등 복식품 -음식물을 익히는 청동솥을 비롯한 청동이나 목제용기 -무기류 : 짧은 활, 화살, 화살통, 아키타케스형 단검 등 -미술의 모티프와 장식 : 동물문양 *이들 출토품에서 한결같이 보이는 것이 스키타이적 동물의장
※알타이주민인 Agripaioi가 동유럽으로 분리해와 왕족스키타이를 세웠다는 헤로도투스의 기사는 스키타이 유목민이 얼마나 이동을 했었는지를 보여준다. 넓게 보아 이들은 단일 문화권으로 보는 것이 옳다.
4. 기원 전 7~1세기 스키타이 세계의 문화
Ⅲ. 신라와의 관련성
1. 적석목곽분 -적석목곽분은 경주지역에서 4세기 초에 나타난다. 알타이 지역의 대표적 적석목곽분은 이시크 쿠르칸, 파지리크 고분 등이다. 이 고분이 만들어진 시기는 신라 왕보다 800년이나 앞선다. 적석목곽분의 구조는 통나무집에 관을 넣고 부장품을 넣은 다음 그 위로 자갈돌을 쌓아 덮는 것이다. 이것이 스키타이-알타이의 쿠르간이고 신라의 적석목곽분이다. 바이칼 주변의 알타이 지역에서는 백화나무로 통나무집을 짓는데 그 양식이 죽은 사람의 무덤을 만드는 기본구조이다. -이들 무덤 속에서 금관, 금허리띠 등 많은 금세공품이 발굴되었다. 그 디자인도 북방 유목문화의 특징을 띠고 있다. 스키타이, 흉노 등 북방유목민은 금세공에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지는 알타이 산맥으로 알타이란 금이란 뜻이다. 경주 천마총 안으로 들어가 보면 무덤의 주인공이 금관, 금팔찌, 가슴장식, 금귀고리, 금허리띠 등 온통 금장식품들을 지니고 있다. 이시크 고분의 금제 유물은 수백점에 이른다. 신라 적석목곽분엔 중국식 물건이 거의 없는 반면 몽골 초원 문화를 이어받은 유물들과 로마지역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제품이나 공예품들이 많다. -적석목곽분에는 마구와 무기가 많다. 즉 무덤의 주인공이 기마군단의 지휘자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초기 철기문화의 유물로 생각되고 있는 경주 입실리, 영천 어은동(추정연대:AD1c)의 유물에 약간의 마구 혹은 스키타이계의 영향을 받은 동물형 대금구 등이 있어 상당히 오랜 옛날에 말문화가 전래되었음을 말해준다.
2. 금제모자 (금관)
3. 수목 숭배 알타이 지역 적석목곽분의 나무는 백화나무이다. 백화나무는 서쪽 전시베리아 지역에 자생하는 한랭지대의 나무다. 신라 천마총의 말다래는 흰 백화나무껍질로 제조했고 그 위에 천마도를 그렸다. 그리고 모자까지 만들어 쓰고 다녔다. 일본에서는 신라를 白木이라고 표기하고 시라키라고 읽었다. 유목민이었던 스키타이족도 이승의 집이나 저승의 집을 백화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4. 새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동쪽 이시크(Issyk) 고분에서 발견된 기원전 3세기경 사람인 스키타이 여자 戰士(전사)는 금으로 만든 솟대를 모자에 달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신라 금관과 똑같다. 특히「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은 여자 귀족의 높이 올린 머리장식에서 금으로 만든 새가 여러 마리 달려 있었는데 신라 자비마립간의 여동생인 鳥生夫人(조생부인)은 이름도 새가 낳은 부인이라는 뜻이지만 그 여인의 직업도 의례를 관장하는 祭官(제관)이었다. 신라와 유사한 민족구성과 문화양상을 지닌 弁辰(변진)에서 大家(대가)가 죽으면 대문에 새의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魏志 東夷傳). 죽은 자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인 실물로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조각품에 나무 위에 새들이 앉아 있는 것들은 한둘이 아니고, 경주 瑞鳳塚(서봉총) 금관은 머리 부분에 세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신라 金氏 왕들의 조상인 김알지가 계림에서 발견되었을 때 온갖 새들이 노래하였다. 일본 古墳時代(고분시대)의 벽화에는 死者(사자)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船)의 항해사로 새들이 앉아 있다. 나라(奈良)의 후지노키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관에는 십여 마리의 새들이 앉아 있다. 일본 神祠(신사)의 입구를 지키는 도리(鳥居: 門)도 새들이 앉는 곳이다. 흉노 추장의 모자 꼭대기에 새가 달려 있다. 야쿠티아 박물관에 말과 백화나무가 어우러져 있는 곳에 여러 개의 솟대들이 전시돼 있다. 어느 솟대에는 까마귀가 한 마리 앉아있고 어느 솟대 위에는 여러 마리의 새가 앉아 있었다 까마귀는 몸집에 크고 여러 마리의 새는 몸집이 작다. 높은 솟대위에 앉은 까마귀는 왕이고 얕은 솟대 위의 새들은 신하들이다. 소호국의 모든 공경대부가 각종의 새들이었다는 내용을 현대 민속이 설명하고 있다. 소호는 중국 고전인 산해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서방의 신이다. 소호는 황아라는 선녀의 아들이다. 황아는 베를 짜는 여인으로 뗏목을 타고 은하를 저어나가 궁상이라는 뽕나무 밑에서 백제라는 소년을 만나 사귀었다. 이때 그들이 타고 놀던 뗏목의 돛대 위에 옥으로 깎은 비둘기를 달아놓아 방향을 잃지 않게 하였다. 황아와 백제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인물이 바로 소호이다. 뽕나무 아래서 태어났다고 하여 일명 궁상씨(窮桑氏)라고도 한다. 소호는 장성하여 고향을 떠나 동방의 바다 밖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 소호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호국에서는 모든 공경대부가 각종의 새였다. 알타이 문화권에서는 鳥葬의 풍속이 있다. 글자 그대로 사람의 시신을 새를 통하여 하늘나라로 보내는 엄숙한 의식이다. 까마귀 또는 독수리가 내려와 쪼아 먹는다. 특히 전통적인 햐먼의 주검이나 후대에 휴행하는 라마교 승려의 주검은 철저하게 조장으로 처리되는 전통이 계속되고 있다. 새들을 이용하여 영혼을 고향인 하늘 나라로 돌려보내는 의식이다. 솟대와 새는 모두가 알타이 문화권의 오랜 전통으로부터 현대 민속으로 계승된 것들이다.
5. 곡옥 파지리크 5호 고분에서 나온 물건 중 통나무집 벽에 걸어 놓았던 모직 담요 펠트(Felt)가 있다. 수놓아 그린 그림에 두 사람이 보인다. 왼쪽 사람은 의자에 앉았는데, 동양인 얼굴에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이고 푸른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오른쪽 사람은 말 위에 앉은 남자 기사인데 튜닉형의 半두루마기를 입고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감아 올린 아랍인 型이다. 파지리크의 曲玉은 기사가 탄 말의 가슴에 한 개, 콧잔등에 한 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곡옥은 굽은 옥으로 커다란 머리와 가는 꼬리로 구성되고 머리 부분에 구멍이 뚫려 끈을 꿰어 매달 수 있는 장신구이다. 대부분 푸른 玉 제품이고 때로는 金製 또는 石製도 있다. 곡옥은 신라 왕족의 금관, 목걸이, 허리띠에 여러 개 달려 있어서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스키타이인들은 馬面과 말 다래에 물고기 한쌍을 장식하였는데 신라 금제 허리띠에 물고기 장식이 있으며 김해 가락국 수로왕릉의 대문에 새겨져 있는 쌍어문도 같은 사상적 맥락이다. 알타이어족의 한 갈래인 바이칼 에뱅키족의 샤먼 복장의 장식에도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다.
7. 백마 러시아 바이칼 지방의 원주민들은 한국사람의 모습과 똑같은 북방계 몽골로이드이다. 브리챠트족과 에벵키족이 주력인구다. 브리야트족은 한국인과 가장 유전인자가 가까운 종족이라고 한다. 이들의 샤먼의 복장은 신라왕족들의 제복의 선형을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등과 가슴에 달린 금속장식-새들과 물고기은 신라왕족묘에서 발굴되는 허리띠 장식과 비슷하다. 이르쿠츠크 북쪽에 야쿠티아가 있다. 야쿠트족은 브리야트족의 일파이다. 야쿠티아는 러시아식 이름이고 이 지역 토착주민들은 자신들을 사하족이라고 부른다. 사하라는 말의 뜻은 해 돋는 땅이다. 이곳 박물관에 박제된 백마 한 마리가 있다. 다리가 짧은 몽골마 계통인데 성스러운 장소를 표시하는 금줄을 띄우고 줄에는 색깔 있는 헝겊을 달아놓았다. 백마는 정의로운 통치자가 타는 말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성한 말이다. 카자흐스탄의 이씩 지방에서 발굴된 스키타이 말기에 고분의 주인공은 흰말을 타고 지휘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신라의 박혁거세도 백마가 나정에 놓고 간 커다란 알에서 태어났다. 신라 천마총에는 백마가 구름을 가르며 힘차게 뛰기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장니가 발견되었다. 이렇게 백마는 정통성을 갖춘 통치자를 상징하는 기마민족들의 善神이다.
8. 각배 각배는 제사용 술잔으로 이스라엘 민족, 스키타이족에서부터 아시아의 기마민족 문화가 퍼진 전 지역에서 유행한 술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가야 지역에서 발견된다.
9. 동복 훈족의 이동경로에서는 기마민족의 상징적인 유물로 크고 작은 동복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동복은 가야시대 고분인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훈족은 동복을 말 잔등에 싣고 다녔다. 1924년 경조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국보 91호인 기마인물상 토기를 보면 말 잔등에 동복을 긷고 있다. 스키타이의 청동제 복은 조리용, 향로용 등 종류가 다양한데 같은 모양의 동복이 한국의 가야고분에서도 출토되어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맺는 말 유목민들이 생활하는 초원지대는 정착국가와 같이 경계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단일문화권으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유목민은 말을 타고 달리며 상당히 먼 거리도 빠른 시간에 이동하며 그들의 생업특성에 의하여 부족끼리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제국을 이루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자연히 같은 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문화의 원류가 어디인가는 깊이 있게 연구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민족은 원래 기마민족으로 일찍이 수준높은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문화가 원류가 되어 세계 각지로 전파된 흔적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는 현재 북방유목민의 문화 또한 바로 우리 문화의 갈래임을 밝혀가야 할 것입니다. 스키타이가 사용한 각궁과 말 위에서 활을 쏘는 모습, 흉노의 기마모습이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모습과 거의 일치하는 것, 스키타이의 대표적인 문화인 동물문양의 모티프가 될 수 있는 그림이 알타이지역에서 훨씬 빠른 시기에 이미 등장했으며 사슴을 소재로 한 그림은 부여지역에서도 발견이 되고 있어 과거 우리 문화가 뒤늦게 스키타이나 시베리아 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는 이론은 이제 지양되어야 합니다.
참고:박춘순, “스키타이문화의 기원과 전파”, 『충남생활과학연구지』, 1899 김병모, “스키타이 문화”, 『한국의 전통문화』, 1996년 12월 http://kr.blog.yahoo.com/woong/30.html http://kr.blog.yahoo.com/han1592/971235.html 블로그 네이버, 스키타이에서 가장 동쪽의 빠지릭 문화 5세기 로마를 호령한 훈족은 한민족, 주간동아 2003.9 민족의 뿌리를 찾아서, 블로그 단군 오루문 낙랑문화, daangoon.pe.kr |
출처: 예비 천하공의심판관 블러그 원문보기 글쓴이: 금빛물결
첫댓글 한반도로부터 저 먼 중앙아시아지방으로 이동을 했다가 어찌 어찌 하여, 다시 중앙아시아로부터 한반도로 왔다는 위의 글 서문을 보니, 기가 막히다 보해 웃음이 나옵니다. 반도로부터 중앙아시아는 직선거리로 일만오천리쯤되며, 길을 따라 온다면 3만리길도 더 되는 거리인데, 이 중간에는 수많은 이민족들이 있음에, 이들을 돌파하여 갔다가 다시온다?
갈 때는 왜 간 것이며, 올 때는 왜 온 것인가? 해답없는 의문은 창조적입니다. 역사를 말하는 곳에서 "창조"란 말은 결코 사용될 수 없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