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동에 가봤어? 아니, 아직 못 가봤는데. 이런, 명동을 모르면 말을 말자. (1960년대)
- 우리 오늘 어디서 만날까? 뭐, 두말하면 잔소리지. 명동 거기서 보자. (1970년대)
- 요즘 명동에 가본 적 있어요? 아뇨. 명동에 뭐 특별한 게 있나요? 뻔하잖아, 볼 것도 없고. (1980~90년대)
- 얼마 전 명동에 다녀왔는데 사람들 엄청 많데. 거리도 확 달라졌더라고. 그래? 얼마나 달라졌는데? 명동 안 가봤어? 이런, 명동을 모르면 말을 말자. (2000~2010년)
명동, ‘글로벌 쇼핑·관광특구’로 뜨다
한국의 대표 번화가 ‘명예회복’
넘치는 유동인구로 상권 ‘빅뱅’
외국인 관광객 방문 1순위 장소 부상 “원더풀”
서울 도심 재창조 맞물려 ‘후광효과’도 톡톡
8월 10일 오후 2시 무렵 서울 중구 명동. 평일 이른 오후인 데다 푹푹 찌는 듯한 날씨였지만 명동 거리는 오가는 행인들로 활기가 넘쳤다. 특히 20·30대 젊은 층이 유독 많이 눈에 띄었다. 대로변, 골목길 등 구석구석 요지를 차지한 화장품 매장들 앞에서는 유니폼을 차려 입은 여성 점원들이 연신 애교 섞인 목소리로 호객 행위를 했다.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 중 한 여성은 양손에 물건이 그득한 쇼핑백을 들고도 계속 주변 매장을 두리번거리며 즐거워했다. 자라, H&M, 포에버21 등 외국 패스트패션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대형 쇼핑몰들도 손님 맞이로 분주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명동 거리는 점차 밀도가 높아졌다. 오후 6시가 가까워지자 명동 전체가 사람들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자유롭게 발걸음을 옮기기조차 어려웠다. 그냥 인파에 떠밀려 이동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한 명동 상인은 “요 몇 년 전만 해도 크리스마스 이브 때나 볼 수 있었던 광경인데 요즘은 사시사철 이렇네요”라며 활짝 웃었다. 명동이 사람들로 넘쳐난다. 인산인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쇼핑객, 관광객에 주변 직장인들까지 뒤엉켜 그야말로 거대한 ‘인간시장’을 이루고 있다. 명동은 과거 여러 차례 부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부동의 ‘대한민국 1번가’로 부활하고 있다.
지난 2월 27일 명동 입구의 대형 쇼핑몰 ‘눈스퀘어’에서는 세계적인 패스트패션 브랜드인 H&M의 국내 첫 매장 개점식이 거창하게 열렸다. H&M은 명동에 매장을 내기 위해 3년 동안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행사 참석차 직접 방한한 H&M의 칼 요한 페르손 CEO는 “오랜 기간 준비해온 한국 첫 매장을 열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국내 시장 진출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H&M은 가장 임대료가 비싼 상권에 점포를 여는 것을 출점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령 미국과 일본 시장에 진출할 때는 각각 뉴욕 5번가와 도쿄 긴자 거리가 첫 번째 타깃이 됐다. 한국에서 가장 핵심 상권으로 꼽히는 명동을 1호점 개점 장소로 삼아 공을 들인 것도 이 때문이다.
H&M의 명동 입성은 여러모로 시선을 끌어 모은 ‘사건’이다. 우선 H&M 매장 오픈을 계기로 세계 시장을 주무르는 유수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이 몽땅 명동에 진을 쳤다는 점이다. H&M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자라, 유니클로, 갭, 포에버21, 망고 등 글로벌 ‘빅 브랜드’들은 명동에 교두보를 마련한 상태였다.
글로벌 패스트패션 업체들은 아무데나 매장을 열지 않는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든 가장 노른자위 상권이 공략 대상이다. 패션 매장은 다른 어떤 제품 매장보다도 유동인구의 규모에 민감하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일수록 노출도가 높아지고 판매량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명동은 ‘한국 최고의 상권’이라는 사실을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셈이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핵심 상권에 매장을 갖고 있느냐 여부는 패션 브랜드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매출도 매출이지만 브랜드 인지도 제고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외국 패스트패션 브랜드들이 잇달아 명동에 매장을 열고 뜨거운 경쟁을 벌이는 것은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동이 상권으로서 가진 매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인구 최다 집중지역인 수도 서울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꼽을 수 있다. 명동 주변에는 대형 업무용 빌딩이 즐비하다. 각종 상업시설도 수두룩하다. 여기에서 비롯하는 파급효과는 매우 크다. 무엇보다 명동 상권 주변을 오가는 유동인구가 엄청나다는 점이다. 하루 평균 유동인구는 무려 150만~200만 명에 달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추산이다. 명동 상권을 직접 찾는 방문객도 하루 수십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유동인구 상위 10위 지점 안에 7개
서울시는 지난해 4개월간에 걸쳐 서울 시내 주요 가로와 교차로, 다중이용시설 등 1만개 지점을 대상으로 유동인구의 규모와 특성을 실측하는 조사를 벌인 바 있다. 이 조사에서 명동은 상위 10위 지점 안에 7개 지점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명동CGV, 티니위니 명동점, 롯데백화점 본점, 엠플라자, 유네스코하우스, 세븐일레븐 주변 등이 그 지점들이다(엠플라자 주변은 명동1, 2가쪽 2개 지점 포함).
마치 블랙홀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명동의 엄청난 ‘흡입력’을 실제로 입증한 결과인 셈이다. 이 조사에서 1위 지점은 강남의 핵심 상권인 강남역 교보타워 주변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지역 단위’로는 명동 일대가 서울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집중되는 곳이라는 게 서울시의 분석이다.
명동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글로벌 특구’이기도 하다. 요즘 명동 거리를 걷다 보면 우리말 외에도 일본어, 중국어, 영어 등 외국어가 수시로 귓전을 때린다. 그만큼 외국인 방문객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명동 근처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 김선규(38) 씨는 “명동 지역 음식점에서는 외국인 손님들을 흔히 볼 수 있어요. 한번은 밤늦게 동료들과 함께 감자탕집에서 술 한잔 하고 있는데 주변 테이블 손님들이 모두 일본인이었던 적도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닐슨컴퍼니코리아가 지난 2~3월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이 서울 여행 중 가장 많이 방문한 장소는 단연 명동(67%)인 것으로 밝혀졌다. 명동 다음으로는 동대문시장(50.4%), 남대문시장(39%), 인사동(33.1%) 등의 순이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외국인 관광객의 명동 지역 방문이 2007년 이후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명동은 2007년 같은 조사에서 54%로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에 이어 3위에 그쳤다. 하지만 2009년 두 시장을 추월해 1위에 오른 데 이어 그 격차도 점점 더 벌려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유세준 한국관광공사 해외마케팅실장의 말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명동을 방문하는 첫 번째 목적은 쇼핑입니다. 온갖 쇼핑 품목들이 다 있는 게 명동의 매력이거든요. 특히 일본인과 중국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그들이 찾는 아이템을 총망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게다가 주변의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도 외국인 쇼핑객들을 명동으로 끌어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지요. 한마디로 저가 상품에서 고가 명품까지 한자리에서 쇼핑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명동이라는 겁니다.”
서울시, 관광산업 육성 위해 적극적 지원
명동을 찾는 외국인 방문객이 크게 늘다 보니 서울시도 대책을 내놓았다. 지난해 1월부터 영어, 일본어, 중국어에 능통한 관광 안내원을 명동 지역에 배치해 ‘움직이는 관광안내소’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외국인 관광객이 한국에서 가장 불편을 겪는 게 바로 언어소통 문제라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요즘 명동 거리에 나가 보면 영어 단어 ‘information’의 첫 글자 ⓘ가 찍힌 빨간 조끼를 착용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바로 ‘움직이는 관광안내소’다. 이들은 명동 일대를 계속 순회하면서 먼저 외국인에게 다가가 통역을 비롯해 지리정보, 관광·쇼핑정보를 안내한다. 말하자면 ‘찾아가는 감동 서비스’를 제공하는 셈이다.
서울시는 명동을 시작으로 남대문, 신촌, 이태원, 동대문, 인사동 등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다른 지역에서도 ‘움직이는 관광안내소’를 확대 운영 중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움직이는 관광안내소는 서울의 ‘관광매력’을 업그레이드시켜 ‘다시 방문하고 싶은 도시 서울’의 이미지를 심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대한민국 1번가’ 명동의 르네상스는 하루아침에 뚝딱 이뤄진 게 아니다. 명동은 1970년대 정점을 찍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 전체를 통틀어 명동과 견줄 만한 상권은 없었다. 명동이 상업, 금융, 문화, 유행의 총본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명동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서울시의 도시발전에 따라 강력한 부도심이 곳곳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강남, 여의도, 대학로, 신촌 등은 과거 명동이 누렸던 패권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다. 명동은 ‘단 하나’에서 ‘여럿 중의 하나’로 지위가 내려갔다.
게다가 새로 떠오른 부도심들은 명동보다 더 세련되고 더 매력적이고 더 활력 넘치는 모습으로 명동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유행의 첨단은 강남에서 시작했고, 경제의 혈맥인 금융은 여의도와 강남으로 분산됐으며, 문화예술의 향연은 대학로에서 펼쳐졌다.
그러는 동안 명동은 ‘구닥다리’ 취급을 받으며 점점 더 빛을 잃어갔다. 문제는 명동이 시대에 맞춰 변화를 시도하려 해도 발목이 묶여 있었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건물 신축을 제약하는 건축법 조항이었다. 이동희 명동관광특구협의회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명동 상가 건물들은 대부분 수십 년 전에 지어져 건폐율(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면적 비율)이 90~100% 정도 됐습니다. 그런데 낡은 건물을 헐고 신축하려면 건폐율을 건축법상 ‘일반상업지구’에 적용되는 60%에 맞춰야 했어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건물을 신축하면 자산가치가 절반 가까이 떨어지지 않겠어요? 이런 문제점 때문에 모든 건물주들이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죠. 그 때문에 명동 거리는 점차 슬럼화됐고요.”
‘중심상업지구’ 변경이 대반전 계기로
이런 난국을 해결할 수 있는 극적인 반전의 계기가 2006년 12월 다가왔다. 서울시가 명동 지역을 ‘일반상업지구’에서 ‘중심상업지구’로 변경해준 것이다. 이른바 ‘명동 제1종 지구단위계획’ 결정 고시에 따른 조치였다. 핵심은 건물 신축 시 건폐율을 90%로 대폭 상향해준 것이다. 아울러 용적률도 최대 800%까지 보장됐고, 높이 제한도 완화됐다. 명동 현대화를 위한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이때부터 명동 거리에는 건물 신축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깔끔하고 세련된 매장들이 속속 선을 보였다. 서울시는 명동 가로환경 개선사업으로 더욱 힘을 보탰다.
꼬이고 꼬인 매듭이 풀리자 호재가 이어졌다. 무엇보다 2000년대 이후 서울시가 추진한 ‘도심 재창조’ 사업의 효과가 명동으로 흘러 들어왔다. 서울 도심은 최근 수 년간 광화문광장 조성, 청계천 복원 등으로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자연히 그 중심부에 있는 명동 지역도 유동인구가 증가하는 후광효과를 누리게 된 것이다. 더욱이 서울시의 관광산업 집중 육성도 명동 르네상스에 큰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세준 한국관광공사 해외마케팅실장의 분석이다. “명동은 이제 ‘선순환 구조’가 정착된 것 같습니다. 내국인들이 많이 찾으니까 외국인들도 덩달아 찾고, 강남에 빼앗겼던 상권도 되찾아 왔어요. 요즘 명동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빕니다. 그런데 그게 불편하다기보다는 즐길거리가 되고 있어요. 말하자면 명동 그 자체가 ‘관광상품’이자 ‘축제’가 된 거죠. 또한 명동은 경복궁, 남산, 인사동 등 4대문 안에 있는 관광명소와의 연계성도 좋아요. 이런 점으로 볼 때 명동은 이제 서울 도심관광의 중핵 구실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