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고 14.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금, 은 그릇을 옮겨다가 바벨론 신당에 두었던 것을 고레스 왕이 그 신당에서 꺼내어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내주고 15.일러 말하되 너는 이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라 하매 16.이에 이 세스바살이 이르러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지대를 놓았고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 하였사오니 17.이제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보물전각에서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스5장).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백성들에게 악하게 행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전 재건을 멈추게 하려 하였지만, 총독 닷드네와 신하들은 성전을 재건하는 백성들에 대하여 비교적 공정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다리오 왕에게 편지를 올린다. 오늘 말씀은 총독 닷드네가 다리오 왕에게, '바벨론 고레스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하여 거기에 소요되는 그릇 등 모든 물자를 제공하였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인지를 확인하여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명령을 내려 달라'는 내용이다.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비롯한 온 백성들의 하나님의 성전 재건을 향한 열정은 대단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알았기에 그들 인생 최대의 목표는 오직 성전을 재건하는데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라서의 전체적인 내용은 '신앙을 되찾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귀환길에 오른 백성들이 수많은 반대를 이기고 성전을 재건한 후, 율법의 말씀을 따라 예배를 회복하고 새롭게 영적으로 부흥'되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나로 뭉친 백성들의 헌신으로 인해 하나님은 기뻐하시었고 백성들은 참된 만족을 얻게 되었다. 이 에스라서의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아야 하고 어떻게 해야 그 목적에 맞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창조된 피조물은 그 목적에 맞는 삶을 살아야 만족할 수가 있다. 물건을 예로 들어 보자. 내 손에 컵이 있는데 이 컵이 만들어진 목적은 컵 안에 물을 담아 그 물을 먹기 위함이다. 때문에 금이나 은같이 아무리 귀한 재료로 컵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컵 안에 물이 담기지 않으면 이 컵은 만들어진 목적을 잃어버렸다 할 수 있다. 동물이나 식물은 쉽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동물에게 있어서 먹을 것 실컷 먹고 누워 편안히 잠을 잘 곳만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만족이 된다. 하지만 사람은 동물과 전혀 다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높은 지위에 오른다 할지라도 참된 만족을 얻었다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재물이 많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에게 있어서 재물은 부족하고 부족하며 부족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창조된 목적은 재물을 벌기 위함도 아니요,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참 만족을 얻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담아야 할 곳에 다른 것을 담고 다니며, 가장 가치가 있고 중요한 그 분을 놓치고 정신 없이 흘러가는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모임에서 한 목사님이 실제 겪은 일을 들려 주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목사님 부부가 부산에서 열린 모임에 갔다가 오는 길에 운전하던 목사님이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을 다녀 온 후 다시 차를 운전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렸다. 운전 중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 보니 그날 따라 피곤하다며 뒷자리에 앉아 눈을 붙이던 부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부인을 휴게소에 두고 온 것이다. 목사님이 화장실에 간 사이 부인도 일어나 화장실에 갔는데 그것도 모르고 차에 타자 마자 출발해 버린 것이다. 당시에는 휴대폰도 없고 고속도로에서 차를 돌릴 수도 없어서 발만 동동 굴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한다. ‘아니고 이 일을 어째.. 이혼 당하게 생겼네’. 할 수 없이 그는 다음 휴게소에서 고속도로 순찰대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한 시간 후에 순찰차가 화가 난 부인을 태우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지, 어떻게 아내가 탔는지 안 탔는지도 모르고 갈수가 있는가? 하지만 이런 일은 우리 가운데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역시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인 주 예수님을 잊어 버리고 주 예수님 없이 나 혼자 아무 생각 없이 가 버리는 그런 생활을 살 때가 많다. 새벽에 일어나면 말씀을 보아야 하지만 주부들은 어느새 가족을 위해 밥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엌으로 가고, 그 일만 끝내면 다시 와서 말씀 보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부엌에 가 보면 일이 꼬리를 물고 있으므로 결국 그날 아침 부흥을 실패하고 만다.
남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어나자 마자 말씀을 보겠다고 작정하지만 알람을 끄기 위해 휴대폰으로 가고 알람을 끄는 것 까지는 좋은데 오늘 무슨 뉴스가 있는지 잠깐 만 보고, 혹은 일기 예보만 보고 다시 말씀을 보려고 할 때 그 날도 역시 뉴스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진단을 해 보면 실은 아주 간단하다.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지 우선 순위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 났을 때에 가장 먼저 만나야 할 분이 하나님이요, 보아야 할 것이 말씀이라는 인식이 있고 이것에 우선 순위를 두면 아주 쉽게 그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일어나서 먼저 밥통에 스위치를 켠 후에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우선 순위를 정하는 즉시 그날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기 어렵게 된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 나겠다고 휴대폰의 알람을 끄는 즉시 기도하고 말씀을 보아야 하는데 휴대폰의 화면을 보고 흥미를 일으키는 뉴스를 보는 순간 그날 아침은 또 실패하게 된다.
아무리 급해도 내 차 뒤에 아내가 타고 있는 것은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내를 버려 둔 채 나 혼자 하루 종일 차를 몰고 간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잘못하면 정말 이혼 당할 수도 있다. 세상 사는 일이 아무리 급해도 주 예수님이 내 인생의 중심 자리에 잘 앉아 계시는지는 확인하고 가야 한다. 잘못하면 주님과 헤어질 수도 있다.
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님의 부모들이 유월절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러 갔다가 다시 돌아 오는 길에 아기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이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2장44절에는 예수의 부모들이 '예수가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다고 한다. 이 말씀이 정말 이해가 되는가? 열 두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이를 부모가 직접 챙기지도 않고 동행 중에 있는 줄 생각하고 하루 길이나 갔다는 말인가?
이것이 오늘날 이 시대 가운데서 우리가 겪는 문제다.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절기도 지키고, 헌금도 성실하게 하며, 교회 집회에도 열심히 참석을 한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내면을 보면 예수님이 안 보인다.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관심에 예수님이 없다. 아기 예수가 그저 어디엔가에 있을려니 생각하고 관심도 가지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휩쓸려서 아기 예수가 있는 곳에서 점점 반대되는 방향인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처럼, 교회에서 직분도 받고 열심히 봉사하고는 있지만 정작 마음의 주인으로 모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관심도 없고 오히려 더 멀리멀리 가 버리는 사람들도 많다.
여러분들의 매일 매일의 삶은 예수님과 항상 동행하는 삶을 살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어디엔가 계시겠지' 생각하며 일주일을 지내다가 주일에 교회로 와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찾아다니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살아가는 단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짓고 그 곳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그 분을 경배하며 그 분과 함께 살아가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주제와 관련 있는 말씀인 14절의 '금, 은으로 만든 그릇'을 주목해 보자. 에스라 1장에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져간 금, 은 그릇이 모두 오천 사백 개라 기록이 되어 있다. 이 그릇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그릇 안에 향도 채우고, 소제물의 가루도 채우며, 각종 제사를 드릴 때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들이었기에 성전이 재건 되면 이 그릇들이 있어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금, 은 그릇은 바벨론 신당에 있으면 안되고 반드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가야만 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위해 꼭 필요했던 이 그릇은 과연 무슨 영적인 의미가 있는가 알기 위해서는 신약성경 로마서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9장). 그릇의 용도는 무엇인가를 담는데에 있다. 그릇에 간장을 담으면 간장 그릇이 되는 것이요, 그릇에 고추장을 담으면 고추장 그릇이 된다. 그릇에 세상 재물과 영화를 담으면 세상 그릇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담으면 예수 그릇이 된다. 사람은 하나님을 담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그런데 이런 목적으로 창조된 사람이란 그릇에 다른 것을 아무리 집어 넣는다 해도 이 사람은 만족을 얻을 수 없다. 간장 그릇에는 간장이 들어와야 하고 밥 그릇에는 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된 사람 안에는 하나님이 들어 오셔야 만이 진짜 만족이 될 수가 있다.
이 말씀 외에도 성경은 여러 말씀에서 우리를 그릇으로 묘사하고 있다.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8.우리는 사방으로 죄어 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9.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장). 질그릇은 깨지기 쉬운 그릇이며 보잘 것 없지만 감사한 것은 이 그릇 안에 보배를 담고 있다. 그릇에 간장을 담으면 간장 그릇이 되듯, 우리는 참으로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을 우리는 담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 담는 그릇이 되었다.
나는 아침에 회사에 출근할 때 마다 사무실 바깥에 둔 나무 한 그루를 유심히 살피고 감상한 후에 사무실에 들어간다. 아침에 이 나무에 달린 잎사귀들을 볼 때 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나무 가지에 조그만 싹이 나오고 그 싹이 아주 부드럽고 푸르른 잎사귀로 자라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자세히 바라보면 바라볼 수록 참으로 신비롭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토록 신비로운 현상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어찌 하다 보니 기나긴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저절로 생겼다'. 참 기가 막힐 일이다. 내 손에 잡힌 이 컵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그냥 어찌하다 보니 저절로 생겼는가? 만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올 여름 더위를 너무 많이 먹은 사람일 것이다. 절대로, 수백만년을 기다린다 하여도 이 컵은 저절로 생길 수가 없다. 이 컵은 만든 사람이 있기에 컵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이 없는 컵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신비로운 이 나무도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데, 과학이 이토록 발달한 현재도 사람은 이 작은 잎사귀 하나도 만들 수가 없으니 사람이 만들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닌 그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이 식물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아름답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아멘하시는가? 이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운전하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람이 진화를 통해 저절로 생겼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생각을 해보아도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것은 사실일 수 밖에 없다'.
그 크신 하나님이, 온 우주를 만드시고, 이 자연을 창조하셨고,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 질그릇과 같이 보잘것 없는 우리 안에 계시다.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므로 8절 말씀처럼 '사방에서 죄어 들어도 움츠러들지 않고,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심지어 넘어지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는다'. 사방에서 여러가지 문제들이 여러분을 죄어 오나? 걱정하지 말라.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담고 있는 우리는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희망을 다시 찾는다. 우리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다. 지금은 비록 힘들지라도 결국에는 승리하게 될 것이다.
3일 전에 회사에 일이 생겨서 가슴이 답답하였는데 새벽 1시에 깨어서 1시간이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약간 억울하기도 하고 누군가가 미워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켰다. '그래 보아야 세상 일이고, 그래 보아야 세상 사람의 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믿거나 의지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 그들이 아무리 세력을 떨친다 하더라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니다'. 할렐루야! 그러고 난 후 잠을 편히 잘 수 있었다.
'20.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장).
이 말씀은 금 그릇과 은 그릇은 귀한 것이고 나무와 질그릇은 천하다는 뜻이 아니고 중심 내용은 21절에 있는데 자기를 깨끗하게 함으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는가? 아니면 쓰임 받지 못하게 되는가에 있다. ‘깨끗하게 하다’는 ‘철저히 깨끗하게 하다, 제거하다, 근절하다, 뽑아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이 말이 의미하는 뜻은 원래 더러운데 이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청소하고, 제거하고, 근절하고, 심지어는 뽑아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단지 겉에 드러난 더러운 것을 치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그 원인을 제거할 뿐 아니라 근절하고 심지어는 그 뿌리를 뽑아 내야 한다.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이 말씀은 영어 NIV성경에 의하면 'washing with water through the word' 즉, 말씀을 통한 물로 씻는다는 뜻이다. 씻는 물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말씀에서 나온다. 말씀을 통하여 말씀에 의해 우리는 씻김을 받을 수 있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기왕 사람으로 태어난 것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 담는 그릇으로 진정한 만족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 보자.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을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다. 또한 믿는 분들은 기왕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된 것 하나님의 집에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되어 보자. 귀히 쓰이는가 쓰이지 않는가는 하나님이 결정하시지 않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하나님은 책임이 없다. 누구든지 자기를 깨끗케 하면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될 것인데 오직 말씀을 통하여, 말씀에 의하여 나온 물만이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매일 아침마다 '주삶'책으로 부흥하고 있다. 특히 이번 달 히브리서 말씀은 참으로 풍성한 누림이 있다. 매일 이 말씀으로 깨끗하게 씻김 받아 진짜 살 소망 넘치고 하루가 참으로 기대가 되는, 또한 하나님의 집에서 귀하게 쓰임 받는 하나님 담는 귀한 그릇들이 되길 축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