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집권기에 특히 민란이 많이 발생하였고 그 중에서도 이러한 천민의 나도 굵직하게 나타납니다.
민란이 많이 발생하는 시기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하던 때인데 지배층이 무능하거나 부패했을 때 사회가 불안정할 때 민란은 폭발적으로 일어납니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후반은 문벌 귀족들 간의 분열, 무신 집권과 피비린내 나던 정권쟁탈기, 몽고의 침입 등으로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하던 시기였죠. 바로 이시기에 민란이 격심하게 일어납니다.
위에서는 지도자끼리 치고 받고, 밖에서는 외적이 쳐들어오니 나라 체계가 제대로 설 리가 없잖아요. 지방관이나 토착 세력은 눈치 볼 것 없이 백성을 더 못살게 굴었을 겁니다. 백성들에겐 왜 구족들은 저?품? 편하게 사는데 나는 이렇게 일만하고 다 바쳐야 하는가 하는 불만이 생기게 되었겠지요.
이때 바로 만적이 일어났던 겁니다. 최충헌의 노비였던 만적은 고려에서 아예 노비라는 계층 자체를 없애버리자고 나섰습니다. 만적은 6명의 노예와 함께 당시의 서울인 개경뒷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노예들을 모아놓고 .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우리 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의 선동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노예들은 만적의 연설에 찬성하였고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한충유의 사노 순정이 이 계획을 상전에게 밀고하여 거사 전에 발각되고 맙니다.
이리하여 만적을 비롯한 수백 명의 노예들이 체포되어 모두 강물에 던져져 죽음을 당하는 한편, 반란 음모를 밀고한 순정은 은 80냥을 상금으로 받고, 또 양민으로 되었으며, 한충유도 합문지후 라는 높은 관작을 받았다고 하네요.
이처럼 만적같은 주도자가 있었음에도 민란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불공평한 체제를 전부 바꾸기는 어려웠던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민란의 발발은 무신정권이 농민을 다독거리는 정책을 실시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정권은 농업을 권장하고 토지를 돌려주고 세금을 조정해서 농민의 삶을 안정시키려고 했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분계급이 엄격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계급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려고 했던 그들의 투쟁의욕은 신분해방운동의 효시로 높게 평가 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