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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1세의 생애에는 수많은 이들이 함께했고 그들은 다종다양한 이유로 함께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개인적인 친구라 할 수 있는 딱 하나 펠릭스 뿐이었다. 그의 친부는 로엔그람 왕조 최초의 반역자인 로이엔탈이고 친모는 문벌귀족 잔당인 엘프리데이며 둘의 관계는 로이엔탈쪽이 엘프리데를 겁간한 지간으로 일반적인 경우라면 황제의 친구가 될 수 없었겠지만 라인하르트의 유명으로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펠릭스는 라인하르트가 아들에게 친구 하나 만들어주려고 붙인 만큼 펠릭스는 그 역할에 충실하게 성장했다. 둘은 어릴적부터 친근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 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심지어는 힐데가르트는 알렉산더의 젖을 먹이고는 그대로 펠릭스에게도 젖을 먹이기도 하였는데 이는 골덴바움 왕조 시절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례없는 일로서 골덴바움 왕조에서도 황족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 젖을 먹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유모의 젖을 유모의 자식과 함께 먹는다는 것이지 감히 황후의 젖을 '천것'이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펠릭스의 양부인 미터마이어의 입지가 자연스레 상승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심지어 국무상서로까지 승진하였기에 미터마이어는 제국의 2인자가 된 것이나 다름없어져 그에게는 청탁을 하려는 자, 뇌물을 주려는 자, 잘 보이려는 자가 득실거렸고 처음 보는 이가 친척이랍시고 나온 일도 있었지만 미터마이어는 끝까지 정도를 지켰다.
그런 미터마이어인 만큼 자식교육도 철저해서 아들에게 늘 총애만 믿고 가벼이 행동해서는 안 됨과 네 의무는 황제폐하를 잘 모시는 것임을 잊지 말하는 것을 주지시키며 엄격하게 교육했고 펠릭스는 이 영향을 크게 받으며 자라났다. 그러나 엄격한 교육과 반대로 미터마이어는 소울메이트가 남긴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후일 미터마이어도 늦게나마 자식을 보았지만 미터마이어나 에반젤린이나 둘 다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펠릭스는 그야말로 알렉산더의 그림자이자 껌딱지처럼 행동해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알렉산더를 찾으려면 펠릭스를 찾으면 되고 펠릭스를 찾으려면 알렉산더를 찾으면 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으며 교사들도 그 둘을 세트메뉴 취급하였다.
성격은 펠릭스에 비하면 진지하고 엄격하지만 한편으로는 엉뚱한 구석도 있어서 중학교 시절에는 친아버지는 '금은요동' 양아버지는 '질풍 볼프' 라는 이명을 가진 것을 두고 자신도 이에 꿇리지 않는 멋진 이명을 만들겠다며 고민 끝에 '샤텐 데 카이저'(황제의 그림자) 같은 걸로 정했다가 미터마이어의 황당함을 사기도 하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내에 알렉산더 1세를 추종하는 비밀 팬클럽이 있었는데 앞에서는 그런 팬클럽을 싫어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팬클럽 회장이라든가 하는 식의 여러가지 깨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도 변함이 없는건 알렉산더에 대한 우정과 충성심. 대학교 입학 때 선배들의 신고식에서는 선배들이 알렉산더 1세에게 음주 요구를 받았는데 상대가 황제폐하였기에 차마 강요하지는 못했지만 해주기를 바라는 분위기를 읽은(그리고 안 해주면 은따가 벌어질 수도 있으므로) 펠릭스는 '황졔폐하는 몸을 함부로 해선 안된다.' 라는 논지로 자기가 자기 몫에 알렉산더 1세 몫까지 다 마셔버리고 인사불성이 되어 실려가서 난리가 나버린 일이 있을 정도였다.
이 둘은 라인하르트-키르히아이스처럼 위험한 순간을 많이 넘기지는 않았지만 함께한 시간은 그 이상이었고 나름대로는 여러 일에 함께 휘말리기도 한 소울메이트였다. 그러다 보니 서로 나이 먹고도 알몸을 드러내보여도 전혀 개의치 않아하며 가족간의 사이보다 서로간의 사이가 더 좋았으며 각자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는 뢰벤브룬이 아니라면 한 침상을 썼고 도의상으로는 군신관계이며 서로 혈연관계가 전혀 없으며 서로 다른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형제처럼 친하고 한 몸과 같이 행동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사이였다.
알렉산더 1세도 그와의 우정이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데다 성격도 잘 맞았고 친하고 충성심 강하고 여튼 자기랑 잘 맞아서 엄청나게 후한 대우를 해줘서 그의 생전에 수많은 관료들이 알렉산더 1세와 함께 했음에도 제국의 2인자로 여겨지는 인물은 항상 펠릭스였다. 그의 직위는 황제 수석비서관 등 내각과는 관련없는 자리에 불과했음에도 알렉산더 1세의 지극한 총애로 사실상의 비선실세로 취급받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 중에는 골덴바움 왕조 시절의 에크하르트 백작의 사례를 떠올리며 불안해하는 이도 있었지만 알렉산더 1세는 오토프리트 1세가 아니었고 펠릭스는 에크하르트가 아니었다. 알렉산더 1세는 펠릭스 스스로가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총애했지만 선을 넘지는 않았고 펠릭스는 그 당시 수많은 관료들을 제치고 알렉산더 1세 최고의 명신으로 꼽힐만큼 유능하고 공정하였는데 심지어는 조율과 조정 능력이 좋아서 어전회의에도 참석하였는데 본디라면 있기 힘들 일이지만 각료들은 참석하면 어전회의의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그의 존재를 인정하여 그냥 아무렇지도않게 여겼다.
펠릭스의 임무는 황제의 비서관 역할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사생활에도 관여하여 가령 알렉산더 1세의 가정관계가 냉랭해지면 중간에서 중재해주는 역할, 황제의 취향에 맞는 시종, 시녀 후보 들어오면 면접보고 채용하기 등의 온갖 일도 도맡아 했으며 황후조차 자신보다도 더 황제와 오래 함께한 그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어(애초에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지만) 상호간에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펠릭스의 알렉산더 1세에 대한 보좌는 '공적으로는 엄격하게 사적으로는 친근하게'로 이루어졌다. 공적인 분야에서 펠릭스는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일은 칼같이 반대하고 옳다고 여겨지는 일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때론 옳고그름을 판단하는데 오류가 생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의 판단이 옳아 대내외적으로 충언을 아끼지 않는 신하로 여겨졌으며 그와 관련되어 한 일화가 있다.
알렉산더 1세가 젊은 시절에 산책하던 도중 어느 젊은 여인을 보고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 여인은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금발에 머리가 엉덩이에 닿을랑 말랑 할 정도로 길었으며 관리를 잘 했는지 윤기있고 생기가 있었으며 심지어 외모마저도 본인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그야말로 이상형 그 자체였다.
알렉산더 1세는 이 여인에게 반하여 그녀를 궁에 들이고 싶었고 신료들도 딱히 문제삼지 않았다. 출신도 됨됨이도 흠이 없었고 알렉산더 1세가 이미 결혼을 했지만 전대인 골덴바움 왕조 시절에 정식 혼인을 거치지 않은 황제의 여인, 즉 총희를 대우하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었고 단지 라인하르트 1세는 총희가 없었을 뿐이라 거부감도 적었고 심지어 로엔그람 왕조가 열린지 수십년이나 지났음에도 그 구성원이 너무나 적어 불안감을 가진 이들도 있었기에 모두들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하나 펠릭스만은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펠릭스는 안네로제를 취한 프리드리히 4세의 사례를 예시로 들어가며 그 여인이 안네로제와 같이 거부할 수도 있고 의사를 타진하기만 해도 그쪽 일가에게는 그 자체만으로도 부담이 되며 또한 그 여인이 거부를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황제가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이유로 그녀를 꺼릴 수도 있다며 끝까지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만일에 알렉산더 1세의 성격이 아버지와 같았다면 펠릭스는 키르히아이스와 비슷한 전철을 밟았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인정할건 쉽게 인정하는 알렉산더는 뒤끝을 부리지는 않았고 펠릭스는 펠릭스대로 대안점을 마련해주었는데 뒷조사로 드러난 그녀의 출신은 골덴바움 왕조 시절에 시녀나 시종을 많이 배출한 하급귀족 가문이고 그녀 또한 그런 류의 일자리를 구하려고 한다는 것을 귀띰해주었고 결과적으로 알렉산더 1세는 그 여인의 몸을 취하는 것은 포기해야 했지만 곁에두고 아름다운 금발과 외모를 감상할 수는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엄격한 공적 관리와는 별개로 사적으로는 노인이 되고도 사석에서는 농담도 장난도 주고받는 사이였고 알렉산더 1세의 자식들에게 펠릭스는 아버지의 깐깐한 부하라기보다는 그냥 친근한 동네삼촌에 가까웠을 정도로 사이도 좋았고 알렉산더 1세의 자식들과 펠릭스의 자식들은 서로 그냥 이웃사촌처럼 지냈고 공석에서는 엄격한 그도 사석에서는 느슨해져서 황제의 자식들을 기쁘게 해주겠다고 그들이 부탁을 하면 고위직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 앞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기까지 하였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어찌나 깊었던지 당시에는 그 수준이 정상의 수준이 아닐거라고 여긴 자들에 의해 황제가 양성애자이고 그렇기에 저렇게 '애인'을 아끼는 거라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이는 단지 황제가 추진한 각종 사회적 약자 구제와 권리증진 정책과 사업의 대상에 500년 골덴바움 왕조의 통치로 구 제국령에서는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성소수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원인이 황제와 펠릭스의 관계가 동성 애인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말에서 나온 헛소문에 불과하며 그 시대에나 그 이후에나 알렉산더 1세든 펠릭스든 양성애자라는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비선실세에 가까우면서도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지 않고 충직하게 보좌하면서도 친구로서의 도리도 완벽한, 이상적인 군신관계였다. 펠릭스 또한 친아버지의 일 때문에 더욱더 충성을 다하였고 때문에 그의 앞에서 노이에란트 전역을 꺼내는건 금기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형제뻘로 지낸 하인리히 람베르츠 또한 덩달아 덕을 본 면이 있었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친부인 로이엔탈에게서 양부인 미터마이어에게로 자신을 전달해준 이가 그였고 람베르츠는 부모가 모두 사망해서 마땅한 후견인도 없었는데 미터마이어는 펠릭스를 입양하는 김에 그 또한 사실상의 양자처럼 받아들였고 람베르츠는 펠릭스를 동생처럼 돌보았다.
둘은 나이차는 14살이나 났지만 둘은 친부모가 없고 미터마이어 부부에게만 의지해서 자라나는 상황 속에서 서로 친형제처럼 여겼고 동시에 이렇게 펠릭스와 가까워지다보니 알렉산더 1세와의 연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미터마이어 가에 의지하게 된 후 사관학교에 들어갔고 사관학교를 무난하게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에는 오랫동안 별 주목을 받지 못하는 평범한 군인으로서 그래도 군재는 중간에서 살짝 높은 수준으로 나쁘지는 않았으며 어떤 자리에 있든 군재 수준으로는 잘 해낸데다 대인관계도 원만했기에 임관 22년만인 우주력 828년, 42세의 나이에 대령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해부터 그의 군인 생황에 대박이 터져버린다. 이 해에 알렉산더 1세의 친정이 시작되고 그간 람베르츠를 지켜보던 알렉산더 1세가 직접 그의 승진과 직위에 개입한 것이었다.
비록 그의 군재는 평균보다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는 평을 받지만 평화의 시대에는 군재의 중요성은 전란의 시대보다 떨어졌고 알렉산더 1세는 그를 총애하고 그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기에 6년 뒤인 우주력 834년, 그를 소장으로 진급시킴과 동시에 그에게 제국 근위사단 사단장을 맡겼는데 이후 그가 66세의 나이로 퇴역할 때까지 18년간 그 자리를 맡겼다.
이는 로엔그람 왕조는 물론 은하제국 역사상 최장기 재임기록이었고 또한 이를 명분으로 알렉산더 1세는 그의 나이 61세에 예외적으로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유일한 중장 근위대 사단장이란 기록도 남겼으며 이 때문에 당시에 '근위사단 중장', '중장 사단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런 식으로 알렉산더 1세가 너무 무리하지는 않는 선에서 그를 총애하다보니 주변에서는 그를 부러워했으나 정작 본인은 자신이 군재가 중장은 커녕 근위대 사단장을 맡아도 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의심하였고 청렴하고 강직한 미터마이어의 영향을 받아 늘상 조심하게 행동하였으며 자신의 실력보다 약간 상회하는 직급과 계급이 전적으로 실력이 아닌 의붓형제 뻘인 펠릭스와 그와 형제처럼 친했던 황제 알렉산더 1세 덕임을 알았기에 그 둘에게 더욱 고마워하며 그 둘의 기대를 벗어나지 않고자 노력하였다.
덕분에 그의 재임기에는 그의 처신과 단속에 힘입어 후세에 칭찬을 받을 정도로 근위대 사단장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별다른 일 없이 조용히 지나갔고 18년간의 기간동안 람베르츠는 자기 일에만 충실히 일하다가 66세의 나이에 퇴역, 그로부터 19년 뒤인 우주력 871년에 85세로 사망하였고 사후 알렉산더 1세의 총애로 1계급 승진하여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그는 가정사에는 다소의 굴곡이 있어 세 번 결혼하여 아들은 셋, 딸은 하나를 얻었으며 그들로부터 본 손자가 둘 손녀가 둘이었다.
다만 알렉산더 1세와 람베르츠가 장수한 것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펠릭스의 수명은 알렉산더 1세나 람베르츠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우주력 868년, 그는 알렉산더 1세보다도 20년 일찍 6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사인은 뺑소니로 제국 고위직 인사가 아주 어처구니없이 사망한 것으로 역사에 그 이름이 남은 사례가 되고 말았다.
그는 페잔 최고 갑부의 차량에 치어 죽었는데 그는 거만한 성격으로 평소에는 엄청나게 검소하여 다소 남루한 차림을 하고 다니는 펠릭스를 알아보지 못하고 단순히 비슷하게 생긴 인물이라 치부하고 '어차피 안 걸릴테고 걸리더라도 적당히 벌금을 물어주면 그만이다' 라는 생각으로 뺑소니를 친 것인데 이 소식이 알렉산더 1세의 귀에 접수되자 알렉산더 1세는 길길이 날뛰었다.
결국 그 개념없는 갑부와 그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었던 불쌍한 동승자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특히 갑부는 그같은 천박한 인성까지 함께 드러나 욕을 갑절로 먹은 채 결국 징역 21년과 벌금 2500만 제국마르크라는 중형을 선고받았고 동승자들도 크고작은 벌을 받았으며 심지어 주위에서 이를 목격한 사람들도 제보자와 펠릭스를 도와주려던 사람 말고는 부상당한 사람을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사라는 명목으로 구류하였다.
이는 법적으로는 부당한 면이 있는 판결이었지만 그것도 알렉산더 1세가 분노하여 갑부와 동승자들은 어떻게든 법에 적용하게 하여 무기징역과 재산몰수를 하고 목격자들은 두 사람 빼고 모두 가볍게라도 벌을 주려던걸 주위에서 그런 법이 없다며 뜯어말려서 수위를 대폭 낮춘게 이정도였고 나중에는 알렉산더 1세도 머리가 식으면서 구류한 목격자들과 동승자들은 죄가 없다며 풀어주었고 갑부의 벌금을 위로금 명목으로 나눠주었지만 갑부에 대한 판결은 변하지 않았다.
펠릭스는 사후 로엔그람 왕조의 명신들과 명장들이 묻힌 국립묘원에 묻혔으며 알렉산더 1세는 죽을 때까지 매해 3~6번 들렀고 평생동안 그를 그리워하였다. 또한 그의 사후 제국 정부의 분위기는 이전에 비해 많이 가라앉아서 많은 정부의 각료들도 그의 빈자리를 느끼며 그리워했다. 평생에 딱 한번 결혼하여 해로하였으며 자식은 2남이 있었고 손자가 둘 손녀가 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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