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피리
김 아가다
날씨가 후덥지근해서 바람이라도 쏘일 겸 화산 당지못에 왔다. 산 그림자가 골바람을 타고 파문을 일으킨다. 인디언 체로키 부족처럼 나에게도 비밀 장소가 있다. 낚시터는 나만의 숨겨 둔 요새이다. 낚싯대를 드리우면 세상사 다 잊어버리고 적요함에 젖어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낚시터 옆 숲속에서 온갖 새 소리가 들린다. 자연의 음향을 듣고 있으면 이곳이 천상인가 싶다. 은빛 물결 속으로 맑고 청아한 뻐꾸기 소리가 메아리로 흩어진다. 이쪽에서 뻐꾹 저 건너에서 뻐뻐꾹. 암수의 화답이리라. 물이 얕은 상류 쪽에는 황새 두어 마리가 유유히 먹이 사냥을 하고 있다. 낚시를 즐기는 나도 풍경의 하나가 되어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복잡한 생각을 지우기도 한다.
단전에서 끌어 올린 숨을 시원하게 뱉어내고 돌아보니 한쪽에 사람이 있다. 왕버들 그늘에 낚싯대를 가지런히 펼쳐놓고 한 남자가 삼매경에 빠져 있다. 찌를 향한 부동자세가 거룩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하다. 가뭄으로 인해 저수지에 물이 줄어서 물 반, 고기 반이라는데 남자는 대어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당지에서 나는 작은 피리를 잡는다. 사람들은 피리를 반도나 그물로 잡아야지 낚시로 언제 잡느냐고 한다. 하지만 낚시로 잡는 재미가 더 좋다. 동심원이 만들어지는 곳을 향하여 던지면 물고기가 뱉어내는 공기 방울이 보글거리며 백발백중이다. 깻묵을 망에 넣어 낚싯줄을 던지면 멋진 포물선을 그린다. 마치 수영선수가 높은 곳에서 다이빙하듯 ‘풍덩’ 하면서 입수를 한다. 한 번에 두, 세 마리씩 걸려오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재수 좋으면 다섯 마리씩 버둥거리며 바늘을 물고 나온다. 잠시 쉴 틈도 없다. 입질이 왔을 때의 손끝에 전해지는 짜릿한 그 감각을 어찌 말로 표현하랴. 혼자 임에도 불구하고 물고기가 걸리면 앗싸! 하고 소리를 지른다. 이 즐거운 비명은 쌓인 감정의 찌꺼기들이 확 달아나는 나만의 힐링 방법이다.
나의 오두방정에 남자가 깊은 의식에서 깨어났는지 헛기침을 하면서 다가온다. 비밀 요새가 노출되어 불안하고 기분이 언짢은데, 혼자 왔느냐고 묻더니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여자 혼자 낚시라? 고기는 잡아서 뭐하냐고 묻는다. 도리뱅뱅도 만들고 피리 튀김도 한다고 답한다. 어설픈 낚시채비를 보더니 떡밥 넣는 통을 하나 가져다준다. 플라스틱으로 된 작은 시럽 병이다. 본인이 개발했다면서 떡밥 만드는 방법까지 자상하게 알려준다.
가까이서 보니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다. 교육공무원으로 퇴직한 어르신은 세월을 낚는단다. 이런 일 저런 일 겪은 온갖 풍상을 물속에서 건지고 물 위에 비춰 보기도 하면서 고기를 잡겠다는 욕심은 버렸다고 한다. 주나라의 재상 강태공처럼 미끼 없는 빈 낚싯대를 드리운 채 하늘이 불러줄 때를 기다린다는 그는 인생을 달관한 도인 같다. 그 역시 머리가 하얗게 센 여자가 낚시하는 모양이 낯선지, 고기 잡는 법까지 일러준다. 한적한 연못에서 낚시꾼끼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나이 먹어서 편하고 좋은 점은 사람 가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말을 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산 그림자가 거뭇하게 내려올 즈음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어르신이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한다. 잠시 망설이다가 무안하지 않게 전화번호를 가르쳐드린다. 이름까지 물어보니 난감하다.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이 “금호피리.” 금호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확인이라도 하듯 내 전화기의 벨이 울린다.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 둘이서 당지못이 흔들리도록 웃는다. 졸지에 낚시친구가 생긴 셈이다.
전화하면 꼭 낚시터로 오라고 어르신이 당부한다. 고기를 잡아준단다. 딱히 손사래 칠 일도 없고 다음에 보자는 말을 인사로 하지만, 낚시터 친구는 한 번으로 족하다. 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나는 자연 속에서 묵상 수련 중이다. 붕어나 잉어 같은 큰 고기에 욕심 없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지혜를 자연에서 배운다. 잡아 올린 피리가 망태기 안에서 물장구를 친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웃음이 터진다. 카바레로 가던 꽃뱀이 요즈음은 골프장으로 가서 풀뱀이 되었다고 한다. 꽃뱀의 대상은 번쩍거리는 비싼 손목시계와 두둑한 돈지갑을 가진 사람이고, 풀뱀은 고급 골프채와 외제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먹잇감이라고 한다. 그러면 낚시꾼을 노리는 물뱀은 고가의 낚싯대를 보고 탐을 내려나? 그렇다면 그나 나나 물뱀이기는 틀린 셈이다. 나의 낚싯대는 버려도 주워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고, 그에게서 얻은 미끼통은 시럽 병이다. 원래부터 물뱀은 독이 없다.
첫댓글 정말 물뱀은 독이 없습니까?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상처는 날 수 있습니다.
낚시터에서의 정경이 떠오릅니다.
고기도 잡고, 자연도 즐기고, 미끼통도 얻고
재미있는 하루였겠습니다.
넵!
조심하겠습니다.ㅎ
금호피리님, 그날의 이야기가 드디어 한 편의 작품으로 탄생하였네요. '물뱀은 독이 없다' 마지막 문장이 압권입니다.
백발의 물뱀이라 그런가요~ㅎㅎ
ㅎㅎ 감사 합니다.
노년이 되면 독이 없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 같습니다. 낚시하는 여자라. 재미있네요. 독없는 물뱀이 오히려 낚시에 걸려들 지도 모르겠습니다.
ㅎ말로 글 한편 쓰고
글로 수필 한 편 완성 했습니다.
수필세계 2017년 가을호에도 실렸네요. 카페 소식란에 실었습니다. 아가다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이가다님 취미생활이 작품이 되고
삶이 예술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