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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에 대한 자료들 스크랩 [江湖동양학]-乙亥명당, 朴도사를 낳다 ~朴도사의 내공 증진법
천현갑 추천 0 조회 249 11.07.22 21: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江湖 동양학

 

차 례

乙亥명당, 朴도사를 낳다
"이놈! 갈치장수가 아니라 검사장이지":朴도사 명성을 얻다
朴도사 "벌 한마리 날린 뜻 알겠느냐"
가뭄 들자 장관이 朴도사에 비소식 물어
朴도사, '구령呪' 암송하며 신통력 키워
朴도사의 내공 증진법

 

 

乙亥명당, 朴도사를 낳다

[중앙일보 2003-11-20 16:36]

[중앙일보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박도사(박재현)는 어떻게 해서 번갯불을 얻을 수 있었는가?

도사가 되는 사람들의 출생 배경과 학습과정은 어떠한가?

이 '과정(process)'을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강호동양학의 주된 관심사에 해당한다.

'도사'직업을 지망하는 후학들에게 유용한 판례집이자 학습자료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박도사의 탄생부터 보자. 모든 기인(奇人).달사(達士)들이 그렇듯이 제산(霽山.박재현의 호)의 출생에 관해서도 전설이 어려 있다. 제산이 태어난 곳은 경남 함양이다.

함양은 영남에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좌안동(左安東) 우함양(右咸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낙동강을 기준으로 볼 때 경상좌도 쪽에서는 안동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고, 경상우도에서는 함양이라는 말이다.

조선시대 함양에서 배출된 팔선생(八先生)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지금도 그 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는 일두(一) 정여창(鄭汝昌.1450~1504)을 비롯해 양구졸(梁九拙).노옥계(盧玉溪).강개암(姜介庵).표남계(表南溪) 등이 그 팔선생이다.

궁벽진 산골동네인 함양에서 왜 인물이 많이 나올 수 있었단 말인가.

강호파의 입장에서 그 원인을 분석하면 한마디로 산수가 좋기 때문이다.

함양을 둘러싼 산세를 보면 영기(靈氣)가 어려 있는 명산이 많다.

그 명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들이 함양을 향해 발사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훌륭한 문필봉들이 포진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함양 사람들은 함양의 개평(介坪) 출신인 정일두나 노옥계 같은 인물들은 모두 문필봉 정기를 받은 학자라고 이야기한다.

남한 일대에서 가장 빼어난 문필봉으로 평가받는 산청의 필봉산(筆峰山)이 이곳에서 잘 보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함양이 전국 도사들의 집결지였다는 점이다.

함양 주변으로는 지리산을 비롯해 백운산.덕유산.황석산.가야산.황매산.광양 백운산이 있다.

각지에서 모여든 도사들은 일단 함양에서 짐을 풀고 며칠씩 머무르면서 각종 정보를 수집하였다.

어떤 산의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 어떤 암자터가 영기가 있는지, 자신이 어떤 산으로 가야 도통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모여든 팔도의 도사들과 정보교환을 하던 장소가 바로 함양이었다. 함양은 전국의 명산대천을 떠돌던 강호파들의 터미널이었다고나 할까.

조선시대 노마드(nomad.유목민)들의 아지트였던 셈이다.

요즘도 함양에 앉아 있으면 지리산 일대에서 누가 산삼을 캤는지, 누가 한 소식을 했는지, 어떤 괴각(怪覺.괴팍하게 깨친 사람)이 숨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제산이 태어난 고향은 함양군 서상면 극락산 자락이다. 극락산은 덕유산에서 내려온 맥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전라도 장수에서 경상도 함양과 안의 쪽으로 오고가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수많은 영.호남의 여행객이 고개를 넘어 오고갔다.

 

제산의 집안은 비교적 여유가 있어서 오가는 과객들에게 후한 대접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과객들은 다양한 특기를 가진 사람이 많았고, 그 중엔 명리와 풍수의 고수들도 섞여 있었다.

제산의 선대에서는 명당을 신봉하던 풍수매니어였고, 집안을 일으킬 묏자리 하나를 구하기 위하여 이들 술사에게 극진한 환대를 하곤 하였다.

 

이렇게 투자해서 구한 명당이 극락산 자락의 을해(乙亥) 명당이었다.

을해명당이란 어떻게 생긴 명당인가. 산의 맥이 '乙'자 형태로 내려오다가 끄트머리 부분에 조그마한 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십이지에서 해(亥)는 물을 상징한다.

저수지를 해(亥)로 본 것이다.

이처럼 십간 십이지는 글자와 사람, 그리고 사물의 형상이 서로 구분없이 호환(互換)된다.

제산 집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백년 전쯤 제산의 증조부 묘를 '乙'자의 머리 부분에 써놓고 인물이 태어나기를 고대하였다.

그 인물은 육십 갑자 중에서 을해년에 태어난다고 믿었다. 을해명당이니까 을해년이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인류학자 모리스 고들리에(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장)는 도올 김용옥과의 인터뷰에서 "아이는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필자는 이 대목을 매우 인상깊게 읽었다. 즉 난자와 정자라는 생물학적인 재료의 단순결합에서 생명이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합을 넘어서는 조상(ancestor)이나 신(God) 또는 어떤 영(spirit)이라는 다른 차원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탄생은 성욕의 결과로 볼 것이 아니라 우주적 총체(cosmic totality)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풍수에서 말하는 '인걸은 지령이다'는 명제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인물의 탄생은 지령(地靈)이라고 하는 다른 차원의 개입이 작용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오래된 믿음이었다.

필자가 지난 15년간의 현장답사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걸출한 인물들은 거의 지령의 개입이 있었다. 인물은 지령이 있는 곳에서 잉태되고 출산된다.

제산의 조부는 을해년이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기다리던 을해년이란 바로 1935년이었다.

1935년 을해년을 맞이해 극락산 밑의 박씨 집안에서는 인물이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설렘으로 출렁거렸다.

을해년에 첫째 손자는 5월달에 태어났다.

첫째 손자는 장남에게서 나온 아들이 아니라 삼남에게서 나왔다. 집안에서는 셋째 아들 손자가 인물인가 하고 기대를 하였다.

아들을 낳았다고 새끼줄을 왼쪽으로 꼬아서 문 앞에 금줄을 걸어 놓았는데, 아침에 구렁이가 그 새끼줄을 타고 가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구렁이가 금줄을 타고 간다면 반가운 징조가 아니었다. 이 조짐으로 보아 기대하던 인물이 아니라고 판정되었다.

바로 이어서 손자가 또 하나 태어났다. 둘째 아들이 낳은 자식이었다.

둘째 아들은 처가살이를 해서 극락산 자락인 서상면에 살지 않고, 처가 동네인 서하에서 출생하였다.

외갓집인 서하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이 손자는 관심권에서 밀려났다.

을해년이 다 지나갈 무렵인 동짓달 22일에 장남에게서 손자가 하나 태어났다.

그 손자가 바로 제산이다.

제산을 낳을 무렵 제산의 어머니는 이미 아들딸을 다섯이나 둔 상태였다.

큰아들 하나에다가 그 밑으로 줄줄이 딸을 넷이나 낳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또 딸을 낳을 줄 알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제산의 어머니는 당시 40대 중반이 넘었는데도 임신이 되었으니 주변사람들 보기에 민망하였다.

낙태시키기 위해 간장도 바가지로 먹고, 쓴 약초도 먹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도 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제산은 을해년이 다 지나가던 동짓달에 태어났다.

낳아놓고 보니까 얼굴은 시커멓고 볼품없이 조그마한데 눈만 반짝거렸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조부는 과연 이 아이가 을해명당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난 아이란 말인가 하고 탄식을 하였다.

 

하지만 아이는 자라면서 비범한 총기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한번 글자를 보면 단박에 외워버리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상에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함양군 전체에 퍼져나갔다.

박도사는 타고난 신동이었던 것이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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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 갈치장수가 아니라 검사장이지":朴도사 명성을 얻다


게재일 : 2003년 12월 05일 기고자 : 원광대 초빙교수 조용헌


함양 백운산 상연대(上蓮臺), 백운산 정상 근처의 바위굴, 영암사(靈岩寺), 휴천면 월평리 놋전골의 토굴, 남덕유산 영각사(靈覺寺),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 칠선계곡 토굴.

박도사가 지리산 시절에 공부하던 장소들이다. 그는 유(儒)·불(佛)·선(仙)을 모두 공부했다.

한국에서 수도하려면 삼교를 회통해야 한다.

이는 신라의 최치원 이래로 이어지는 한국의 지적 전통이다.

유교에서는 예의범절을, 불교에서는 심법(心法)을, 선교에서는 양생술을 배워야 한다.

하나만 공부해 가지고는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박도사는 남원 아영면의 가말부락에 살던 한학의 대가 정숙현 선생에게서 유학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머리가 좋아 한달에 한권씩 독파했다고 한다.

천자문에서 시작해 사자소학·논어·맹자·대학·중용·주역을 두루 섭렵했다.

정선생으로부터 배운 한학 실력은 그의 평생 밑천이 됐다.

도사는 자기의 심중을 사언절구나 칠언절구로 표현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 품위가 있다.

 

불교는 어떤가. 그는 여러 군데 사찰에 장기간 머무르면서 신세를 졌다.

춥고 배고프고 노잣돈도 떨어진 그가 마음 편하게 공부하면서 쉴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가 불교 사찰이었다.

돈 없는 사람에게도 밥을 주는 데가 사찰이다.

어찌됐거나 한국의 인심이 아직 남아있는 곳은 절이라고 생각한다.

후일 제산이 유명해졌을 때 불교 스님들을 만나기만 하면 옛날 신세를 갚는다는 생각에서 스님들에게 여비 봉투를 찔러주곤 했다.

제산은 1960년대 중반에 해인사에서 장기간 식객 노릇을 하고 있었다.

불교 사찰 가운데 기강이 가장 엄하고 선풍(禪風)이 살아 숨쉬는 곳이 해인사다.

그 해인사에서 머리 기른 술사를 받아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해인사 장경각 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늦가을 새벽에 낙엽을 쓸다 보니 처녀 시체가 발견됐던 것이다. 범인이 누구인가.

합천 경찰서에서는 매일해인사 승려들을 불러다가 알리바이를 조사했다. 하지만 범인은 나오지 않았다.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승려들이 매일 불려다닐 수밖에 없었고, 해인사 선방은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 위기의 순간에 뒷방에서 몇달 동안 밥이나 축내고 있던 박도사가 등장했다.

"범인은 내가 찾아낼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스님들에게 먹과 붓을 갖다 달라고 요구했다.

 

여러 스님이 보는 앞에서 일필휘지로 갈겨 쓴 글씨가 '일주탱천 목자지행(一柱撑天 木子之行)'이라는 문구였다.

해석하면 '하나의 기둥으로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데, 목자의 행동이다'라는 뜻이다.

기둥 하나로 하늘을 지탱한다는 말은 목수라는 직업을 상징한다.

목수는 기둥으로 천장을 받치게 하는 직업이니까.

'목자지행'은 이(李)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의 행동이라는 말이다. 즉 목수 가운데 이씨가 범인이라는 메시지였다.

 

생각해 보니 팔만대장경을 보관해 놓은 장경각의 보수공사를 하면서 목수들 몇명이 두어달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목수들 가운데 이씨를 추적해 보았다.

이씨 성을 가진 목수가 서울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형사대를 급파해 드디어 범인을 체포했다.

젊은 목수였는데 사귀던 애인이 공사현장에 찾아와 그만 헤어지자고 하니까 홧김에 망치로 살해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해결함으로 해서 박도사의 명성은 경남 합천 일대에 퍼졌다.

천출귀재(天出鬼才·하늘이 내린 귀신 같은 인물)가 나타났다! 제산을 만나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해인사로 몰려왔음은 물론이다.

그러던 어느날 50대 중반의 남자가 제산을 만나러 왔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자신을 부산 자갈치 시장의 갈치장수라고 소개한 남루한 행색의 그 남자는 제산에게 다른 사람의 사주팔자를 물었다.

자신은 권 아무개라는 사람의 심부름을 왔으니 그 권 아무개의 사주를 봐달라고 하면서, 생년월일시를 적은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종이쪽지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던 제산은 갑자기 벽력 같은 소리를 질렀다.

"보아하니 여기 써 있는 권 아무개가 바로 너로구나! 네가 권 아무개지.

너는 대구 검찰청에 있는 검사장이지 나를 떠보려고 변장하고 왔구나?

네놈이 검정 고무신을 신고 와서 갈치장사를 한다고 하면 내가 속을 줄 알았나.

네 이놈!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나를 시험하는 거냐!" 하면서 내리 호통을 쳤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 권 아무개 검사장은 망신만 당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산은 성질이 불같아서 자신의 비위에 안 맞으면 직설적인 육두문자로 내갈기는 스타일이었다.

그렇지만 뒤끝은 없었다. 권 아무개 검사장은 제산의 신통력을 혹독하게 체험하고 나서 평소 안면이 있던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해인사에 갔다 온 이야기를 사석에서 해주었다.

해인사에 가니까 그런 인물이 있더라고. 이병철 회장은 범인을 수사하는 검사장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더욱 신뢰가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계기가 돼서 제산은 한국 최고의 부자인 이병철과 인연을 맺게 됐던 것이다.

이병철과 제산. 당대 그 분야 최고수들의 만남이었다.

이판(理判) 고수와 사판(事判) 고수의 만남이었다고나 할까.

필자가 제산을 처음 만난 시기는 1995년이다. 함양 서상의 덕운정사에서 첫 대면을 했다.

제산에 대한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대면하고 보니 위풍이 있는 풍채도 아니었고,

사람을 압도하는 압인지상(壓人之像)의 기운이 보이지도 않았다. 첫인상은 솔직히 약간 실망스러웠다.

 

첫 대면에서 나는 아주 평범하면서 극히 세속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주팔자를 한번 보러 왔습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는지를 좀 보아주십시오."

나의 사주를 훑어보던 제산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물음을 나에게 홱 던졌다.

"벌 한 마리가 날아들어와 요란스럽게 날아다니다가 문창에 탁탁 부딪친다.

이 벌이 어떻게 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아주 평범한 물음을 던졌는데,

제산은 격외(格外)의 선문답으로 되돌린 것이다.

 

'언제쯤 대운이 올 것이다'는 대답을 예상하고 있던 필자에게 제산의 '벌 한 마리' 초식은 전혀 예상 밖의 급습이었다.

나도 난다 긴다 하는 강호의 고수들과 일합씩을 겨뤄본 경험이 있어서 어지간한 초식에는 방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데, 예상 외의 허를 찔린 것이다.

그때 내가 느낀 소감은 '제산이라는 사람이 사주팔자나 보아주는 단순한 술객이 아니구나.

조용헌이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구나'였다.

순간적으로 나온 나의 답변은 "창문에 부딪쳐 죽어버리죠!"였다.

그러자 제산은 웃으면서 '일급은 아니지만 이급은 되는구먼'이라고 내뱉었다.

"이급이라도 돼서 다행입니다"하고 다시 맞받았다.

하지만 결과는 나의 TKO패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KO패 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어찌됐든 최악은 면했으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제산은 사찰의 승려들과 교류하면서 선가(禪家)의 화두에도 관심이 많았다.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이 화두를 모아놓은 책인 ?선문염송(禪門拈頌)?과 중국의 원오극근(圓悟克勤)선사가 저술한 ?벽암록(碧巖錄)?을 즐겨 보았던 것이다.

조용헌이 같은 놈은 화두로 조져야 약효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셈이다.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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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도사 "벌 한마리 날린 뜻 알겠느냐"


게재일 : 2003년 12월 12일
기고자 : 원광대 초빙교수 조용헌


박도사가 갑자기 나에게 날려보낸 벌 한 마리.

나는 붕붕거리면서 날아다니는 그 벌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땀을 뺐다.

'벌 한 마리' 화두의 유래는 어떻게 되는가.

벌 이야기는 선가(禪家)에서 회자되는 선문답이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공부하였으며, 이판 사판 양쪽에 모두 뛰어났던 경산(京山·1917∼1979)의 『삼처전심(三處傳心)』에 그 설명이 나온다.

중국 복주 교령사에 신찬선사(神贊禪師)가 있었다. 어려서 은사를 따라 경전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경전공부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자, 깊은 산으로 들어가 잠적하였다.

이윽고 10년 만에 헌 누더기 옷을 걸치고 옛날 은사를 찾았을 때 은사는 여전히 경전만 읽고 있었다.

어느 봄날 신찬선사는 은사 스님을 모시고 방에서 문을 열어 놓은 채 앉아 있었다.

그때 벌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 요란스럽게 날아다니다가 문창에 탁탁 부딪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신찬선사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空門不肯出     열어 놓은 창으로는 나가지 않고
投窓也大癡     창에 머리를 부딪치니 정말 어리석구나
百年古鑿紙     평생 동안 고지(古紙)를 뚫은들
何時出頭哉     어느 때나 밖으로 나갈 수 있으리오!


이 시는 벌의 우둔함을 노래한 것이지만,

사실은 '책만 본다고 도를 깨우치겠느냐'고 옛 스승의 우둔함을 간접적으로 지적하는 게송이었다. 

제산이 1천7백 화두 가운데 하필 이 화두를 나에게 던진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참고로 필자 사주를 보면 태어난 날이 병진(丙辰) 일주에다가 인(寅)이 2개 들어 있다.

병(丙)에 대해서 인(寅)은 문곡성(文曲星)이자 학당(學堂)으로 작용한다.

 

문곡성은 북두칠성 가운데 하나로서 학문을 상징한다.

학문은 학문인데, 살아서 빛을 보는 학문이 아니고 죽고 난 뒤에 빛을 보는 학문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경영학이나 법학·의학을 하면 살아서 빛을 보지만, 주역이나 음양오행 같은 분야는 살아 생전에는 별로 영양가가 없는 음지의 학문에 해당한다.

 

반대로 문창성(文昌星)은 살아서 빛보는 학문을 암시한다.

따지고 보면 내 팔자에도 문곡성이 있었으니까 그 많은 분야 가운데 하필 이 분야를 연구하게 된 것이다.

 

학당은 선생팔자라는 뜻이다. 문곡성과 학당이 2개씩이나 들어 있는 사주이니까 이 친구는 책을 많이 보았겠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여기에다 하나 덧붙이자면, '목화통명(木火通明)'이 작용한다.

팔자에 목과 화가 많으면 통상 분석력이 좋다고 해석한다.

병(丙)은 화이고, 인(寅)은 목이다. 활활 타는 불에다가 장작을 자꾸 들이밀면 그 불이 더 타기 마련이다. 그런 사주를 목화통명격이라고 부른다.

무인보다는 문인들에게 이 사주가 많고, 문인 가운데서도 복잡한 사안을 간단하게 압축하고 정리하는 신문사 칼럼니스트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그 대신 성질이 급해서 자기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화투를 치다가 고도리 원단이 들어오면 곧바로 얼굴빛이 변하므로, 돈 따기는 틀렸다.

어찌됐거나 목화통명인 필자도 '강호동양학'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지 않은가.

박도사는 나와의 첫 대면에서 여덟 글자를 스캐너로 획 하고 한번 긁어보고 나서 벌을 날렸음에 틀림없다.

벌 화두의 요체는 구멍이다. 네가 들어온 구멍을 찾아서 다시 그곳으로 나가야 한다. 생과 사가 같은 구멍이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들어온 구멍을 천착해야 함은 물론이다. 들어온 구멍은 논리 가지고는 접근할 수 없는 심연(深淵)과 같다. 화두도 잡아보고, 호흡도 해보고, 기도에도 빠져 보아야 한다.

요는 논리라고 하는 활주로를 쭉 따라 가다가 어느 순간에 이륙(take off)을 해야 하는데,

그 테이크 오프가 쉽지 않다.

필자를 포함해서 이 세상의 멍청한 자들은 끝까지 활주로만 구르다가 하늘에는 한번도 떠 보지 못하고 죽는 것 같다.

벌 화두로 필자의 야코를 죽인 다음 제산이 내놓은 카드는 한 권의 필사본 책이었다.

제목을 보니『성명규지(性命圭旨)』라고 써 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사람이 이런 책도 가지고 있었나?'

『성명규지』는 도가의 일급 비서이다. 중국 명대의 도사들이 단학을 수련할 때 참고하던 내단서(內丹書)로서, 유·불·선 삼교합일의 입장에서 성명쌍수(性命雙修)를 강조하고 있는 책이다.

국내에서도 이 책은 도교전공 학자들 몇몇이나 알고 있을 뿐 일반인은 잘 모르는 책이다.

여기서 성(性)은 불교의 주특기로서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는 방법이고,

 명(命)은 도교의 주특기로서 호흡법을 통하여 몸을 강철같이 단련하는 법이다.

성만 닦고 명을 닦지 않으면 지혜는 밝지만 몸이 아프고 신통력이 나오지 않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명만 닦고 성을 닦지 않으면 몸은 1백살 넘게 장수할지 몰라도 무아(無我)의 지혜는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불교의 장점과 도교수련의 장점을 모두 겸비해야만 진정한 도인이 된다는 입장이 성명쌍수이고, 『성명규지』의 주장이다.

그날 두 사람 사이의 대화 가운데 사주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나누지 않았다.

4~5시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금의 기인·달사들에 관한 일화들을 유쾌하게 주고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는 『성명규지』의 출처는 끝내 발설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출처에 의문을 갖고 있다가 최근에 제산의 친동생인 박광춘(朴光春·60세, 현재 서울 연희동 거주)씨로부터 결정적인 제보를 받았다. 소개하면 이렇다.

박광춘이 중학교 다닐 무렵인 1950년대 후반 늦가을 어느 날에 함양 백운산 입구의 영암사(靈岩寺)를 찾아갔다.

형인 박광태(박도사의 호적명)가 당시 영암사에서 도를 닦고 있었는데, 형에게 쌀 열 되를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박도사는 동생에게 '오늘 내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다'고 하였다.

얼마 후에 과연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인이 왔다.

옷은 한복을 입었고, 얼굴빛은 노인인데도 불구하고 대춧빛처럼 홍조를 띠면서 반짝거렸다.

머리칼도 검었다. 그 시간은 해가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었고, 비가 퍼붓는 날씨였다.

우산도 없었지만 그 노인의 옷은 빗물이 묻어 있지 않았다.

박도사는 동생을 그 노인에게 간단하게 인사시키고 나서 너는 옆방에 가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면서 귀에다 대고 '오늘 선생님 신발을 들여다보아라'고 속삭였다.

박광춘은 형 말대로 그 노인이 신고 온 흰고무신의 밑창을 들여다보았다.

놀랍게도 흙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그 빗속을 통과해서 왔는데도 불구하고 신발이 깨끗하였던 것이다.

형님과 두어 시간쯤 이야기하던 그 노인은 갈 때도 어둠을 뚫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박광춘씨는 보름 전에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40년 전에 들여다보았던 그 노인의 흰 고무신에 흙이 하나 묻어 있지 않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 노인은 충청도 사람으로서 성씨가 윤씨였으므로 윤선생님으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윤선생은 축지법을 사용하던 신선이었던 것이다.

박도사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선생은 바로 이 윤 신선이었다.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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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 들자 장관이 朴도사에 비소식 물어


게재일 : 2003년 12월 19일 기고자 : 원광대 초빙교수 조용헌


제산 명리학의 사상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도교를 만나게 된다.

내단서(內丹書)인 『성명규지』도 비중있는 도교의 경전이다.

영암사를 방문하였던 윤 선생도 단학을 연마하던 도교의 수련가이자 신선이었고

지리산과 인연이 깊었다.

지리산은 한국에서 가장 주목할 산이다.

계룡산파는 미래를 예언하는 주역의 전문가를 많이 배출했고,

속리산파에선 사람을 치료하는 의약(醫藥)에 밝은 도사가 많이 나왔고,

오대산파는 도(道)·불(佛)이 혼합된 경향을 지니고 있고,

금강산파는 축지법과 차력에 능하였고,

묘향산파는 우리 민족의 뿌리인 단군사상을 보존하고 있었다. 『

 

천부경』과 『삼일신고』는 묘향산파의 노력에 의해 그 맥이 아직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계룡산파는 군부대가 들어오면서 타격을 받았고, 금강산과 묘향산은 이북에 있었기 때문에 그 맥이 단절되었을 것이다.

지리산파의 특징은 1백살을 초과하는 신선을 많이 배출하였다는 점이다.

산이 육산(肉山)이라 후덕한 편에다, 골짜기가 많고 산의 둘레가 넓어 은둔하기 쉬운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저수지가 깊어야 큰 고기가 살 수 있듯이 산이 넓고 깊어야 큰 인물이 배출된다.

저수지가 얕으면 낚시꾼들의 눈에 금방 띄어 사냥을 당해 버리고 만다.

한국에서 지리산은 숨어 있을 만한 산이었다.

제산의 가장 큰 스승이었던 윤 선생은 충남 아산 출신이었다.

한국전쟁 때 지리산으로 피란 와 처음에는 함양에서 한약방을 하다 제반 여건이 갖춰지자

지리산 깊숙이 들어가 눌러 앉은 경우라고 들었다.

여기서 제반 여건이라 하면 법(法)·재(財)·지(地)·려(侶) 네가지 조건을 말한다.

법은 스승이고, 재물은 돈, 지는 거주할 암자, 려는 같이 공부할 도반이다.

 

이 네가지를 갖춰야 신선 공부에 착수할 수 있다.

돈이 필요한 이유는 초기 공부 과정에서 의식주에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독신자는 부담이 작지만, 이미 결혼한 사람 같으면 가족들의 생계를 마련해 주고 산으로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 걱정 때문에 공부가 덜 되어 하산하고 마는 우를 범한다.

제갈공명이 유비를 따라 나설 때 가족들 생계용으로 뽕나무 3백주를 마련해 주고 왔다는 말이 있듯이,

기혼자는 이 뽕나무 3백주가 가장 큰 짐으로 작용한다.

필자도 뽕나무 3백주 때문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뽕나무 3백주는 마련할 길이 감감하고,

세월은 자꾸만 흘러간다. 영국의 독설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제산은 1970년대 후반 계룡산으로 들어온다.

계룡산에 들어올 때 당시로는 거액에 해당하는 1천만원이 수중에 들어왔다.

제산의 능력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제산을 후원하였던 김복동 장군과 농수산부 장관을 하던 장덕진씨가 함께 보내준 돈이라고 한다. 생계 걱정 말고 산에 가서 공부에 전념하라는 의미였다.

1천만원 가운데 7백만원은 가족에게 생활비로 남겨 놓고, 나머지 3백만원을 가지고 계룡산 법정사에 머물렀다.

제산이 계룡산 시절 비용을 대 발행한 책이 한 권있다.

『선불가진수어록(仙佛家眞修語錄)』이다. 선가와 불가의 핵심 노하우를 밝혀 놓은 책이다.

 

여기에 보면 여자가 제대로 수행 하기 위해서는 생리를 끊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참적룡'(斬赤龍)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적룡을 베어라'다. 여자의 멘스를 붉은 용으로 표현하였다. 멘스가 매달 나오면 영(靈)이 빠져버리므로 저수지에 수문을 세워 물을 가두듯이 여자는 생리를 인공적으로 중단시켜야만 본격적인 수행의 길로 접어든다는 내용이다.

만약 나이가 들어 멘스가 이미 끝나버린 여자는 단전호흡을 통해 멘스를 회복시킨 다음에 다시 끊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반대로 남자는 정액을 가두어야 한다. '항백호'(降白虎)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정액이 흰색이므로 백호로 상징되고, 이 정액을 밖으로 배출시키지 않고 내면에 가두어 두어야만 수행이 진전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호의 항복을 받아야 한다. 즉 성적인 욕망을 컨트롤 해야 한다는 말이다. 『선불가진수어록』에는 '항백호'와 '참적룡'이 남녀 수행법의 핵심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부분이 도교 수련의 독특한 점이다. 불교나 유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하다.

주목할 점은 이 책의 맨 뒷부분이다. 끝장에는 무오년(1978년) 3월 20일에 발행되었다고 적혀 있다.

저자는 백운산인(白雲山人) 윤일봉(尹一峯)이고, 발행인은 계룡산인(鷄龍山人) 박제산(朴霽山)으로 인쇄되어 있다. 발행인 박제산은 박도사다. 그렇다면 저자인 백운산인 윤일봉은 누구인가?

 

종합적인 정황을 고려할 때 백운산인 윤일봉은 윤 선생으로 추정된다.

50년대 후반 비오는 어느날 저녁 백운산 영암사를 방문할 때 고무신에 흙을 묻히지 않았다는 그 문제의 인물이다.

이를 종합하면 78년 이 책을 발행할 때까지 윤일봉은 제자인 제산과 모종의 커넥션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신선 소리를 들으려면 적어도 1백살은 넘어야 한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증명해야 한다.

 

나는 최근 이 윤 선생이 지리산에 아직 생존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1백10살이 좀 넘는다고 한다. 법명은 청허선사(靑虛仙師)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제자가 "선생님, 선생님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왜 세상에 나가 경륜을 펼치지 않으십니까?"하고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너 영화 본 적이 있지? 한번 본 영화를 또 보면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 한번 본 영화를 나더러 또 보라는 말이냐?"

신선 이야기를 길게 하면 나만 정신병자 취급 받으니까 입을 닫아야겠다.

그 대신 70년대 후반 제산의 계룡산 시절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당시 대단한 가뭄이 들었다.

정부에는 비상이 걸렸고, 주무 부서인 농수산부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장관은 장덕진씨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각료 회의에서 가뭄대책을 세우라고 다그쳤고,

해당 부서 장관인 장덕진은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대책이란 양수기 수만대를 외국에서 사오는 일이었다.

그때 장 장관은 평소 알고 지내던 박도사가 생각났다.

양수기 수만대를 외국에서 수입하려면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데, 혹시 박도사에게 물어보면 무슨 수가 없을까 해서였다.

계룡산에서 공부 중이던 제산은 장덕진 장관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 내가 천기를 보니까 몇월 며칠에 반드시 비가 오게 되어 있다. 그때까지 견뎌보라"고 조언했다.

 

장 장관은 양수기 수입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얼마 후에 정말 비가 올 것 같으면 양수기를 구입하는데 들어가는 예산을 아낄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약 보름 정도를 적당한 이유를 대면서 미루었다고 한다.

만약 그날 비가 오지 않으면 장관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정말 비가 올 것인가.

하지만 비가 오기로 예언되어 있는 날이 내일로 다가왔는데도, 비가 올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밖에 나가 하늘을 보니 별만 총총하게 빛났다. 일기예보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 나는 박 도사 말 믿었다가, 내일쯤 목이 날아가겠구나! 하고 체념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도 날씨가 맑은 편이었는데, 점심 때가 지날 무렵부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얼마 있다가 장대 같은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전국적인 가뭄이 해갈되었다.

나는 살았다! 대한민국 만세다!를 외쳤음은 물론이다.

원광대 초빙교수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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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도사, '구령呪' 암송하며 신통력 키워

朴도사의 내공 증진법


---중앙일보 2003.12.25 15:20 입력

논리와 신비. 이 두 가지는 인류 정신사의 영원한 숙제다.

논리가 발달된 사람을 보면 신비적 직관이나 영감이 퇴화되게 마련이고,

반대로 영감이 발달된 사람은 논리가 약하다.

월급쟁이는 논리만 가져도 충분하다. 그러나 최고경영자(CEO)를 하려면 논리에다 영감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

논리를 단련하는 방법은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감을 개발하는 방법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영감이란 다차원의 복잡성을 일차원의 단순성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명리학의 공부 방법도 마찬가지다.

사주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보는 단계는 논리를 학습하는 과정이다. 일단은 열심히 책을 파야 한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하는 4차원 게임은 책을 열심히 본다고 해서 정복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직관과 영감을 길러야만 가능하다.

사주에 관한 책들은 오직 평균개념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평균은 가운데만 알 수 있고, 아래와 위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마치 주식시세의 변화를 나타내는 그래프와 같다. 일종의 통계와 같다는 말이다.

그래프와 통계를 통해 대강의 변화는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시점에 닥쳐서 반드시 예전 그래프대로 움직이라는 법은 없다.

디테일을 알기 위해서는 그래프 외에 플러스 알파, 즉 영감이 있어야 한다.

도사들이 영감을 개발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 중의 하나가 주문(呪文)을 암송하는 것이었다.

소리는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도 파워를 지닌다. 반복해서 어떤 소리를 내면 효과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만번 수십만번 그 이름을 반복해서 불러주면, 주술적인 힘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소리는 또한 인체의 오장육부하고 관련 있기 때문에 특정 소리를 계속해서 발성하면 그 해당 장기가 강화되거나 약화될 수 있다.

종교적인 용도의 주문은 좀더 복잡해진다.

종교적 주문은 그 소리와 감응하는 신들의 세계가 있고, 이 신들의 세계에서 그 사람에게 힘을 준다.

마치 인터넷에서 클릭을 반복해서 들어가다 보면 특정의 사이트와 접속되는 이치와 같다.

제대로 접속이 되면 그 사이트에 저장돼 있는 정보를 무한정 이용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죽통병'이 그것이다.

주문수행은 '죽거나, 통하거나, 병들거나'중의 하나로 귀결된다.

담력이 약한 사람은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정신착란에 빠져 버릴 수 있다.

제산이 암송한 주문은 '구령삼정주(九靈三鼎呪)'였다.

그는 명리학 책을 통해 신통력을 완성한 것이 아니고, 바로 이 '구령삼정주'를 암송해서 능력을 얻었다는 것이 필자의 최종결론이다.

구령주는 도교의 '옥추경(玉樞經)'이라는 경전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주문이다.

 

조선 후기에 민간도교에서 '칠성경(七星經)'과 함께 '옥추경'은 재야의 방술에 관심이 있는 지식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경전이었다.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효험이 즉발하였기 때문이다.

'칠성경'이 북두칠성을 받드는 신앙을 담고 있다면, '옥추경'은 우레의 신을 받드는 경전이었다.

전자가 주로 명이 짧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용도로 숭배되었다면,

후자는 우레의 신을 이용하여 잡귀를 쫓는 양재초복(禳災招福)의 용도였다.

 

'옥추경'을 추적하면서 발견한 사실은 추사 김정희도 이 경을 중시하였다는 점이다.

조선후기 도사들이 애용하였던 '옥추경'판본에는 추사의 글씨가 들어가 있다.

그 서문을 추사가 써 놓은 판본이 있다.

추사에 대한 연구 논문을 보아도 이 서문에 대한 분석은 아직 발견할 수 없었다.

아름답고 품격있는 추사체로 서문이 장식된 '옥추경'은 불교의 '천수경(千手經)'과 함께 조선후기에 가장 애송되던 주문이었다.

추사가 '옥추경'을 좋아했던 배경에는 종교적인 효험도 한편으로 작용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경에 나오는 문장이 좋아서 그랬다고 본다.

즉 이 경의 운율이 아주 기막히게 맞는다는 것이다. 운율은 리듬이다.

같은 문장이라도 운율이 맞아야 암송하는 재미가 있고, 운율이 맞다 보면 노래처럼 흥겹게 암송할 수 있다.

지금이야 운율이 퇴색해 버렸지만 조선 후기의 한문 식자층들에게는 한문 고유의 운율을 중시했던 것 같다.

 

'옥추경'의 운율은 추사뿐만이 아니고, 조선 후기에 '정역(正易)'을 저술한 김일부(金一夫.1826~1898)에게까지 이어진다.

'정역'의 주장은 선천과 후천의 교체다.

선천시대가 양적인 에너지가 주도하는 세상이었다고 한다면, 후천시대는 감성적인 성격을 지닌 음적인 에너지가 주목받는다고 보았다.

여자들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본 것이다.

김항은 그 변화를 '금화송(金火頌)'이라는 노래로 표현하였다.

김일부가 남긴 5개의 금화송 가운데에서도 첫째인 '금화일송(金火一頌)'의 내용이 바로 '옥추경'의 운율을 따서 지은 내용이라고 한다.

금화송을 운에 맞춘 이유는 운이 맞아야 거기에서 영적인 힘이 나온다고 본 까닭이다.

이 지적은 평생 동안 계룡산파의 멤버로서 정역을 연구해온 권영원(權寧遠.1928~) 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구령주 역시 운율에 맞추어 암송하는 주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제산의 구령주를 추적하면 백운산 영암사 시절부터 지도를 받았던 윤일봉 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윤일봉은 충청도 아산 사람으로서 계룡산파와 관련이 깊었던 인물이었다.

김일부와도 모종의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지리산파였던 제산은 구령주를 연결고리로 해서 계룡산파의 김일부와 끈이 이어졌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박도사가 보여주었던 가공할 만한 파워의 진원지는 구령주라고 하는 주문이었다.

박도사는 구령주의 파워를 너무 많이 발휘한 감이 있다.

세간에 너무 노출됨으로 해서 피곤한 인생을 살아야만 하였다.

명성이 알려진 도사는 익명의 다중을 상대하여야만 한다.

익명의 다중, 그 가운데는 온갖 사람과 사건이 잠복되어 있다. 도사는 그 잠복된 지뢰를 미리 알고 피해 나가야만 하는 고난도의 직업이다.

10개의 지뢰 중에서 9개는 피하더라도 마지막 한개를 피하지 못하고 그물에 걸려들면 그야말로 처참한 망신을 당한다.

'그러고도 네가 도사냐?'하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감수해야 한다.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 비결은 은둔이다. 숨어 있어야 한다.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은 악어가죽을 거처에다 걸어두고 보았다고 한다.

왜 악어냐?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악어의 두껍고 질긴 가죽처럼 욕심이 많다는 사실을 통찰하기 위해서다.

둘째는 악어처럼 물속에 숨어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악어는 평상시 물속에 숨어 있는 동물이다.

오로지 두 눈만 내놓고 몸은 물속에 숨어 있으므로 밖에서 볼 때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악어는 밖을 잘 관찰할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상대방은 물속에 숨어 있는 악어를 관찰할 수 없다.

나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볼 수 있지만, 상대방은 나의 움직임을 볼 수 없도록 하는 처신은 천기(天機)를 다루어야 하는 도사의 필수적인 덕목이 될 수 있다.

만약 악어가 물 밖으로 나가서 바위 위에 올라가 햇볕을 쪼일 때는 대단히 위험하다.

노출되어 있으므로 사냥꾼의 집중사격을 받을 수 있다.

제 아무리 신통력이 있다 해도 일단 무대 위로 올라가면 집중사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총을 쏘면 어떻게 하겠는가. 맞아야지 별 수 있겠는가.

비상구가 봉쇄된 무대에 올라간 도사에겐 불행만이 기다린다.

그러므로 도사는 무대 위로 올라가기 전에 삼십육계 놓을 자리를 미리 확보해둔 뒤에 올라가야 한다.

36번째 마지막 계책은 역시 튀는 일이다. 이 세상은 어찌 되었든 튀어야 한다.

진(晉)나라 때 저명한 풍수이자 도사였던 곽박도 도망을 가지 못해서 결국 권력자에게 희생을 당했다.

당대(唐代)의 도사 양구빈과, 송대(宋代)의 도사 오경만은 머리를 깎고 절로 숨어 버린다.

애석하게도 박도사는 튀지를 못하였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따라다니는 통에 마음 편하게 쉬지 못하였다.

결국 66세의 나이로 2000년에 사망하였다. 도사치고는 너무 일찍 죽었다.

나는 박도사의 일생을 보면서 공성신퇴(功成身退.공을 이루면 몸을 숨긴다)의 철리를 되씹어 본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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