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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시계왕국이었다 (KBS역사스페셜2001년5월19일)
하늘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깨달았던 시절, 세계 기술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정밀한 시계가 조선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혼천시계" 이다.
혼천시계는 우리 선조들이 별자리를 보고 시간을 관측했던 원리 위에 자동으로 움직이는 기술을 첨가한
당시로서는 최첨단 정밀 시계였다.
1669년 관상감 교수 송 이영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국보 제230호 ‘혼천시계’는 지구가 정확히 하루 1회전을 하는 천체 관측기구와 함께 ‘진자의 등시성’을 이용한 최첨단 시계가 장착되어 있다. 서양에서는 단지 배척된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것이 조선에서는 실용화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대형 천문시계의 경우 10여초까지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세계 최고의 시계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시계기술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는 세종때이다. 일종의 물시계인 자격루는 수숫대에 물이 차오르면 위로 올라가게 설계된 잣대가 구슬을 치고 숟갈기구를 통해 더 큰 구슬을 작동시켜 마침내 인형의 팔뚝을 건드려 징이 울리면서 시각을 알렸다. 이전까지는 사람이 직접 시간을 측정하는 아날로그 방식이었다면 구슬이 떨어지는 순간 자동시스템이 작동되는 디지털 방식으로 변모했다는 것. 일반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계절에 따라 태양의 기울기가 달라진다는 점을 이용해 시간과 동시에 그날의 절기까지 알려주는 독창적인 달력 겸용시계였다. 조선시대 특히 세종때 왜 시계에 주목을 했을까. 세종은 1년전에 예보된 일식의 시간이 15분 가량 차이가 있다고 하여 예보관을 바로 곤장을 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시계를 중요시했다.
당시 천문을 관측해 시각을 알아내는 일은 천자국인 중국만의 권한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우리나라의 시각이 중국과 틀리기 때문에 우리의 시간을 만든 것이다. 이는 한글창제의 이유와 동일하다.
혼천시계..추와 진자를 동력으로 사용한 ‘세계유산 시계’
혼천시계는 1985년 국보 제230호로 채택됐지만 20 여년 동안 정부가 혼천시계를 연구하거나 홍보한 적이 없었다. 학계도 마찬가지다.
혼천시계를 가장 많이 연구하고 세계에 알린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의 역사학자 조지프 니덤이다. 중국과학사의 대가인 영국의 조지프 니덤 교수는 “조선의 혼천시계는 동아시아 시계학사에서 획기적인 유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극찬한 바 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2005년 혼천시계를 복원한 충북대 이용삼 교수는 “송이영이 만든 혼천시계는 물이 동력원이 아니라 추와 진자를 동력으로 사용한 시계였다”며 “서양의 시계와 동양의 혼천의가 결합되어 운행하는, 전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유산”이라고 설명했다.
◇혼천시계의 구조 혼천시계는 크게 혼천의 부분과 시계장치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용삼 교수팀은 혼천시계 구조를 다음과 같은 7개 부분으로 나누었다(그림). 이 중 위에 있는 추(추1)가 시계를 운행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괘종시계에서 태엽에 해당하는 셈이다.
추에서 만들어진 에너지는 왼쪽의 혼천의, 오른쪽의 시계장치에 각각 전달돼 2가지 기구를 모두 돌린다.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오른쪽의 시계장치다. 혼천의 부분은 태양과 달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으로 오늘날 달력과 가깝다. 그 오른쪽 아래 수평으로 있는 박스가 시보장치. 오늘날 시계판에 해당한다.
시보장치에는 자, 축, 인, 묘 등이 새겨진 12가지 시패가 있다. 시패는 시계침이라고 보면 된다.
시보장치 옆쪽에 구슬장치가 있다. 타종장치는 두번째 추(추2)와 연결되어 있다. 타종장치는 추의 뒤쪽에 있어 구조도에서는 겹쳐보인다. 앞에서는 안 보이지만 혼천의 뒤쪽에 종이 달려 있어 시간을 알려준다. 중력에 의해 추(추1)가 아래로 내려가면 추에 달려 있는 수평축이 돈다. 이 에너지는 가장 아래에 있는 톱니바퀴에 전달되며 여러 톱니가 맞물려 탈진장치로 연결된다.
탈진장치란 시계의 기어속도를 일정하게 해주는 장치로 시계의 정확도를 높이는데 필요하다. 이 부분이 바로 서양에서 1657년 처음 개발된 것으로 동양의 혼천시계에는 처음 도입된 것이다. 탈진장치의 진자에는 추가 달려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됐다. 시보장치에는 시패가 있어 시간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밤 11시~새벽 1시에는 자(子), 새벽 1~3시에는 축(丑)이 앞쪽으로 나와 시간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시간을 귀로 들을 수도 있게 했다. 자시에는 9번, 축시에는 8번, 인시에는 7번 하는 식으로 종치는 횟수를 달리해 시간을 알렸다. 구슬이 장착되어 있다가 특정 시간이 되면 아래로 떨어져 나무상자를 가로지르는 긴 막대기를 건드린다. 타종장치에는 작은 막대기가 있어 종을 친다.
아래쪽에 있는 두번째 추(추2)에서도 타종을 위한 에너지를 제공한다. 자시부터 9, 8, 7, 6, 5, 4번의 타종이, 그리고 매 시간의 중간에 1번씩 종이 울리게 된다.
매우 정교한 물시계, ‘자격루’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릴 수 있는 시계’를 만들도록 하라! 당시의 시계가 정확하지 못해 이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시각을 알리는 데 종종 실수를 하였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종은 장영실을 불러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시각에 따라 스스로 알릴 수 있는 시계’를 만들 것을 명하였다.
임금의 명을 받은 장영실은 김 빈과 함께 시각을 맡을 나무 인형을 만들어 물시계를 지키는 관리의 노고를 덜어 주도록 자격루(自擊漏)를 만들었다.
세종 15년(1433년)에 완성된 자격루는 일명 ‘자동시보장치’를 지닌 매우 정교한 물시계이다. 자격루라는 이름은 자격궁루(自擊宮漏, 스스로 치는 궁궐시계)에서 연유한다. 종, 북, 징이 저절로 울리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시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지 않아도 정확한 시각을 알 수 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데다 편리하기까지 한 자격루의 완성에 자부심을 가진 세종은 1437년 7월 1일부터 자격루를 국가의 표준시계로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광화문에 큰 종과 북을 세우고 자격루의 시보인형이 치는 종과 북소리를 듣고 대종고를 울리면 종루의 종지기들이 여기에 맞추어 인정과 파루의 종을 쳤다.
물시계는 정교하게 만들어져 보수 유지와 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에 궁궐 안에 설치해두고 서운관이 시간 관리를 맡았다.
자격루의 구조와 작동방법
파수호와 수수호
옛 기록에 보면 세종 때의 자격루는 물 보내는 그릇인 파수호(播水壺) 4개, 물 받는 그릇인 수수호(受水壺) 2개로 이루어져 있다.
물이 들어오는 양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크고 작은 파수호 4개를 나란히 배열하였고 두 개의 수수호를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하나의 수수호가 다 차서 물을 비우는 동안에 다른 수수호에 물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부전(浮箭)은 수수호 안에 띄우는 살대인데 계절에 따라 사용하는 부전의 길이가 달랐다.
물이 수수호에 차고 살대가 떠올라 일정 높이에 도달하여 미리 장치해 놓은 격발장치를 건드리기만 하면 쇠구슬이 굴러 내리고 그 쇠구슬은 다른 장치들을 건드려서 여러 장치를 움직이게 한다.
자격루 시보장치 부분
조금 복잡하지만 왼쪽의 그림을 보면 그 움직임을 자세히 알 수 있다. 큰 구슬(A)이 통로를 지나 아래로 떨어지면 단통(B)을 지나 숟가락 모양의 격발장치인 기시(C)를 젖혀, 여기에 연결된 기구의 한 쪽 끝(D)이 통으로부터 올라와 사진목인(P)의 팔뚝을 작동시켜 종을 친다.
동시에 격발장치 기시(C)와 연결된 쇠줄은 원기둥(E)에 부착된 통(F)의 밑 부분에 설치된 작은 문짝(H)을 위로 당겨주어 앞서 횡목의 북단(N)을 누르고 있는 쇠공(M)이 밖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이에 따라 횡목의 남단(S)이 낮아지고 시각을 알리는 팻말을 든 인형(K)이 밑으로 내려오게 된다.
부력에 의해 떠오른 부전으로 얻은 에너지를 쇠공의 낙하에 의한 운동에너지로 바꾸어 시보장치를 작동시킬 추진력을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연속적인 물의 흐름(아날로그 신호)을 정해진 시간 간격에 따라 불연속 신호(디지털 신호)로 바꾸어 나타낸다. 농부의 농사짓는 모습, 선녀가 방울을 들고 나타나는 모습 등 보다 다양한 동작의 인형이 나타나고 사라지게 하였다. 특히 옥루에는 자동으로 움직이는 천체의 모습도 함께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의미 있는 장치이다.
김 돈의 『흠경각기』를 보면 옥루를 보는 제왕으로서의 세종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세종 14년부터 19년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천문의기와 해시계, 물시계 제작의 결정판이 바로 옥루이다.
세종은 당시의 사업이 중국의 어느 천문의기와 시계들보다도 훌륭한 것이었다고 자부하면서, 옥루와 같은 기구의 제작을 통해서 과거 요, 순, 탕왕, 무왕에 버금가는 치세를 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영실이 세상을 떠난 이후 고장난 자동장치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격루를 수리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자격루가 만들어진 지 백여 년 만인 중종 31년(1536) 6월에 비로소 새 자격루가 완성되었다.
현재 덕수궁에 보존되어 있는 자격루의 유물들은 바로 이때 개량된 것이다. 그나마도 남아 있는 것은 세 개의 파수호와 두 개의 수수호, 그리고 부전뿐이고 자동시보장치의 정밀한 부품들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자격루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한다. 그동안 자격루의 외형은 여러 차례 복원되었으나 전통 방식 그대로 작동하는 자격루의 복원은 처음인지라 매우 기대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격루 복원도
자랑스러운 유산, 자격루 과학기술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이지만 오늘날에 평가해도 매우 탁월한 장치라 할 수 있다.
특히 정밀한 시간 측정 기술과 자동 시보 시스템에서 우리네 조상들의 훌륭한 기술력을 엿볼 수 있다. 시간이 되면 저절로 인형이 나오고 북과 징을 치는 기구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물건이다. 시간을 측정할 필요에 의해 시계를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시계는 왕권과 질서의 상징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자격루는 조선조의 과학기술을 이끈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대표적인 해시계 '앙부일구'
앙부일구
앙부일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해시계로 가장 널리 보급되었다. 세종 때에 만들어져 후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시계판이 가마솥 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앙부일구란 이름이 붙여졌다.
앙부일구의 기본 형태는 원(元)나라의 그것과는 같지 않은 독창적인 모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곧 영침(影針)이 가르키는 그림자를 통하여 시각을 알게 하였으며, 하늘의 반(半)만 그렸던 점도 좀 다르다.
특히 글자를 모르는 백성을 위하여 12지신상의 시신(時神)을 글자 대신 새겼고, 그것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두었다는 기록은 무척 흥미롭다.
시간을 알 수 있는 시반(時盤)은 다른 해시계와는 달리 오목면으로 거기에 시각선 뿐만 아니라 계절선을 그렸다. 계절선은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13개의 계절선으로 표시하였다.
1년 중에서 하지 때에 그림자가 가장 짧기 때문에 하나의 계절선으로 표시하고, 또 동지 때에 그림자가 가장 길기 때문에 이것 역시 하나의 선으로 처리하였다.
즉 하지선과 동지선은 각각 한 개의 선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22개 절기는 그 사이의 선으로 표시하였는데, 하지 후인 소서 때와 동지 전인 대설 때의 그림자 길이가 같은 까닭에 한 개의 선에 2절기를 나타내었다. 이런 식으로 하여 13개의 위선(緯線)으로 계절선이 새겨져 있다.
다음으로 시각선은 계절선과 직교되게 그었다. 해가 떠 있는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즉 묘(卯)시부터 유(酉)시까지를 새겼으며, 각 시(時)는 다시 반으로 나누어 초(初)와 정(正)으로 구분하여 지금의 1시간 단위로 구분하였다.
그런 다음 1시간을 4등분하여 1각이 되도록 하였다. 결국 1각(刻)인 15분을 단위로 시각선이 그어졌고, 묘시(卯時)ㆍ진시(辰時)ㆍ사시(巳時)ㆍ오시(午時)ㆍ미시(未時)ㆍ신시(申時)ㆍ유시(酉時) 등의 각 시(時)는 8등분으로 구분하였다.
영침의 끝은 앙부일구의 구심(球心)에 오게 하고 그 방향은 천구의 북극을 향하도록 일구의 남극에 고정시켰다.
일구의 상면에는 왼쪽(서쪽)부터 오른쪽으로 묘ㆍ진ㆍ사ㆍ오ㆍ미ㆍ신ㆍ유의 시간을 나타나는 글자를 선상에 써두고 계절선에는 동지ㆍ하지 등의 24절기를 은상감으로 새겨두었다. 결국, 앙부일구는 영침의 해 그림자가 가르키는 곳을 통하여 그 때의 절기와 시간을 알 수 있는 오목 해시계이다.
앙부일구, 그것은 서민의 시계였다. 앙부일구 테두리에는 자, 축, 인, 묘와 같은 시간을 나타내는 한자와 더불어 12지신을 그려두어 한자를 모르는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그림만 보면 시간을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계절에 따라 태양의 기울기가 달라진다는 점을 이용해 시간과 동시에 그날의 절기까지 알려주는 독창적인 달력 겸용 시계였다.
이후 백성들도 시계를 만들 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부채 끝에 매달고 다닌 선추해시계, 소매속에 넣고 다닌 휴대용 앙부일구는 지금도 남아 있다.
왜 시간이 중요했나 대형 천문시계는 10 여초까지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조선의 시계는 고도로 정밀했다. 이렇게 정확하게 측정된 시간은 어디에 쓰기 위한 것일까? 칠정산 내편에 따르면 일식이 일어나는 시간을 초 단위까지 계산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조는 천문을 관측해 시간을 관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정통한 사람임을 입증하는 틀로 알았고 그 때문에 시간을 측정하는 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세종의 비밀 프로젝트, 시계 만들기 천문을 살펴 시각을 알아내는 일은 천자국(중국)만의 권한이었다. 중국사신이 오면 천문대인 간의대 담장을 높여 가려야 했고 조선 역서인 칠정산은 겉장을 중국 역서로 바꾸어야만 했다. 중국과 다른 조선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한 노력이 조선을 세계적인 시계왕국으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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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