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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부용산과 박기동 시인
밍널 추천 0 조회 36 12.10.20 20: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3년 전남벌교 누이가 묻힌 부용산을 54년만에 찾은 박기동 시인(우)(출처:광주타임즈)   

  

 

다음까페《불혹의 노래》<언덕에 올라>에 "부용산 오릿길에"(노을, 2009.1.29)가 서늘한 가을 바람 든 내 가슴을 더욱 슬프게 한다. 카페에 올려져 있는 글을 그대로 읽어본다. 특히 <부용산>은 60~80년대 저항가요로 불려지면서 운동권과 진보지식인들 사이에서 그 명맥이 유지돼 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슬픈 노래는 무엇일까, 단연 부용산이다. 일반인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노래이다.

부용산 오릿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이 노랫말을 쓴 사람은 목포 항도여학교에 국어교사였던 박기동(1917~2004)이다. 박기동은 14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영문학을 공부한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였다. 영문과 교수도 마다하고서 우리말을 지키겠다며 일부러 국어교사가 된 뛰어난 문인이었다. 이 詩는 박기동이 사랑하던 누이 동생과 애제자 김정희의 잇따른 죽음으로 탄생한 노래였다. 1947년, 갓 시집간 박기동의 누이동생이 폐결핵으로 쓰러져 눈을 감았다. 천사같던 누이를 부용산에 묻고 내려오던 박기동은 산자락에 주저앉아 부용산을 써내려갔다. '부용산 오랫길에...잔디만 푸르러...'

이듬 해 다시 사랑하는 제자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김정희는 전국 글짓기 대회에서 '감화원 설계'라는 제목으로 대상을 받은 천재 문학소녀였다. 김정희의 죽음은 전교적인 슬픔이었다.  당시 이 학교 음악교사로 안성현이 있었다. 안성현 역시 동경대학을 나온 천재적인 성악가이자 작곡가였다. 안성현은 그 슬픔을 노래로 만들기로 결심, 박기동의 책상 서럽에 있던 시 '부용산'을 꺼내어 오선지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노래가 부용산이었다.

그 때부터 목포 일원에서 불려지기 시작하던 이 노래는 들불처럼 남도 일대를 휩쓸어 갔다. 그러다가 6.25가 터졌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던 빨치산들이 다시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랫말이 애절한데다 자신들이 놓인 처지와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노래는 빨치산들의 주제곡이 되고 말았다.
사연이 기구하기도 하다. 

노래를 작곡한 안성현이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성현은 무용가 채승희의 시집 조카로 채승희와 함께 북으로 갔던 것이다. 빨치산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라 못마땅하게 주시하고 있던 차에 작곡가 마저 월북을 하자 노래를 수상쩍은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안성현이야 월북을 했다지만 박기동은 사상을 의심받아 학교에서마저 쫓겨나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당국의 눈총은 매섭기만 했다. 80년 대까지 수시로 가택수색을 당하는 등 수난을 당했다. 하는 수 없었던 박기동은 1993년에 호주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누이동생의 죽음을 슬퍼한 죄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이 노래가 얼마나 장엄하고도 슬픈지 베토벤의 웅장한 음악을 듣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 노래는 클래식을 하는 사람들이 더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빨치산, 운동권, 문인들의 술자리 등에서 불려지며 맥을 이어온 노래이다. 문인들 중에서도 이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사람은 시인 김지하와 시인이자 평론가인 송욱 선생이시다. 특히 송욱 선생은 클래식 음악을 섭렵한 분이라서 그 분이 부르는 부용산은 가히 전율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이제는 해금되어 노래의 진원지인 목표여고 교정에는 시비도 세워져 있다. 가수 이동원, 안치환 등이 불러 이제 대중에 좀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노래이다. 부용산 오랫길에~~~ 노을~"

 

위 '노을'의 글에 석사아빠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답글(53만에 추가된 2절, 2009.1.29)이 실렸다. "노을이야기 의 글을 읽고 마음에 무언가가 끓어 오르기에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작사가인 박기동 선생이 노래비 제막을 앞두고 부탁을 받고 첫 소절 작시 이후 53년만에 2절을 작시하여 추가하였답니다. 전문입니다.[출처: 양심상 쓰고 싶은데 이 게시판에서는 금지된지라..개인적으로 물으시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홀로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 글을 읽고 부용산, 박기동, 안성현 등이 궁굼했다. 부용산은 전남 벌교에 있는 해발 95미터의 나지막한 산이다.  박기동이 10세때 여수에서 벌교로 이사와 살던중 친누이 박영애가 1947년 24세때 폐결핵으로 죽자 부용산에 묻었다. 박기동은 1917년 여수 돌산에서 태어나 일본 간사이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했다. 귀국후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57년 목포사범학교를 끝으로 교직을 떠났다. 그런 그가 호주에 살다가 2003년 귀국해, 1999년 9월 30일 보성 벌교 오리 길에 세워진 <부용산 시비>를 둘러봤다. 이후 2004년 서울에서 작고했다. 박기동이 재직했던 목포여고 교정에도 지난 2002년 부용산 노래비가 세워졌다.

 

부용산 노래를 작곡한 안성현은 누구인가.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자로 알려진 음악가다. 1920년 7월 13일 나주 남평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 동방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목포 항도여중에서 교편을 잡다가 1940년 행방불명 됐다. 목포 항도여중은 현재 목포여고로 바꿨다. 내가 인천에 살적에 재능대학에서 만났던 신춘문예 5관왕에 빛나던 이근배 시인은 '그 산이 어디 있던가'를 부제로 <부용산>이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는《불교문예》 2006년 가을호에 발표됐다. 

 

인사동을 지나다 보면

가끔 송상욱 시인을 만난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 포로 복장 같은

그러나 아주 잘 어울리는 개량한복을 입고

얼추 내 키만한 통기타를 메고는

허리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키 큰 사내

그를 만나면 먼저 부용산 한 자락이 깔린다

내가 그 노래를 처음 듣기로는

휘파람을 잘 부는 송영에게서였는데

선우휘 선생은 산사람(빨치산을 가리켜)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혹시 북쪽노래? 했더니

나랑 한솥밥을 오래 먹은 서정춘이

부용산도 잘 뽑지만

그 내력도 소상히 들려줘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었다

그래도 부용산! 하면 송상욱이라

내가 가보니 못한 그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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