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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Anchor”은 배를 정해진 위치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장치를 가리킵니다. 배는 목적지에 도착하면 원하는 자리에 멈추기 위해서 가장 먼저 닻을 내립니다. 내려진 닻은 해저海底 밑에서 끌려오다 일정한 장소에 깊숙이 박힙니다. 동시에 배가 완전히 멈춥니다. 이후, 배는 시간에 따라서 방향이 바뀌는 물의 흐름과 쉬지 않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의해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지 않고 닻과 연결된 밧줄의 범위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날려버릴 기세로 휘몰아치는 거대한 태풍 속에서도 안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닻은 배에 반드시 갖춰져 있어야하는 너무나 소중한 도구입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 곧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기 위하여 기꺼이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거룩한 몸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거룩한 피를 기꺼이 흘려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당했어야 마땅한 형벌을 기꺼이 담당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속전贖錢 기꺼이 지불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영원한 안녕安寧을 확보해 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고해苦海와 같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반드시 마음에 모셔야할 닻이십니다. 그는 갈릴리 바닷가에 배를 대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물고기로 채워져 있어야할 배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배를 육지로부터 조금 떼어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신을 찾아 나온 무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마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바라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바라보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향하던 시선을 모두 멈추셨습니다. 모든 행동을 멈추셨습니다.
하나만 바라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전심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에게 집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사랑하는 당신 백성에게 온전히 집중하십니다. 마음과 시선을 완전히 고정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야합니다. 마음과 시선을 고정할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뜬금없이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리고 고기를 잡으라.”(눅5:4b)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는 바닷가 출신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었습니다. 그야말로 전문 어부였습니다.
이미 밤새도록 이어진 힘겨운 고기잡이를 끝낸 상태였습니다. 그물까지도 깨끗하게 씻어 놓았습니다.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목수인 아버지를 도와주며 자라셨습니다. 고기잡이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갖추지 못하셨습니다. 그물을 던져 본 적도 없으셨습니다. 거기다 고기잡이를 위한 최적의 시간은 밤이었습니다. 지금은 태양이 바다에 눈부시게 작렬하는 아침이었습니다. 그물은 적당한 깊이에 내려야했습니다. 모든 상황이 그물을 내리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정적인 모든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지금 당장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전문 어부라고 한다면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그물을 내리겠습니다.”(눅5:5)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고기를 잡기에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불합리한 명령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반박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어부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경력과 방법을 내려놓았습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입니다.
자발적이었다고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설명하기보다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설명하는 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능력은 저와 여러분이 완전히 비워질 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저와 여러분의 삶은 자연 법칙은 물론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선을 완전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완전히 비어짐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하나님의 역설逆說입니다. 실제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불합리하고 부적합한 명령에 순종하자 도무지 믿기 어려운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눈을 씻고도 찾을 수 없었던 물고기 떼가 어디로부터인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내린 그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지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옆에 있었던 동료들의 배까지 가득 채우고도 남았습니다. 그로서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순종은 반드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순간,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자존심을 포기했습니다. 수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비굴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할 수도,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었지만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포로나 노예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을 완전히 포기해야 될 수도 있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연한 회귀回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허락해주셨던 본래의 자아를 되찾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이미 부어주셨지만 허물과 죄 때문에 잃어버렸던 아니 나타내지 못했던 본래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을 되찾는 것입니다. 포기하면 되찾게 되는 역설逆說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으로 충만하지 않은 이유는 나를 비워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눅5:8b)라는 고백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 보여주시는 신적인 권능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는 상대적으로 나약하고 비천하며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존재에 불과한 자신의 본연本然의 정체를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회개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삶의 가장 첫자리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살아내야 할 새로운 삶의 질서를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어디든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죽는 자리까지도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자신만큼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야말로 삶의 대전환이 시작되었습니다. 거칠 것이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시작은 그랬습니다.
당시 유일한 대세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야말로 탁월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따라다녔습니다. 거기다 온갖 귀신들이 무기력하게 쫓겨났습니다. 각종 질병이 떠나갔습니다. 심지어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거의 매일 쉬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동료이면서 의지하고 있었던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습니다.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이유로 허무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생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베푸신 직후부터 여전히 세상 영광을 추구하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분리되고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쉬지 않고 이어지는 도전을 받으셨습니다. 이상하게도 스스로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죽을 운명에 처하셨습니다. 자신은 물론 동료들의 운명도 암담했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의 독립과 하나님 나라 완성은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왕위에 등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 편 자리에 앉아서 세상 영광을 누리기는커녕 죽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리 알려주신 대로, 세 번 부인한 다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받고 눈물까지 흘리며 조금 흔들리기는 했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주님,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6:68b)라는 대답이 무색했습니다. 여러 번 진정으로 체험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떠났습니다. 다시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전문 어부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습니다. 죽지 못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고기잡이 뿐이라 그물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피라미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불현 듯 “좋은 아침이구나! 아침거리로 뭘 좀 잡았느냐?”(요21:5a)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힘없이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필연적인 결과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철저한 실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보고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순종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물고기들의 움직임이 느껴졌습니다. 물고기들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끌어올리지 못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의 바로 그 경험이었습니다. 동시에 “주님이시다!”(요21:7a)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앞뒤 가리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습니다. 마음과는 달리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료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알고 계시지 않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한 번 더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는 이번에도 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역시 자신이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알고 계신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집요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는 근심했습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주님, 주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주님께서 틀림없이 알고 계십니다.”(요21:17a)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압도되었습니다. 감격했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기적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마음과 처지를 헤아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절망의 심연으로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배려와 진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유일한 닻으로 모셨습니다.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준비를 갖췄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예비 되어 있었던 험악한 미래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서 순교할 때까지 쉬지 않고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 :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눈뜰 때Knowing Scripture”라는 책의 저자인 그R. C. Sproul는 “내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날 믿는 자들을 위한 (영혼의) 닻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은 저와 여러분의 기대나 바람 정도가 아닙니다. 믿음에 기초한 미래에 대한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고, 그 소망에 닻을 내리는 믿음의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신실한 언약의 보증 속에서 그야말로 완벽하게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은 흐른다. : 삶의 지표가 필요한 당신에게 바다가 건네는 말”이라는 책의 저자인 그녀Laurence Devillairs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건 커다란 닻이다. 이 닻은 성스러운 닻 혹은 자비의 닻이라 불린다...인생에게는 마음에 바람이 몰아칠 때 고통을 가라앉혀주고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커다란 닻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휘청거리는 배에서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닻입니다.
성스럽고 자비로운 이 닻은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져 있는 저와 여러분이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도무지 벗어나기 힘든 어려움이 닥쳐도,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 싸워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고해苦海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성스럽고 자비로운 닻이신 하나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이라는 은혜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많은 무수히 많은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한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무수히 많은 여인들 가운데 다섯 번씩이나 남편을 바꾼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상종하지 않으려는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지역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신 당신의 비밀을 당대를 휘어잡고 있던 헤롯 왕에게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정치와 종교적인 부분에서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던 산헤드린 공회에서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기둥만 있고 벽은 없는 로마 황궁의 주랑柱廊에서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우물가에 그것도 열두시에 물을 길러 나온 보잘것없는 여인에게 밝히셨습니다. 순간, 여인은 자신의 허리를 휘게 만들었던 물동이를 던져버렸습니다. 여러 남자를 전전하며 살아 온 기구한 삶의 수치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인생인지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평소에는 의도적으로 피했던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정신없이 달리다 다부진 체격의 베드로와 정통으로 부딪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다시피 하며 서둘러 마을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처음만난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방금 내가 한 일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분은 내 과거가 어떻든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미천한 나에게도 마음을 써 주신다고 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형제들이 물도 없는 구덩이에 던져버렸던 요셉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보낼 만 한 자를 보내라며 당신의 부르심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모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의 압제로부터 겨우 벗어난 성민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대신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외쳤을 때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당신과 함께 머무는 동안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긴 성민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주는 자신들을 구원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다고 외치는 두 명의 정탐꾼을 대적하던 성민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연인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삼손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죄가 없는 다윗을 죽이려고 뒤쫓는 사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다윗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잊고 우상을 섬기는 성민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성민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민 이스라엘로부터 등을 돌릴 수 있으셨습니다. 떠날 수도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극히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후, 채 두 돌이 되기도 전에 살해당할 뻔 하셨지만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낭떠러지에 세우고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을 때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형제들이 조롱할 때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으실 때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시간에는 당신을 경배하고, 불 앞에서는 당신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얼굴에 침 뱉은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치는 구경꾼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채찍이 옆구리를 파고들만큼 무참하게 휘두르는 병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손을 십자가에 못 박는 병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아 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셨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히6:19)라고 외쳤습니다.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약속대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지으신 피조물에게 모진 고난과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신 약속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실하게 이루어주시는 하나님만큼 안전한 닻은 없습니다. 확실한 닻은 없습니다.
배가 흔들릴수록 닻의 존재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유일한 닻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얼마든지 아니 당연히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에게 패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도무지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깊은 절망 속에서도 소망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아름다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이유입니다. 안전하고 또 확실한 닻 되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가장 선하고, 가장 아름답고,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제시한 무수히 많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수없이 많은 환난과 시험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던 시인은 “주님! 주님이야말로 제가 (미래에) 받을 (유일한) 유산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내려주십니다. 저의 미래는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시16:5)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안다. 평안이다. 재앙이 아니다. 너희에게 미래의 소망을 주는 것이다.”(렘29:11)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을 유산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복을 부어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미래를 책임져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약속을 이루어주십니다. 내일은 재앙이 아니라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인생을 사는 동안 안전하고 확실한 닻이신 하나님 안에 머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복된 삶, 하나님께서 마음을 써주시는 복된 삶, 매일 안전하고 확실한 닻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으로 가득 찬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