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목성 대기권 진입/1995. 7. 13
◀ 1979년 3월 1~3일에 보이저 1호가 촬영한 목성의 갈릴레오 4대 위성 중의 하나인 유로파
1995년 7월 13일 미국의 무인 우주탐사선 갈릴레오는 목성을 탐사하기 위해 무게 335kg의 탐사체를 목성의 대기권에 진입시켰다. 목성과 그 위성들을 탐사하기 위해 갈릴레오가 지구를 출발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탐사체가 목성 대기에 관한 자료를 갈릴레오로 보내오면 갈릴레오는 그것을 받아서 다시 지구로 전송했다. 같은 해 12월 탐사체는 적도 부근에 있는 목성의 대기 속으로 떨어졌고, 갈릴레오는 목성 주위의 궤도를 도는 최초의 인공위성이 되었다. 탐사체는 온도, 압력, 밀도, 화학조성 및 구름층 등 목성의 대기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다. 탐사체는 대기의 높은 열과 압력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 57분 동안 자료를 보내왔고, 본선은 지금도 목성 주위의 궤도를 돌면서 목성과 16개의 위성에 관한 풍부한 사진과 자료를 보내오고 있다.
김승호/金勝鎬
1918. 7. 13 강원 철원~1968. 서울.
영화배우.
◀ 김승호
본명은 해수(海壽). 3대독자로 태어나 보성중학을 중퇴했다. 1937년 김두한의 소개로 동양극장 전속인 청춘좌에 들어가 연기생활을 시작했고 해방 이후 자유극장에서 본격적인 연극활동을 했다. 이후 서월영·유계선 등과 함께 극단 청탑을 만들어 공연했고 극단 대지, 낭만극장의 대표를 지냈다.
광복 후에는 극단 신협(新協)에서 유치진(柳致眞)의 《소》, 이만택(李萬澤)의 《무지개》, 차범석(車凡錫)의 《갈매기》 등에 출연했다. 그의 첫 영화출연은 전창근 감독의 《해방된 내 고향》으로 47년 서울 우미관에서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청년이 서울로 돌아왔으나,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농촌사업에 일생을 바친다는 이야기였다. 그 뒤 56년에 출연한 《시집가는 날》은 한국 최초로 <아시아영화제> 희극상을 수상했다. 《박서방》 《육체의 길》 《굴비》 《로맨스빠빠》 《혈맥》 등에 출연했다.
1744 프랑스 혁명가 마라 태어남/Jean Paul Marat
1793 프랑스 혁명가 마라, 욕실에서 암살됨
◀ "오에르 그림《S.코르데에 의해 암살된 J.P.마라》, 베르사유 랑비네미술관 소장"
프랑스 정치가. 프랑스혁명기의 산악당(山岳黨, Montagnards) 당수이다. 당시 프로이센왕국령(王國領)이던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며 양친은 칼뱅주의자였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사르데냐 출생의 의사이고 어머니는 프랑스인이었다. 보르도와 파리에서 의학을 연구한 뒤 1767년 런던, 이어 뉴캐슬의 어펀타인에서 개업하는 한편 I. 뉴턴을 비판하는 논문을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에 보냈다. 그 후 프랑스로 돌아와 77년부터, 나중에 샤를 10세가 된 아르투아백작의 경호대 주치의로 근무했으나, 89년 혁명발발에 찬동하여 인권선언의 사안(私案)을 발표했다. 또 같은 해 9월 중순부터 《인민의 벗(L'Ami du Peuple)》지를 발간하여 J. 네케르에 대한 논박과 라파예트 공격에 지면을 할애하고 민중을 혁명의 원동력으로 예찬했다. 투옥되거나 당국의 수배를 받기도 했지만 예리한 정세 판단과 격정적 성격으로 민중에게 인기가 있었다. 코르들리에클럽 회원으로서, 국왕의 발렌도피사건 뒤에는 입헌군주제를 공격했다. 민중의 직접 행동을 주장함으로써 튈르리궁전을 습격한 <8월 10일 사건>에 심리적 영향을 끼쳤다. 이 사이 지방 연맹병(聯盟兵)과도 접촉해 왔던 그는 봉기 후 조직된 코뮌에서 감시위원이 되었다. 국민공회(國民公會)에는 파리대표로 참가했는데 산악당 안에서도 가장 먼저 독재를 주장한 특이한 존재였다. 93년 4월 지롱드당 의원들의 결의에 따라 혁명재판소로 보내졌지만 무죄가 되었다. 그 후 승세를 잡아 6월 12일의 민중봉기 때에는 추방시킬 지롱드당 의원 명단을 작성했다. 7월 13일 지롱드당의 신봉자 샤를로트 코르네에 의해 암살되었다. 유해는 파리의 팡테옹에 매장되었다가 94년 7월 테르미도르의 반동 후 철거되었다.
진흥왕 순수비, 사적으로 지정/1972
◀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영화 "사랑과 영혼" 개봉/1990
영화 "사랑과 영혼(Ghost)"이 미국에서 개봉, 그 해 흥행 1위를 기록했고 1965년에 히트했던 "Unchained Melody"를 주제가로 다시 유행시켰다.
한말 애국계몽단체 보안회 설립/1904. 7. 13
1904년 7월 13일(광무 8)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애국계몽단체인 보안회가 설립되었다. 일본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가 황무지 개간권을 얻으려고 일본공사관을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자, 조선민들의 분노와 함께 일제의 황무지개척권반대운동이 고조되었다. 이에 송수만·심상진 등이 서울 종로 백목전에서 보안회 발기회를 갖고, 회장에 신기선, 부회장에 정유인을 추대했다. 보안회는 일제와의 대항세력으로 활동하다가 협동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점차 활동이 위축되어갔다. 보안회는 독립협회의 성격을 계승했던 최초의 계몽운동단체로서 일제의 황무지 개간요구를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소잉카/Wole Soyinka
1934년 7월 13일 태어남 ~ .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인간 정신의 지평을 열어 주는 어떤 예술 작품도 그 본질상 변화를 위한 힘이고 변화를 위한 수단이라고 믿습니다."
- 올레 소잉카
소잉카는 198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나이지리아의 작가이다. 요루바족 출신으로 이바단대학교와 영국 리즈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가면' 극장을 설립했고, 나이지리아 독립을 경축하는 희곡 <숲의 춤 Dance of the Forest>을 썼다. 대학교수이자 극작가·시인·소설가·비평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한편, 반정부 비판에 적극적으로 나서 탄압을 당했다. 나이지리아 내전이 일어나자 비아프라의 독립 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고(1967~69), 1970년대 이후에도 정권 교체에 따라 영국·미국·프랑스 등지에서 수차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희곡들은 희극에서 비극, 정치 풍자극에서 부조리극에 이르기까지 광범하며, 서구 전통의 영향을 아프리카 고유의 신화 및 민담과 결합시킨 독특한 세계를 보여 준다. 대표작으로 <제로 형제의 시련 The Trials of Brother Jero>(1960)·<사자와 보석 The Lion and the Jewel>(1963)·<광인과 전문가들 Madmen and Specialists>(1965) 등이 있고, <그는 죽었다 The Man Died>(1972)·<아케: 어린 시절 Ake : The Years of Childhood>(1981) 등의 자서전도 썼다.
제1회 월드컵 우루과이서 개막/1930
축구를 통해 인류 평화를 도모하자는 줄 리메 국제축구연맹 회장의 꿈이 1928년 5월 26일 연맹 총회에서 월드컵 탄생으로 이어졌다. 총회는 1930년 제1회 대회를 가진 뒤 4년마다 한번 올림픽이 쉬는 해에 열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헝가리, 스웨덴이 첫 개최를 희망했다. 하지만 이듬해 총회에서 우루과이가 첫 개최국으로 선정됐다. 우루과이는 1924년과 1928년 올림픽에서 축구 금메달을 딴 축구 강국이었다.
우루과이 월드컵은 13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30년 7월 13일 몬테비데오에서 막을 올렸다. 주경기장이 미처 완공되지 않아 보조 경기장에서 개막식을 가졌고, 개막 5일 뒤에야 주경기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원래 첫 경기는 개최국 차지였으나, 프랑스 혁명기념일 을 맞아 프랑스와 멕시코전을 개막 경기로 열었다.
주최국 우루과이는 강호들을 연달아 격파한 뒤 결승에서 아르헨티나와 만났다.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펼친 끝에 4-2로 승리, 결국 줄 리메 FIFA 회장이 높이 30cm,무게 4 kg인 금으로 만든 '줄 리메컵'을 우루과이팀 주장 호세 나사지에게 수여했다. 이로써 우루과이가 '줄 리메컵'의 첫 주인이 됐다. 열광과 환희가 우루과이 전역을 휩쓸었고 이튿날은 공휴일로 선포됐다. 우루과이 월드컵엔 불참국이 있었지만, 이제 월드컵 불참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됐다.
12음기법의 창시자 쇤베르크 사망/1951
◀ 쇤베르크
음악의 성과에 있어 '콜롬버스의 알'이라고 일컫는 업적을 이룬 쇤베르크가 1951년 7월 13일 노후 오랫동안 앓아오던 천식으로 이날 생을 마감했다.
쇤베르크가 46세였을 때 그는 제자 요세프 루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오늘 어떤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으로 인해 앞으로 100년에 걸쳐 독일 음악의 패권이 확실해 질 것이다"라고... 그 발견이란 바로 '12음기법'이었다. '12음기법'이란 평균 1옥타브 안에는 12개의 다른 음이 있어 그것들을 한 개씩 이용해 음렬(音列)을 만들게 되는데 이 '음렬'을 잘 이용해 작곡하면 어떤 조성(調聲)에도 속하지 않는 '무조(無調)'의 음악이 체계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상호간에 만 관계되는 12음에 의한 작곡방법'이었다.
유태인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그가 유태인으로서의 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12음기법의 발견이 있은지 얼마 안되서의 일이었다.
제자 A. 베르크 및 A. 베베른과 함께 <신빈악파> 또는 <제 2 차빈악파>를 형성하였다. 특히 <12음음악>이라는 새로운 기법의 음악을 창조하여 20세기 예술음악 전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일찍부터 음악에 흥미가 있어 9세 때에 독학으로 최초의 작곡을 했다. 1891∼95년 은행근무를 하는 한편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첼로연주자로 활동하며 지휘자 A. 체믈린스키로부터 대위법(對位法)을 배웠다. 그 후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고, J. 브람스·R. 바그너 등 후기낭만파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아 R. 데멜의 세기말적 제재에 의한 텍스트를 새로운 대위법적 감각으로 처리한 《맑게 갠 밤(1899)》을 발표했다.
그 뒤 베를린에서 지휘자·음악학교교사를 지내면서 작곡활동을 하여 《현악4중주곡 제 1 번(1905)》 《실내교향곡(1906)》 등으로 표현주의적 무조음악(無調音樂)이라는 독특한 음악양식을 확립하였다. 초기 형식의 대표작은 A. 지로의 시를 작곡한 《달에 홀린 피에로(1912)》이다. 여기서 소프라노와 5명의 실내악연주자가 노래와 이야기의 중간형식인 <슈프레히게장>이라는 새로운 소리기법과 장조·단조 등 조성(調性)의 중심음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무조의 기법으로 <밤>과 <피>의 이미지를 그렸는데, 이것은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12음기법>도 만들었는데, J.S. 바흐 이후 서양음악의 합리적 음악어법을 바꾼 것으로서, 새로운 <지(知)의 체계>에 따라 치밀한 음의 질서를 갖게 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변주곡(1928)》을 작곡하였다. A. 히틀러에 쫓겨 1933년 미국으로 건너가 41년에 미국시민권을 얻었다. 1936년 이후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나폴레옹에 바친 오드(1942)》 《바르샤바의 생존자(1947)》 등 반나치즘 작품을 썼다.
고선지 장군, 토번 공격 시작/747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군.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 안시[安西]에 가서 20살 때 장군에 올랐으며, 740년경 톈산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하였다. 747년 북인도의 소발률국(小勃律國)을 토벌하였으며, 750년 사라센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을 쳐서 왕을 잡아 온 공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그 뒤 석국왕을 참살한 데 분개한 사라센이 탈라스[恒羅斯]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오자 정벌군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이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로서 진압에 나섰으나 부하의 무고로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시인 청마 유치환 출생/1908
◀ 유치환
시인. 호는 청마(靑馬). 경상남도 통영(統營) 출신. 유치진(柳致眞)의 동생이다.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 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중 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주재·간행했고, 39년 첫번째 시집 《청마시초》을 발간했다. 여기에는 36년 《조선문단》에 발표한 <깃발> 등을 비롯해 53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동양적 관념의 세계를 노래한 것이 많다. 40년 만주로 이주했다. <절도(絶島)> <수(首)> <절명지(絶命地)> 등은 이 무렵 만주생활에서 느낀 고독감을 읊은 것으로, <생명의 서(書)> <일월> 등과 함께 두번째 시집 《생명의 서》에 실려 있다. 8·15 뒤 청년문학가협회장 등을 지내면서 민족문학운동을 전개했으며, 6·25 때에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때 쓴 시들을 모아 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발간했다.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교직생활과 시작(詩作)을 병행했다. 생명파 시인으로서 그의 생명에 대한 애정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온갖 사물의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생명에 대한 애정이 그의 시의 바탕을 이루고, 그 바탕 위에서 동양적인 허정(虛靜)·무위(無爲)의 세계를 추구하며, 또한 이러한 허무의 세계를 극복하려는 원시적인 의지가 살아 있다. 자유문학상·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부산 에덴공원, 경주 불국사, 통영남망공원(南望公園) 등에 시비가 있다. 시집 《울릉도》 《청마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이 있으며, 자작시 해설집으로 《구름에 그린다》 등이 있고, 유고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있다.
그밖에
2002년 박정구 금호그룹회장 별세
2001년 민주당 장영신 의원, 대법원의 구로을 선거구 선거 무효 판결로 의원직 상실
2000년 미국-베트남 25년 만에 자유무역협정 체결
1998년 박세리 '98제이미 파 크로거대회'에서 우승(미여자프로골프 투어 최다 언더파 타이기록인 23언더파)
1998년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 참의원선거 참패로 사퇴
1998년 프랑스월드컵 결승전에서 프랑스가 브라질을 3:0으로 완파하며 우승
1997년 러시아 발레리나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사망
1995년 김대중, 정계복귀 선언
1989년 일본 해저화산 폭발 시작
1987년 과기원 유전공학센터, 세계 3번째로 항암제 인터루킨 개발
1985년 소련 장대높이뛰기선수 부부카, 6m의 세계신기록 수립
1985년 아프리카 기아구제를 위한 록 콘서트, 런던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
1983년 병역법안 첫 입법 예고제 실시
1983년 영국 사형제도 부활안 부결
1981년 아세안 5국이 제안한 캄보디아 분쟁의 평화적 해결책 모색위한 75개국 국제회의 개막
1980년 보츠아나의 초대 대통령(1966-80) 카마 사망
1980년 중국-알바니아 경제협력 발표
1978년 문교부, 대학입시에 고교성적 내신제 반영 결정
1974년 계엄사 군법회의, 민청학련 관련자 7명 사형, 7명 무기징역, 9명 징역20년, 6명 징역15년 선고
1973년 신라 금관 발견
1972년 김대중의원, 외신기자회견서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 제창
1960년 미국 민주당대회서 대통령후보로 존 F 케네디 상원의원 지명
1958년 수에즈운하 분규 종식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간)
1949년 로마 교황청, 공산주의를 믿는 가톨릭교도는 파문할 것이라고 선언
1946년 미군정청(美軍政廳), 국립대학교 신설안 발표
1946년 국립 서울대안 발표와 반대운동
1930년 조선 각지에 대수해
1929년 김좌진, 한족자치연합회 조직
1921년 1908년 최초로 컬러 사진 감광판을 만든 프랑스의 물리학자 리프만 사망
1920년 조선체육회 창립
1919년 상해에서 임정적십자회 조직
1913년 미국의 제38대 대통령(1974~77) R.포드 출생
1911년 제3차 영국-일본 동맹조약 조인
1909년 라오스의 초대 대통령 수파누봉 출생
1904년 원세성-송수만-이기 등 보안회 조직 배일민중운동 전개
1896년 김하락 순국
1886년 미국 종교가 플래나간 출생
1882년 소련 트케르니 부근서 열차탈선사고 150명 사망
1808년 프랑스의 제3공화정 2대 대통령 마크 마옹 출생
1772년 제임스 쿡, 2차 탐험 출항
1308(고려 충렬왕 34) 충렬왕, 신효사에서 세상 떠남
646년 대당서역기 완성
첫댓글 유치환님 하면~ 깃발과 생명의 서가 떠 오릅니다.그리고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ㅎㅎ 반갑게 잘 읽고 갑니다.. ^^